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1
아직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어린이들의 말을 들어 보면, 아주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가치관을 그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알렉스는 할아버지인 범브란트 목사님 가정에 진주 같은 지혜를 비추어 그분들의 삶을 자주 밝게 하여 주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다 좋아해요. 나는 하나님에게 속했거든요. 그러나 마귀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요.” 그 어린 알렉스가 가지고 있는 영분별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5:1-2). 알렉스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어도, 이미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한번은 TV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있을 때 알렉스에게 극의 줄거리를 설명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목사님은 알렉스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알렉스의 대답은 그가 단순히 이해 정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예, 할머니가 예수님의 줄리엣이예요.” 알렉스는 어떤 신학적인 설명을 해 주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 품고 계신 사랑이, 신랑이 신부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님에 의해 중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니고데모는 성경과 세상의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랍비였지만, 죄와 사망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종의 쇠사슬에서 풀어주셔야만 하는 것과, 이를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자신만을 사랑하는 인간이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의 길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2020/9/10
어떤 아이가 할아버지의 팔에 안겨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누가 할아버지를 만드셨어요?” “하나님께서 만드셨지.” “그럼 나는 누가 만드셨어요” “너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지.” “그렇다면 요즘 하나님 솜씨가 많이 좋아지셨네요. 실습을 많이 하셨을테니까요. 이젠 얼굴에 주름 같은 건 만들지 않게 되셨나봐요.” 하나님께서 나아지신다? 이 아이의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36:11)는 말씀을 받아 포로로 잡혀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대보다 우리 세대의 한국인들에게 보다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순전히 건강과 관련해 본다면 우리들은 좋은 의료진들과 시설을 갖춘 나라에서, 양질의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혜택이 코로나19로 인하여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0-50년 이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질병이 많고, 가난한 나라로서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폐병은 매우 무서운 병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폐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무서웠던 폐병은 지금 한국에서 소멸된 전염병 중 하나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의학과 과학의 진보가 있었던 것은 인간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하면 안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진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 신자들은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 이웃들은 물론 이웃 국가들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코로나 19 백신만 주면 중국과 벌이고 있는 영토분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까지 한 상태입니다. 어렵고 가난한 나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장 우리 북쪽에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역사의 키는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와 도움의 영역을 넓혀 가야만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6:18).


2020/9/9
“애야, 네가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에 대해 나한테 애기 좀 해 봐라” 어떤 남자가 어린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소년은 단순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너무 작아서 하나님같이 위대한 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소년은 순교자 저스틴(‘유스티아누스’라고도 불리움)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했을 때 하였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저스틴의 생애는 그의 저작인 유대 랍비 ‘트리폰과의 대화’와 그에 관한 순교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AD 100년 경 팔레스틴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리에 목마른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였지만,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중 어느날 체사리아 바닷가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저스틴이 기독교 안에 있는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그분의 영혼에 섬괌이 일어나면서 플라톤 사상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상에는 그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을 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죽음에 직면하여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화를 받고 여기 진정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이후 로마에서 그리스도 철학을 강의하며 많은 글을 남겼으며 3권의 책과 몇가지 서신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65년경 저스틴과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혔습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오현제 중 하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161-180)로서 기독교를 맹렬히 박해한 황제였습니다. 로마 장군 루스티쿠스 앞에 선 저스틴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라는 것을 거절하는 동시에 제기된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는 제자들과 함께 참수당하였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이르러 이분의 이름 앞에 ‘순교자’라는 칭호를 붙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2020/9/8
“하나님은 어마어마하게 큰 분이세요.” 알렉스가 어린애다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때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19세기 초에 파푸아 뉴기니아 섬에서 순교당한 이탈리아의 선교사 요한 마주코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대양을 크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작은 배를 타고 석달 걸려 그것을 건넜다. 만약 어떤 분이 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신다면, 대양은 모래 한 알보다 작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차지하려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단 한분만이 크시고 또한 영원하시다,” 옳은 말씀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실 때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하신 뒤 할례의 언약과 이삭의 출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이 늙은 것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기 때문에 속으로 웃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셔서 지금과 같은 수 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세상에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억압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경건하지 못한 나라, 내 진노의 ​​백성”(사10 : 6)이라고 불리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로 주님이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Yes’입니다. 우주는 다시 만들어 질 것입니다 (사65:17).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호 2:23; 사 65:19).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일은 여호와의 종 즉 메시야를 통해 주어진 교훈 때문에 일어날 것으로 이사야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네 번의 종의 노래(이사야 42장-53장)에서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그 여호와의 종이 실제 나타나신 바가 된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모든 시험을 다 겪으시면서 참된 교훈을 주신 뒤, 우리의 모든 죄를 끌어 안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예수께서 만유의 주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주신 계명들을  마음에 두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2020/9/7
어거스틴이 성 삼위론에 관해 책을 쓸 생각으로 깊은 명상에 잠겨 바닷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아예 책을 쓰려던 계획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간 그는 울고 있는 한 어린 소녀를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보세요. 내가 모래 속에 이렇게 큰 구멍을 파놓았는데도 여기에 바다 전부를 담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은 할 수 있겠어요?” 어거스틴은 그 아이의 질문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주신 말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힘을 얻어 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고, 우리는 매우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썼습니다. 우리 역시 바닷가의 그 어린이처럼 저 너머에 있는 것과 거기 계신 분에 대하여 아주 조금밖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자 하면, 그 사람의 이름이나 외적인 모습. 직업 등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성장과정, 교우관계, 관심사 등을 찾아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보고 함께 오래 사귀면서 삶을 공유한 후에야 비로서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고결한 종들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경험한 책입니다.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은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체험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셔서 직접 우리와 함께 살아가신 것입니다. 실상 이 세상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려고 지으신 장소입니다. 우리와 영원한 대화를 나누시기 위해 조성하신 곳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과 죽음, 소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하나님이 주신 은혜 등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가운데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품고 땅속에 묻힙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난 주님 때문에 우리 마음과 몸 속에 그분의 은혜와 훈훈한 사랑이 늘 배어 있게 됩니다. 온도의 차이를 우리 손이 쉽게 분별하듯이, 사람들은 그 차이를 금방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사람을 보는 순간 그 원인을 알고자 하며, 그 사람 역시 주님 앞으로 와 만남을 경험하고 또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