매일묵상(2021/01/18-22)

2021/01/22
잠언12:14절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개역개정)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으며, 자기가 손수 일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새번역).

14절은 1-12절의 결론적으로 말과 행위의 결과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은 늘 하나님의 섭리 하에 놓여 있습니다. 나무가 생산하는 품질좋은 농산물과 같이, 선한 가르침, 화평으로 이끄는 지도력, 경건한 권고, 위로를 주는 격려 등은 사람의 기본적인 인격을 드러내며, 자연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고, 공동체가 유지되도록 합니다. 물론 여기서 ‘사람’은 의인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배(belly,위장)는 좋은 것들로 넉넉하게 채워지게 되고 삶은 윤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품성은 좋은 열매를 생산해내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그때 그런 선함은 돌아와 그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손이 행하는’이란 말은 윤리적으로 관련된 행위를 나타내며, “복록=복되고 영화로운 삶”이란 호의적인 행위를 보여줍니다. 14절은 언행일치, 즉 의인의 말과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어긋남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죠! 책임을 지려고 하니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는다”는 표현은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는 분리될 수 없음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결합을 만들어 내는 분은 다름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가장 초라한 행위도 마지막 날에 풍성하고도 영원히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12:14절의 진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최종적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잠19:17, 새번역)


2021/01/21
기독교를 가르치는 교사가 그의 반 학생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너희들 중 몇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느냐?” 몇 학생의 손이 올라갔습니다.
그 교사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니야, 너희들은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야. 너희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쌍한 죄인들로 태어난 거야”

이 문제에 대하여 범브란트 목사님은 “우리는 죄를 지으며 태어나진 않지만 죄인으로 태어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부모들을 통해 이 은혜가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전해질 수 있을 뿐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이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에 독특한 기독교의 인간관이 담겨 있으며, 기독교에 반발하는 인문학조차 현실 세계에서 소설과 역사 그리고 철학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실상 하나님은 우리를 모태에서 정직하게 살도록 지으셨으나, 아담의 범죄 이후로 세상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태어난 아이들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당연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아가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어진 세상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한 번이라도 범하면, 그는 죄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건지기 전에는 어떤 누구도 자유를 얻을 수 없고 마귀의 거짓말에 속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2021/01/20
루마니아의 정교회 신부님이 개비라는 네 살된 어린 한 소녀와 마주쳤습니다. 신부님이 입맞추고 축복받으라는 의미로 십자가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오히려 “내가 왜 십자가에 입을 맞춰야 하죠? 십자가는 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아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신부님이예요?” 하면서 신부님의 빰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의 탄식입니다.
“나는 성경 말씀에는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울부짖는 소리에는 귀가 먼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선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 만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소녀의 행위는 옳은 것이다.”

이런 고사가 있습니다. 노나라 대부 맹손은 새끼 사슴을 잡아 진서파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진서파는 어미 사슴이 울면서 수레를 따라 오는 것을 보고는 불쌍히 생각하여 풀어주었습니다. 이를 안 맹손은 크게 노하여 진서파를 추방하였다가 3개월 후 다시 불러들여 자신의 아들을 맡겼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부의 질문에 맹손은 “새끼 사슴을 불쌍히 여길 정도라면 사람의 자식은 얼마나 귀히 다루겠는가? 내 아들을 맡기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이 되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한비자). 사람의 됨됨이는 사랑의 열매로 파악하나, 됨됨이는 생각에 의해, 생각은 가치관에 의해 형성됩니다. 복음은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5-6).


2021/01/21
무신론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논리를 고수하자니 도대체 삼라만상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딜레마를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러시아에서 한 선생님이 진화론을 가르치자, 한 아이의 대답입니다. “선생님, 이런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항상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잔악할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악한 건 고릴라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는 “그건 사실일 리가 없어요. 나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들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즐겁게 놀고 있었고 땅콩을 던져주면 고맙다는 표시를 해요. 나는 잔악한 공산주의자들이 원숭이들처럼 행복한 동물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답이지만, 공통점은 공산주의자들이 잔악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입니다만, 공산주의 이념을 떠나면 그들도 그렇게까지 악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히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합리화된다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히틀러의 독일민족이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복음전도의 한계도 여기 있습니다. 믿음은 강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시대의 도덕과 법률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마음에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간직한 희망에 대해서 그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답할 준비를 하고 선한 양심으로 생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선한 일을 헐뜯고 욕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벧전3:15-16, 현대인의성경).


2021/01/22
시편 3장 4절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새번역)

시편 3장은 표제가 달린 첫 번째 시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유대 지파를 제외하고는 전 이스라엘 지파가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대적자들은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고,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2절). 문제는 다윗이나 대적자들이나 모두 여호와에 대한 같은 신앙과 고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누구의 판단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욥과 세 친구와의 대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원리는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인에게는 축복을”이라는 도식입니다. 이를 근거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재앙은 그의 불의와 죄악을 증명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반해 욥은 예외도 있음을 믿고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였습니다. 두 주장의 대립 및 전개가 욥기의 주제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다윗도 같습니다. 과거에 경험한 수 많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이번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 하나님의 실제적 구원이 오기까지 자신의 믿음이 옳바름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구원을 부르짖고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8절). 사무엘상의 기록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결국 다윗의 손을 들어주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할 때 구원은 언제나 만유를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법은 주님의 섭리적인 통치입니다.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3:5,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