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4
신약성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고, 그 당시 헬라어는 구두점이나 쉽표 등의 문장 기호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어가 죽 나열되었으며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분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루마니아어를 포함하여 어떤 나라의 언어도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19:4)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루마니아 아이는 끊어 읽기를 잘못하여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그 아이를 방문하여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 아이는
“난 아파요. 하지만 거의 아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자기들의 고통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잘못된 이해가 이 아이의 믿음에 결정적인 해를 끼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과 동시에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오셔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당연히 그런 믿음에서 참됨과 사랑이 싹터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자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엡3:16-17).
2020/12/03
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1911-2004)의 부모님은 깊은 신앙을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그분의 조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가 되자 어린 로널드의 부모님은 주의를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아이들에게 식사 시간에 성경을 한 절씩 암송하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너도 꼭 하나를 외워야 한다.” 로널드는 불과 네 살이어서, 어머니는 쉬운 구절을 하나 찾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우셨다”(요11:35).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가 울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입니다. 이제 로널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위해 열 명의 아이들이 앉았습니다. 암송할 차례가 오자 첫번째 아이가 “예수께서 우셨다” 얼른 대답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두 명의 다른 아이들이 같은 구절을 암송하자 할아버지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이윽고 차례가 된 로널드는 “예수께서 우신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웃었고, 할아버지는 성경에 그런 구절이 없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로널드는 “그분은 지금 울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린이들이 그분이 오래 전에 우셨다는 것밖엔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변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로서는 아주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사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심히 범죄하자 하나님은 사람 지으신 것을 심히 슬퍼하셨습니다(창6:6-7). 결국 그들은 홍수로 전멸 당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 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우리의 불신앙, 죄악, 연약한 믿음, 완악함 등의 사유로 하나님은 근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2020/12/02
네 살된 어린아이가 미국 백화점에 갔다가 받은 비스킷에는 미국 지도 모양으로 생긴 것이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이걸 보니 무엇이 생각나니?”
“날씨요”
그 비스킷은 아이에게 저녁 뉴스 시간에 텔레비전에서 보는 미국의 모양을 생각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벨과 가인’ 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아벨은 하나님 앞에 형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질투를 받아 결국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의인이요 억울한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열납을 받지 못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열납을 받은 것을 보자 질투하여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의 질투를 받아 억울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죽으셨으며, 심지어 그 고통의 순간에도 자기를 죽이는 동족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아벨의 피는 땅속에서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 바 뿌린 피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각나게 되면 과연 지인들은 무슨 생각이 먼저 들겠습니까? 아니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무엇을 먼저 생각하시겠습니까? 한 번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2020/12/01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에서 목회를 할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양복이 딱 한 벌 있었습니다. 그것도 때가 되니 낡아 너덜거리게 되어, 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새 양복을 하나 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가정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눅3:11)
이 말씀은 AD28년 경 유대 광야에서 침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이 와서 회개하고 자복한 뒤, 묻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에 대하여 대답한 말 가운데 하나 입니다. 이 구절을 듣자 당시 네 살이던 미하이가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빠는 지금 양복이 두 벌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벌을 누더기 양복을 입고 있는 X 형제에게 주셔야 해요.”
“그분에게 어느 것을 주랴?”
“물론 새 것을 주셔야지요. 하나님은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주시니까요.”
그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의 말을 따랐습니다. 미하이가 네 살의 어린 나이에도 벌써 그런 해석과 적용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영성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범브란트 목사님에 결코 뒤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과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러 저러한 방법으로 늘 돌보아주셔서 헐벗지 않았다는 간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2020/11/30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있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어린 소녀가 어머니에게 햇빛이 통과해 들어오고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분들은 성인(聖人)들이시란다.”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소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난 이제 성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어요. 나는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나를 통해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게 하는 소녀가 된다는 뜻이예요”
이 어린 소녀의 영적 통찰력은 놀랍습니다. 특히 성인들 중 슬픈 전기나 그들의 생애에 있었던 어두운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그 아이가 내린 성인에 대한 정의가 진실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 정교나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는 대표적인 분이 사도 마태입니다. 이분은 당시 민족반역자이자 탐욕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세리의 직업을 가져서, 매우 경멸당하였던 어두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과감하게 과거를 버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린 슬픈 기록이 있기는 하나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그분의 증인으로 일생을 사도로서 헌신한 뒤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하셨다고 로마순교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다 이와 같이 어둡고 슬픈 과거가 있는 죄인들이었으나, 그리스도의 그 은혜의 빛을 통해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