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6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 하던 목사님이 ‘도덕적 용기’의 실례로, “기숙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소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년들에게 또 다른 실례를 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년이 큰 소리로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들로 가득찬 기숙사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인류 역사상 그런 용기를 가진 고위 성직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군부정권이 수 십년 동안 지배하는 동안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압력에 저항한 고위 성직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잘 입증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다윗, 욥, 예레미야 같은 분들은 우리에겐 너무하다고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할 용기를 가졌습니다. 우리들 역시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분들과 같은 생각들로 가득찼지만, 그런 생각들을 억눌러 왔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우리 속에 깊숙이 박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큰 소리로 질문한 소년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분과 논쟁을 벌일 용기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질문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때에도 틀림없이 우리를 용납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대표적인 선지자는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불의한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수탈당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 그런 갈등을 토로하였더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때가 반드시 오니 비록 지체될 지라도 기다려라는 대답을 하시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정답을 주셨습니다. 이에 응하여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시를 지어 불렀습니다.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시1:6, 새번역).
2020/10/15
범브란트 목사님이 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못 가진 것들 여러 가지가 생각이 나서 좀 우울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윽고 아이들이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네 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러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머리카락과 얼굴과 눈썹과 입술과 이와 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는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자기 몸의 모든 부분을 다 언급하며 길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와 우리집에 오신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말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목사님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자신도 그 아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은 그 아이의 것들보다 더 큰 크기의 것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집에 온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그 네 살도 안된 아이의 기도는 즉각 응답이 된 셈입니다. 이 깨달음이 오자 목사님은 그 아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다른 면들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목사님은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가을을 맞이하여 우리 역시 한 해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하나님은 성공 뿐만 아니라 실패 역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인생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겸허하게 갖고, 모든 일에 지혜롭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허락하신 모든 축복들에 대하여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삶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는 세탁기를 잘 사용하기 위해 이리저리 공부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세탁기는 먼저 만드신 주인을 알아야 하고, 인생의 작동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9-21).
2020/10/14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매일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때 한 소년이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전화번호가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화번호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으로 가는 다섯 개의 단계를 적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함(롬3:23). 둘째, 죄의 결과에 대한 명백한 인식 – 죄의 삯은 사망(롬6:23 전반).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준비하셨음을 깨달음(롬6:23후반). 넷째,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함(롬10:9). 다섯째, 구원의 결과로서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리게 됨(롬5:1). 이와 관련하여 범브란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야, 하나님의 전화번호는 다섯자리 숫자란다 – 회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믿음, 사랑, 진실, 그리고 외로움.’” 다른 전화번호는 다 이해하겠는데, ‘외로움’이라는 마지막 번호는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서로 서로를 적대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고독합니다. 그 외로움 고독 두려움 불안 눌림 등 모든 것이 죄의 결과이고 그 모든 죄의 결과를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전부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수 많은 가족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모든 외로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갈 곳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오늘 하루도 힘있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2020/10/13
아침 기도에서 어린 도로시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좋은 아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개도 이런 아침을 좋아할 거예요.” 도리시는 비록 어리지만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공중의 새들과 들판의 짐승들도 먹이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들의 필요 역시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선한 사람들 뿐 아니라 악인들 위에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의 마음 보다 넓을 수 있으며, 넓어야만 합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 나이가 70즈음에 이르렀을 때 고향 친구가 찾아오자 밖으로 나가서 발로 차서 쫓아버린 일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치에 등용되지는 못하였지만, 지식이 많고, 제자가 3천에 이르며, 그 중 뛰어난 제자들은 각국에 등용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분은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의 중심 사상인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기 쉽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무시하는 마음도 들어 있어,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온 친구를 별볼일 없다고 발로 차서 보냈다는 것은 유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유학은 삼라만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할 개념이 없습니다. 물론 성리학은 나름대로 이기론을 내세워 삼라만상과 자신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그것조차 비인격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을 주인으로 모셔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시사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존재보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당연히 신자들은 청지기로서 우리 자신의 위치는 물론, 삼라만상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와 믿음에 굳게 서서 사랑 가운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2020/10/12
신앙 때문에 나디아의 아버지는 구 소련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느날 소녀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와 같이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돌아보며 소녀가 사려깊은 말을 하였습니다. “엄마,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이 꽃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빠도 돌봐 주실 거예요.” 소녀는 몇 송이 꽃을 꺽어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빠에게 이 꽃을 갖다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다음날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전해질 식품 꾸러미를 맡기려고 소녀는 어머니를 따라 경찰서에 갔습니다. 나디아는 근무 중인 경찰관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저씨에게도 아이들이 있어요?” 그녀가 물었습니다. 경찰관은 소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어린 딸을 묘지에 묻고 왔습니다. 나디아는 자기가 꺾어온 꽃들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 이 꽃들을 우리 아빠에게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해주시겠죠, 아저씨?” 그 경찰관은 도저히 어린 소녀를 당해 낼 수 없었고, 그 꽃은 나디아의 아버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디아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나디아의 아버지가 옥에 나오는 근본적인 기도는 응답하지를 않으셨는가?” 제가 이후의 이야기를 알지를 못하여 조심스럽습니다만, 수 십년이 지나서 소련의 공산체제는 종식을 고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옥에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신앙을 꿋꿋하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는 자체가 은총의 산물입니다. 수용소 군도를 쓴 솔체니친이 서방 세계로 망명하였을 때 그 작가는 자유로운 서방세계의 젊은이들 속에서 정신적 공허와 물질만능주의라는 더 큰 절망을 목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바로 자유의 길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주님을 따라 가야만 합니다. 오직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