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1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주일학교 헌금으로 일 파운드짜리 동전과 십 펜스짜리 동전을 주었습니다(참고로 1파운드는 100펜스로서 약 1,500원정도함).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려야 하지만, 또한 기쁜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면 그에 적당한 이자를 지급합니다. 삼성전자와 같은 회사의 회사채를 사면 금융기관보다는 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지만, 금융기관보다는 위험합니다. 또한 KB 금융 등의 주식에 투자하면 시가의 약 5% 배당을 받을 수 있으나, 주가의 등락 때문에 원금 보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투자는 어떻습니까? 엄청난 이익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 안전합니다. 물론 그 이익은 금전으로만 환산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 생활을 잘 하는 것 역시 성도의 본분 중 하나이기에, 이분들은 믿음의 큰 담력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2020/12/10
어린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가족을 그려보라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한 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네 사람의 머리가 비행기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성모 마리아, 요셉을 그렸구나. 그런데 이 네 번째 사람은 누구냐?”
“아, 그것은 비행사인 폰티어스예요(Pontius, the pilot)!” 그 어린 학생이 ‘폰티어스’라고 한 것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말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영어로 Pontius Pilate 라 표기하고 ‘폰티어스 파일러트’로 읽습니다. 이 발음은 비행기 조종사인 ‘pilot 파일러트’의 발음과 아주 유사하여 아이는 빌라도 총독을 비행기 조종사로 오인하고 그린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을 배운 한 아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젤리 빵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영어 번역이 ‘daily bread’이나 그것을 ‘jelly bread’로 듣고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고 해서 아이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그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마29:49).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법을 묻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되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되물으십니다. “네가 왜 나를 주님으로 부르고 따르느냐?” 우리는 이에 대하여 바른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7).
2020/12/09
일곱 살난 아멜리가 어느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와서 자기 개에게 세례를 주길 부탁하였습니다.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마지막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신 고 김준엽 총장(1920-2011)이 그분의 책 ‘장정’에서 쓴 글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부친은 사냥을 돕는 개를 두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매우 개를 사랑하셔서 개가 부친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자, 이를 안 개 역시 먹기를 거절하여 끝내 굶어 죽었습니다. 너무나 주인의 사랑이 그리운 것이지요. 한편 개의 충직성과 영물성을 체험한 김총장님은 일생 개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개가 부활할리는 없지만, 아멜리의 개는 부활을 하여도 주인인 아멜리가 없다면 부활한 것이 하나도 고맙지 않을 것입니다. 개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없는 나라에서 영원을 보낸다면 그것보다 의미 없고 지루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가 없다면 아무리 안락하고 휘황찬란하여도 살 곳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배움도 행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시84:10-11, 새번역).
2020/12/08
어느 날 손녀 아멜리가 비난조로 할아버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할아버진 창문들(windows)에게 절하지 않아요?”
“성경 어디에 그런 어리석은 소리가 적혀 있던?”
아멜리는 재빨리 “과부들(widows)을 공경하라”는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어로 창문과 과부는 전혀 다른 단어이지만, 영어는 매우 흡사한 철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부’는 ‘창문’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단지 ‘n’ 이 빠져 있을 뿐입니다. 아멜리는 과부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어휘와 경험 때문에 실수로 ‘n’이 빠져서 인쇄되었다고 좋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그 철자를 보충하여 과부를 창문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아멜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명령이 전혀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멜리가 성경이 하시는 말씀에 복종하려는 의도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해석하고 적용한 성경은 전혀 성경의 취지와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어른이면 다 알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는 교리는 물론 의식의 해석 적용에 관하여 많은 다툼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 교회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상관관계를 망각하고 안식일 규정을 해석적용하여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은 성령께서 후일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셨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지만, 지혜에는 어른과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반대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딤후2:25, 새번역)
2020/12/11
1.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2:1-3
위 3개의 절은 잠언 12장의 도입부분으로, 서로 대비되는 영원한 운명과 관련하여 도덕적, 신학적 교훈을 주고자 의도되었습니다. 1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의 성품, 2절은 도덕적 질서를 수호하시는 행위자로서의 주님, 3절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영원한 운명을 말합니다. 결국 2절의 주님(여호와)은 모든 삶과 심판의 주인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보전은 주님의 긍정을 받기 때문에, 악인의 소멸은 주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사무엘 상을 보면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행위가 악한 제사장들이었기에 아버지 엘리가 훈계하였지만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제사장 엘리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고는 그 증거로 두 아들이 하루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은 20년이 지난 뒤 집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블레셋과 치룬 아벡의 전투에서 두 아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솔로몬의 등극시 후손 아비아달이 제사장 직에서 파직을 당함으로 심판은 끝났습니다. 이와 같이 의인이 보전되고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주님을 제외하고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