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5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선생님에게 질문을 받았다.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받고 싶니?’ 죽은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면 아이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빠가 저 사진틀에서 나와서 우리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합니다. ‘본능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저절로 생기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랑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됩니다. 헬라 원문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서두에 나옴으로써,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본지는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당신의 제자들 사이에 당신으로 인하여 부자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만 법적인 의미로만 이해된다면, 우리 마음에 별 다른 감정이 생기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하여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성령님을 통하여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아이가 ‘아빠가 저 사진틀에서 나와서 우리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과 함께 살고싶은 마음 그것이 우리가 중생하였다는 좋은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 양자의 영(성령님)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우리 마음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첫 마디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이 되고, 이것이 영생의 본질적인 측면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시며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9-31).
2020/9/24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거니? 아픈 거니?” 다른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굉장히 아픈 거야, 할머니는 진짜 어른인데, 할머니 얼굴에 있는 주름살 좀 봐. 그러나 진짜가 아닌 사람들만이 그걸 보기 흉하다고 생각해. 나는 할머니를 사랑해.”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입니다. 실상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잠17:6)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노인이 되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것은 물론, 머리털조차 백발로 변하게 됩니다. 이 백발에 대하여 성경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16:31)고 하여 인생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백발 머리가 영광의 면류관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천하의 명장이고 단 한 번의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았던, 다윗의 조카인 요압은 사사로이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로서 사울의 사후 다윗에게 항복하기 위해 왔으나, 전쟁 중 동생 아사헬을 죽였던 것에 복수심을 품고 암살하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아마샤로서 요압대신 군대장관을 삼고자 한다고 다윗이 공포하니 그대로 죽여버렸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건립에 공이 많은 요압의 죄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솔로몬에게 그를 처형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왕상2:6). 요압은 솔로몬이 등극하자 마자 처형당하였습니다. 이런 요압과 대조적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의 백발은 ‘공의로운 길’에서 얻어졌습니다. 요셉은 110세에 죽었고, 당시 최강대국 애굽을 80년 동안 통치하면서 많은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구속사적으로는 아버지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430년 동안 정착하고 민족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공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서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결국 감옥에 수 년 동안 갇혀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죄수의 신분에서 총리의 신분으로 뛰어 오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이미 요셉은 제국을 통치할 기술과 지혜는 물론 인성까지 연마한 뒤였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한 줄기 빛은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장래 자신이 할 더 큰 일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의로운 백발 역시 젊을 때부터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손자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 새번역).
2020/9/23
한 여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무엇이 들어 있지?” 한 여학생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집 성경에는 굉장히 많은 날짜와 결혼과 죽음과 신문기사 오린 것과 생일 카드와 크리스마스 카드가 들어 있어요. 그게 아마 다일 거에요.” 성경에서 그런 것밖엔 찾을 수 없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영적으로 큰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은혜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줄이 처져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서 맺은 성령님의 열매의 간증으로 가득차 있는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부딪치매 그 집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며, 때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내하면 삼심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같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그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운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춤 하나, 게임 하나 마스터 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수 천번이나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시도를 하여야만 합니다. 아이들은 이것이 재미있어, 야단을 맞고 돈이 들어도 계속하여 마침내 상당한 게임의 경지에 이릅니다. 선한 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의 것은 거기에 따르는 보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가치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 줍니다.”(딤전4:7-8, 현대인의 성경).
2020/9/22
다섯 살짜리 소년이 저녁마다 자기 전에 하는 기도를 암송했습니다. “나 이제 잠자리에 듭니다. 주님 내 영혼을 지켜 주세요. 만일 내가 죽으면…..” 여기서 그 소년은 멈추고 물었습니다. “아빠, 죽음은 어떻게 생겼어요?” “캄캄한 거란다.” 그 소년의 아버지가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것 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껴 울며 어둠 속에서 잠이 깬 상태로 누워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주일학교에 보내는 분이었습니다. 아이는 자기 어머니가 죽음에 대해 굉장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이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굉장히 흥분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엄마! 엄마는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무덤을 통과하시면서 뒤에다 빛을 남겨두고 가셨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죽음의 권세에 일시적으로 굴복하셔서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다시는 죽지 아니할 몸을 입고 영원히 살아나심으로 우리들이 살아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면, 마지막 날에 우리 역시 그분과 같은 경험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첫 번째 종의 노래에서 여호와의 종이 행하실 사역을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6-7). 이는 여호와의 종을 통해 죄와 사망 가운데 갇혀 영원한 흑암에 거할 우리들을 풀어주실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데 ‘사망’이란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이 깊은 잠에 대해 붙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죽어도 영원한 몸으로 부활할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그 부활의 날을 고대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분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8:11).
2020/9/21
방금 아침 기도를 마친 아이에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무엇에 대해 기도했니?” “하나님께 쉬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이제 내가 깼으니까 하나님은 편안히 주무시라고요.” 사랑은 서로 주고 받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역시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당신의 뜻을 준행하겠습니다.”는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약 3,200년 전에 한나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인 어린 사무엘이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양육될 때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이자 사사는 엘리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막 안에서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은 네 번이나 거듭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까지는 엘리의 음성인 줄 알고 엘리에게 나아갔었습니다. 이에 주님의 부르심인 줄 깨달은 제사장 엘리는 사무엘에게 어떻게 행할 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서서 네 번째 부르시자 비로서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어린 사무엘에게 엘리 가문의 죄악과 그에 따른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무엘의 소명 사건입니다. 이후 하나님은 사무엘을 사사와 선지자로 세우셔서 왕정이 시작될 때까지 이스라엘을 맡아 충성을 다하여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왕 사울과 그 다음의 왕 다윗을 세울 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울의 견제 때문에 은퇴하여 후학을 양육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누구나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소명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섬기라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섬길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길 기회들을 발견하였을 때는, “이 일에 제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주님은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충성스럽게 맡은 일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수고의 대가는 주님께서 섭리를 통하여 주시고 그 마지막은 칭찬과 함께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맡은 사람에게 더없이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고전4:2, 쉬운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