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8
잠언12: 12절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개역개정)
“악당들의 견고한 망대는 무너져도 착한 사람은 뿌리를 내린다.”(공동번역)
10절과 11절에서 재물이나 경제적 번영은 현실적인 노동과 일(10-11a)을 통해 얻어져야 하지, 허망한 꿈을 쫓으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적은 잠언 기자는 12절에 이르러 경제적 이득에 관한 분별력을 한 단계 높여주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은 다른 악인들이 사람들을 착취하여 획득한 망대나 불의한 이득을 가지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으로 믿고 그것을 탐을 내지만 사실상 그 망대는 신뢰할 수 없는 방어막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재물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부자는 재산이 요새가 되고, 높은 성벽이 되려니 생각한다.”(18:11, 공동번역)라고 설파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악인의 삶은 덧 없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의인들은 자신들의 인격에 뿌리내려져 결실한 정당하고도 신뢰할 만한 망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망루의 결정체는 바로 주님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주님의 이름은 견고한 성루이므로, 의인이 그 곳으로 달려가면, 아무도 뒤쫓지 못한다.”(18:10, 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대기근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물이 풍성한 애굽으로 내려갔으나,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안전하게 구출된 것은 물론 많은 은금을 얻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고 부지런히 가축을 길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늘 주님을 경외하면서 자기 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일을 망치는 자와 형제간이다”(잠18:9, 새번역).
2021/1/7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대답하였습니다.
“죽으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거예요. 우리가 살아을 때 어머니들이 우리를 돌보아 주신 것처럼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고함 지르진 않으실 거예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힘 없는 아이들이 경히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큰 선물입니다. 특히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양에서 농노의 지위가 향상되고 급기야 해방되게 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던 것입니다. 지금 계속하여 인구가 감소하여 50만명에 턱걸이 하고 있는 포항시는 51만명 회복에 전 행정력을 투입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포항이라는 도시의 위상추락은 물론 50만을 기점으로 엄청난 행정상의 지원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구감소는 많은 지방에서 특히 심각합니다. 그래서 충북 제천시에서는 3 번째 자녀를 낳은 순간 4천5백만원에 해당하는 은행 빚을 시가 대신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한 명의 아이가 절실한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장 귀한 선물임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고함을 지르는 대신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면서 양육하여 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물론 잘못된 행동은 교정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성경의 가르침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십시오.”(엡6:4, 현대인의 성경).
2021/1/6
범브란트 목사님의 부부는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신 분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의 친척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고, 그분들의 가족과 친척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죄로 나치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런 일들이 진행되기 시작하였을 때,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는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같이 기도하자 미하이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도 죽일까요?” 이때 그는 겨우 네 살이었습니다.“어쩌면”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나요?” “경찰이 와서 우리를 차에 태워 데려갈 것이다.” 목사님이 설명하였습니다. 미하이는 차를 타 본 적이 없어서 좋아했습니다.“그럼 그들이 우리를 차에 오래 태워 줄까요?” “그래 주겠지,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그리고 나서는요?” “그리고 나선 총으로 우리를 쏘아 죽이겠지.”미하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진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조금 죽이고 나면, 우리는 후에 많이 부활할 거예요. 그리고 천국에 가겠죠. 경찰은 하늘까지 올라 오는 사다리를 모르니까 그곳까지 우리를 따라오진 못할 거예요.”
어린 미하이의 말 속에는 이미 2천년 전에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일부를 그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모여든 수만명의 군중들을 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시고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분”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활과 심판에 대한 믿음은 나찌의 공포 속에서 사는 어린 아이에게조차 위안과 담대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점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2021/1/5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유대지도층의 시기로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7:17-18). 이 대목을 배운 열두 살된 어떤 남자아이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되어 있어요. 의사들이 예수님을 시기했어요. 예수님이 공짜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이지요. 예수님 같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 아버지는 파산하고 말거예요.”
이 아이는 어리지만 선악의 판단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악판단 능력이 올바른 판단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의 판단 전에 복잡한 세상사를 이해할 능력 즉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영적인 분야에서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어도, 마구잡이로 고치신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믿고 오는 사람들만을 고쳐주셨고, 의사들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불치병들을 많이 고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표적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죽었음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세칭 기적의 한계입니다. 기적은 죄 때문에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뒤 이은 부활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악에는 아이들과 같이 지혜에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히5:13-14).
2021/1/4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창36:6-8).
야곱은 밧단아람으로부터 수 십년만에 아버지 이삭이 계신 헤브론으로 돌아가서는 에서와 함께 거주하였습니다. 이삭이 죽자 에서는 가나안 땅 남서쪽 세일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애증의 관계를 맺고 수 천년 동안 이웃에서 살아갔으며 로마에 함께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에돔의 도시 데만 사람들은 지혜로 유명하였습니다(예레미야 49:7). 그러므로 세상적인 관점에서 에서는 야곱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음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그럼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의 존부입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맹세하신 하나님과의 언약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에서의 후손은 믿음에서 떠나 ‘코스’로 추정되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언약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창37:1). 그리스도인들 역시 같습니다. 외형적인 삶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습니다. 그러나 내면에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는 생명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삶, 즉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자들 마음에는 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시63:3,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