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4
잠언 12장 10절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12:8절의 주제는 재물이나 명예 등 인생 전반에 걸쳐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9절은 이것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할망정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어 10절은 일꾼을 착취하지 말고 돌보아야만 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인은 자기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인은 당연히  자신이 부리는 짐승들의 욕구들조차 알아서 돌보아 줍니다. 하나님은 가축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 때 집에서 부리는 종들은 물론, 짐승들도 쉬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0:10; 23:11–12; 레 25:1–7). 또한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는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가축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증을 전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열등한 가축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더 고귀한 가치를 가진 종과 하인을 비롯한 인간에게는 더욱 자비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가축의 필요를 느끼고 돌보라는 말은 자신의 일꾼들을 돌보라는 잠언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산다면 그분이 우리의 부엌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은 성경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9:9-10).


2020/12/23
열살된 손녀 아멜리가 방 구석에서 놀고 있을 때, 목사님은 방문한 손님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견해를 가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견해에 대하여는 눈이 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견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천장을 보면 바닥은 볼 수 없게 되고, 바닥을 보면 천장을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전체를 파악하는 직관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고 있던 아멜리가 껴들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하였습니다.

“전체만 보는 것도 역시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전체만 보면 전체 외에도 전체를 이루는 각기 다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 라는 말도 실재의 일부에 불과한 추상에 불과해요. 진리는 모든 부분과 그들의 합인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예요”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고, 아멜리는 다시 인형놀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어릴 때의 정약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철학의 3대 과제 중의 하나가 인식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주만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는 진리가 아닙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이 창조주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14:6). 이 진리의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와 사망의 굴레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2020/12/22
어떤 사람이 농장에서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손을 구하는 어느 농장을 찾아 추천장을 그 농장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농장 주인이 추천장을 뜯어 보니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라고 씌여져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였지만 일손이 필요하였기에 그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갑자기 한 밤중에 강력한 폭풍이 농장이 있는 계곡을 흩어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비와 윙윙 거리는 바람소리에 놀라 농장 주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구한 일꾼을 불렀지만 그 사람은 아주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헛간으로 뛰어가 가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았더니 놀랍게도 먹을 것이 넉넉히 준비되어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다시 밭으로 뛰어가니 밀 곡식단들이 잘 묶여져 방수천으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곡식 창고로 뛰어가니 문들은 잘 잠겨 있었고 곡식은 아무 염려 없이 건조되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주인은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하는 말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말은 항상 신실하고, 우리의 사랑은 항상 따뜻하고 우리의 포옹은 단단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내가 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하였어야만 했는데”라는 고뇌 속에서 뒹굴면 안됩니다. 이것은 인생을 떠나는 마지막에 더 절박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늘 감사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12:35-36).


2020/12/21
때로 아이들은 예사스럽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 줍니다. 8살된 소녀의 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 체험도 없어요. 그분이 나에게 오라고 하셔서 나는 왔어요. 그분이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셨고, 그것을 나에게 주셨어요. 나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이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으면, 그들도 그분에게 안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께 초청하고 계십니다. 위의 소녀는 이 구절을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안식을 주셨다는 귀절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도여행을 다니실 때 막달라 마리아 등 여러 여인들이 섬겼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실 때까지 안식을 누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 승천하셨어도 만유의 주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 소녀의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안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매우 큰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