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8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순종의 미덕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단 위에서 이러저리 걷고 있는 그 선생님이 풍기는 분위기는 자신을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 그는 큰 소리로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다음, 잠시 뜸을 들이면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아이들을 노려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줄 알고 있습니까?” 그는 누군가가 “선생님이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들의 감정을 꾸밀 줄 모르는데,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러합니다. 다만 벌이 무서워서 거짓말 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모두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점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인간들의 장기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죄된 경향성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점을 보고 그대로 쏟아냈다가는 인간관계는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그런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결점을 보고 “입을 다물 때가 있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전3:7). 이런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덕에 소용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입을 다물고 주님께 이 문제를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언제나 솔직하게 표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때는 열일을 제쳐두고 반드시 주님 앞에 이 문제를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되고, 인간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인격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2-14).
2020/10/7
어떤 소년이 어머니에게 배가 아프다고 말하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어쩌면 네 위가 비었기 때문일 수도 있단다. 네게 먹을 걸 만들어 주마.” 얼마 후 목사님이 그 집에 심방을 오셨다가 우연히 머리가 아프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목사님, 아마 목사님의 머리가 비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머리에 무얼 좀 먹이십시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린이들도 자기들이 배운 것을 다른 상황에 적용할 줄 압니다. 다만, 아직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서 지혜가 부족하고, 따라서 그 적용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잘못 이해하거나, 적용을 잘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라고 부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말 ‘어리석다’의 어원은 ‘어리다’입니다. 국문학자 홍윤표 박사의 글입니다.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란 뜻을 가진 ‘어리석다’란 단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어리다’가 ‘어리석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홇배 이셔도’의 ‘어린 百姓’은 ‘나이 어린 백성’이 아니고 ‘어리석은 백성’이란 뜻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뜻을 가졌던 ‘어리다’는 오늘날 ‘어리석다(愚)’의 뜻은 사라지고 ‘나이가 적다(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어리다’는 원래의 ‘슬기롭지 못하다’는 뜻을 ‘어리석다’에 넘겨주고 자신은 ‘나이가 적다’는 뜻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일에 어리석은 사람, 즉 경험이 적고, 판단력이 미성숙한 사람을 배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 우리가 어리석어야만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죄악은 경험이 적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어른이고 어린이건 가릴 것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도 경험할수록 커가는데, 처음에는 하나의 죄된 행동이지만, 다음으로는 습관(죄인)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아주 인격화(오만방자한 성격)됩니다. 그래서 시편의 첫 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를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성경구절이 우리 삶에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4:20, 새번역).
2020/10/6
영국의 어느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갇혀 있게 되었을 때, 누구하고 같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소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엘리베이터 전문가요.” 정답입니다.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죄와 사망의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어둠 속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에 타고 이생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문제들만 해도 이미 너무 복잡한데, 거기다가 지구 온난화 문제,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의 문제, 기상이변의 문제, 날로 증가하는 부도덕성, 범죄, 폭력 등이 난무하니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출구를 찾고 있으나 이 지구 상에는 없습니다. 그래 미국의 일론 머스크라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가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인류를 화성으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어김 없이 죄와 사망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 비극의 문제를 해결하실 전문가로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전자를 가지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후자를 가지고 우리의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가르침을 따르는 세상은 참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 너 자신의 존엄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라는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안 보이는 하나님은 말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보이는 이웃 사랑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낮추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인간은 자신을 낮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무능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실 전문가로서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 비로서 주님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낮출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맺혀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마18:2-4, 새번역).
2020/10/5
한 무신론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어린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를 나에게 보여 주면 네게 일 파운드를 주겠다.”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겐 오십 펜스짜리 하나밖에 없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을 보여 준다면 이 동전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어린이는 매우 현명한 아이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대중을 향하여 강연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나님을 향해 쏟아 내었습니다. 한 동안 하나님을 모욕하더니니 그치고는 청중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도 하나님이 조용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욕을 한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때 청중 가운데 한 노신사가 일어나더니 강단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하는 그 철학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 강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철학자의 일생에 아무런 징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버림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에 대하여 징벌을 받아도 그 때문에 회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정말 행운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마지막 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우리 모두가 선다는 생각은 이처럼 세상에서의 행복과 불행의 개념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여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세상의 주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반역자들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공의로운 하나님이 그를 벌하시는 것 이외에 어떤 일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 모든 죄악의 결과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