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8
KBS 라디오 “말 같은 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느 날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럼 좋은 문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명언에 그런 말이 많습니다. 명언은 오랜 세월을 거쳐 살아남은 말입니다. 내용도 좋지만 문장의 형식도 좋습니다. 어떤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수사가 어떻해야 하는지 형식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명언을 외우다 보면 문장의 형식을 학습하게 됩니다. 그러면 응용해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다더라’ 하면서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풍부해 집니다. 명언 주인공의 권위를 빌려 말의 신뢰를 높이고 듣는 사람에게 통찰을 일으킵니다. …… 한 때 명언이 들어 있는 일기장이 인기였습니다. 어지간히 유명한 명언은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아포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명언을 찾는 것 같습니다. 아포리즘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경험된 진리를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젊은 세대들이 이런 아포리즘을 찾는 걸까요? 간결함과 가성비를 추구하는 그들의 취향에 맞아서일까요? 아니면 어디에선가 위로받고 용기를 얻고 싶은데 주변 어른들의 말은 왠지 꼰대스러워서일까요? 뭐 이런 건 아닐런지요? 그러면 나만의 명언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까요? 어떤 사안에 대한 입장이나 의견 주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세요. 이것에 대한 내 의견은 무엇인가? 그때 이것은 우리 경제일 수도 있고, 코로나 사태일수도 있고, 화제의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바로 그것이 나의 명언입니다. 늘 생각하고, 메모하고, 말해보면서 내 안에 명언을 쌓아나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상이나, 책, 논문 등에는 반드시 제목이 따라다닙니다. 그 제목은 그 책이 쓰여진 목적이나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해주는 글입니다. 자신이 읽은 아티클이나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으면,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앙도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1754 페이지의 방대한 책의 주제와 결론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이며 모든 교리와 사상 그리고 신학은 물론 우리의 행동까지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한 마디, 한 문장입니다. 그 한 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이 짧은 문장을 풀어놓은 것이 바로 신구약 66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골2:6).  


2020/9/17
여섯 살의 아멜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기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도망치기로 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도와 드리려다가 꾸중만 들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아예 그런 사람들을 뽑은 것은 예수님 잘못 아닌가? 만약 성인이 어린 아멜리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그분은 성경이 증거하는 주된 메시지를 이해못한 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자기 뜻대로 어떤 것이든지 하실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선하시다. 그런데 왜 우주에 악이 들어와 있고 나에게 이런 불행과 어려움이 있는가? 하나님은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탄에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도록 허락하셨는가? 또한 모든 사람이 심판대상인데, 전부를 구원하지 않고 왜 당신이 선택하신 일부만 구원을 하시는가?. 더 중요한 것은 도대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왜 악마를 살아 있는 채로 잡아 지옥에 먼저 던져 넣지 아니하시는가? 그럴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이냐 아니면 선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냐? 등등의 많은 문제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은 더 좋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악이 허락된 이 세상을 먼저 창조하셨다”는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모든 신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당신의 정의로운 뜻을 실천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기준에서 벗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일단 여기까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는 어린 아멜리가 어른이 되어 세상을 보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엡3:10, 쉬운성경)


2020/9/16
“의미 요법”이라는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유명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크(1905-1997)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던 중 동생 윌터가 잡혀 가는 등 나치의 압박이 심해오자,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대하여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부친이 파괴된 회당에 갔다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 하나를 가지고 오셨는데 그 돌에는 히브리어 한 단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부친의 말씀이 “십계명 중 이 단어로 시작되는 것은 제 5계명밖에는 없기 때문에 이 돌 조각은 5계명에서 나온 것임에 분명하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는 이를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치의 통치 하에 의사로서 일하던 중 빅터는 틸리 그로서와 결혼하였습니다(1941년). 그러나 1942년 빅터와 그의 아내와 부모는 테레지엔 슈타트 캠프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이듬해 아버지는 병으로, 어머니는 가스실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944년 빅터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옮겨졌으며, 그는 다시 아내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아내가 자유를 얻어 수용소에서 함께 몰려 나오던 중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미리 피신한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나찌의 수용소에서 모든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 절실한 실존주의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가지는 사람은 기품있게 살아가며 생존확률도 높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질서한 삶을 살면서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정신분석학사에 길이 남을 로고테라피 즉 ‘의미요법’을 창시하게 됩니다. 그것은 종교든, 지식이든, 가족이든, 철학이든, 명예이든 무엇이든지 좋으니 삶의 의미를 가지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존주의적 삶의 방식으로, 그분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런 식으로 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부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때 어떤 모습이어야만 할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계명을 굳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요, 목적이고, 참된 진리이며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2020/9/15
빅토 프랭크 의사는 전쟁이 끝난 뒤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의 딸이 여섯 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아빠, 왜 우린 늘 ‘좋으신’ 주님이란 말을 쓰지요? “ “네가 며칠 전에 홍역에 걸렸지. 그때 좋으신 주님께서 너를 낫게 해주셨잖니?” 그의 딸이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아빠의 대답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빠, 먼저 내게 홍역을 보내신 것도 그분이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불과 6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대답을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는 의례적인 종교적 대답이나 하나님에 대한 값싼 선전으로 아이들을 쉽게 속여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지성을 갖추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현 세상에서 상당한 기간을 살아본 청년이나 어른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력의 법칙과 같은 자연법칙들이 언제나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삶에 발생하는 사건들의 인관관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반론을 매우 경계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는 일본에서 선교할 때 A 라는 주재원이 교회의 일에 훼방을 많이 놓았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그분 나중에 보니 망하였더라…는 등의 연결은 매우 위험한 등식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어떤 누구도 그런 사건이 그런 병이 혹은 그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를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남을 아래로 보고, 손이 잔인하며, 머리가 능수능란한 사람이 세상에서 재물도 많이 모으고, 권력도 가지며, 명예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파멸에 두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잘못 가는데 형통하는 경우 회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재단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말하기를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8:14) 하였습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하고, 또 냉철한 지혜가 요구됩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경주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6-17).


2020/9/14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알렉스는 아이들에게 모래를 던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벌로 매일 교장실로 가서 교장 선생님을 만나 훈계를 들어야만 하였습니다. 알렉스는 아빠에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테니 자기를 위해 교장 선생님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알렉스 아빠는 이 일을 계기로 그에게 귀중한 교훈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네가 죄를 지으면, 너는 낚시에 꿰이게 되는 것이야!” 그 말에 어린 알렉스는 재빨리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하면 낚시를 벗어날 수 있지요.” 매우 똑똑한 아이입니다. 사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이보다 더 가볍게 벌을 면하였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회개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몇 마디 말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는 다음의 실화를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님의 어린 시절 그 동네에 두 사람의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A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자 학교 선생님이었고, B는 믿지 않는 사람이며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등감을 친구에 대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B가 술에 취하여 사람들과 언쟁을 하는 것을 보자 A가 말렸습니다. B는 장난삼아 ‘너 맞아 볼래’ 하면서 A를 향해 휘두르다가 의도하지 않게 뒤통수를 갈기게 되었습니다. A는 뇌진탕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B는 뼈저리게 후회와 참회를 하였고, 사정이 참작되어 과실치사로 3년의 징역형을 산 뒤 출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 특히 친구를 죽였다는 자책감에서 놓여나지를 못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아내에게 좀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뒤 소식이 없기에 찾아보니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후였습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고통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언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런 은혜를 가진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