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어떤 아이가 죄를 고백했을 때, 어머니가 아이를 이런 말로 안심시켰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너를 깨끗하게 씻어 주었단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엄마는 저번에 내가 죄를 지었을 때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땐 예수님의 피는 어디 있지요? 그땐 무얼 하고 있어요?” 이 어린 아이는 엄청난 주님의 피가 항상 탱크 속에 준비되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이 퍼 가지고 씻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피는 5리터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루에 짓는 죄만해도 상당한데, 어떻게 전 인류의 죄를 그분의 피로 다 씻으실 수 있을까요? 신약 특히 바울 서신에 나오는 ‘속량(贖良)하다’ 혹은 ‘구속(救贖)하다’ 는 말은 헬라어 ‘엑사고라조(시장에서 값을 치루고 노예를 사다)’ 또는 ‘루트로오마이(값을 치루고 노예를 구출하여 풀어주다)’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단어의 연원은 출애굽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안전히 구원받았을 때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15:13)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기서 ‘구속’은 히브리어 ‘갈’을 번역한 것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마치 노예살이로 고난을 당하는 친족을 구원하여 풀어준 ‘고엘’ 즉 ‘친족 구속자’에 비유된 것입니다. 고대의 헬라어 번역성경은 이를 ‘루트로오마이’라는 헬라어로 표현하였고,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적용하였습니다. 즉, 주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셨고, 왕이자 상속자로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피값을 하나님께 드리고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길의 소유권은 주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경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 천국의 소유자이신 주님께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굳게 맹세하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온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새언약(계약)’ 때문에 형벌을 받지 않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이를 피로 씻는다는 말로 표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하여질 책임이 있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AD63년 경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에베소 교인들이 준수할 신앙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화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집착하지 못하게 하시오. 그런 것은 무가치한 변론만 일으킬 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의 부탁은 성도들이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생활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활에서 떠나 쓸데없는 토론만 일삼고 있습니다”(딤전1:4-6, 현대인의 성경).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신화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는 유대인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창조나 출애굽 등과 관련된 전설 등을 언급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를 근거로 한 거짓된 가르침의 경우 교회 안에서 허무맹랑한 말싸움만 일으킬 뿐 믿음과 사랑을 촉진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에서 전설과 하나님의 계시를 근거로 한 믿음 간을, 그리고 논쟁과 서로에 대한 사랑 사이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진리를 분별할 두 개의 시금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우리들은 그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서,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와 일치하는가, 아니면 허망한 인간 상상력의 산물인가를 분별해야만 합니다. 둘째는 사랑의 테스트입니다. 믿음의 테스트를 통과한 그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의 일치를 촉진시키는가 아니면 분열시키는가를 분별해야만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빌1:29). 이 반면, ‘사랑’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교훈이 가져오는 열매를 보고 진위 여부를 판단하여야만 합니다. 궁극적인 기준은 그 가르침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촉진시키는 지의 여부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주는 가르침은 둘 중 어느 것도 촉진하지 못하고, 대신 인간의 상상력에 근거한 허무맹랑한 성경해석과 논쟁을 가져올 뿐입니다. 따라서 주일에 우리가 만나 서로 교제를 나눌 때에도 우리의 대화가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골고루 침과 같이 맛이 나도록 함으로, 교회가 생기가 돋고 서로를 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마7:18-20).

선생님이 한 반 학생들에게 말 구유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탄생을 그린 그림을 보여 주고, 이 거룩한 가족이 매우 가난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그렇담, 이 가족 그림을 그려준 화가에겐 어떻게 돈을 줬죠?” 이 예화는 우리의 믿음 생활과 재물 사이에 존재하는 예리하나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가난의 해결 이는 생존의 문제이며 지도자의 능력, 나가서 한 국가 체제의 정당성까지 흔드는 열쇠 중 하나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이 때문에 몰락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때는 많은 한국 신자들이 요한3서2절을 형통주의 신학으로 해석해낸 이른바 ‘삼박자 구원’을 신봉하였습니다. 가난하였던 우리 민족에게 이 메시지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서 예수 믿고 잘 살아 보자는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건전한 신학과 신앙을 다루는 신자들에게서는 물론 일반 사회의 지식계층으로부터 무당 신앙이라고 상당한 비판을 받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굴레는 벗어나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심을 믿는 믿음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6.25전쟁 세대와 베이부머의 세대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이 가지는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축복하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소득이 3만불을 넘는 시대에 일하게 된 밀레니엄 세대는 성경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여야만 합니다. 또한 같은 성경 구절이라고하여도 역시 다른 부분에 방점을 두고 해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바뀌어서 시대의 문화와 관심사가 전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시 이런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변하지 않는 구속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세상의 흐름을 앞서 나가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의 그 지혜를 만인들에게 보여주는 곳이어야만 합니다. 그 지혜는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선만 행하고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 지혜를 귀로만 들었지 결코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는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보았고, 또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7:18).

어떤 아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엄마의 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그 아이는 자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성년이 된 10명의 자녀들이 어머니와 함께 모였을 때, 그 자녀 중 한 명이 말하기를 “엄마, 왜 이렇게 많이 낳았어요?” 이 말을 들은 그 어머니는 자녀들을 죽 둘러보고는 “그러면 너희들 중 누구를 낳고 그만 두었어야 했겠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만든 곳이 아닙니다. 시간, 부모, 공간, 물, 공기, 자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모르는 인간은 그 존재의 본질이 불안입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여러 해 동안 책이나 연필이나 펜도 없고, 사람의 목소리나 속삭임 하나 들려오지 않은 독방에 갇혀 지냈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때마다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상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약 내가 교황이라며, 수상이라면, 유명한 작가라면, 교회의 목사라면, 백만장자라면, 거지라면 무엇을 할까? 심지어 죽은 경우까지 상상해 보았습니다(목사님은 2001년 소천하셨습니다). 이렇게 인생에서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는 일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유익합니다. 가난한 병사로 복무하다가 황제가 되었고, 다시 황제에서 죄수로 잡혀 일생을 마친 사람은 나폴레옹입니다. 록펠러, 카아네기, 정주영 등과 같이 회사의 일개 사환에서 재벌이 되신 분들은 많습니다. 그 반면 재벌의 자녀로 태어나서 세상적으로 아무런 부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조그만 반대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변할 수 없는 것은 마지막 날 전 인류가 무덤속에서 부활하여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재판하실 때 낯을 보아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만민을 심판하실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의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판결하여 보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임을 자인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뜨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51).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의 호기심은 한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다섯 살 때 고기가 어디서 왔을까에 대해 궁금한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린 어디서 고기를 구하지요?” “슈퍼마켓에서” “슈퍼마켓은 어디서 고기를 구하나요?” “소에게서.” 알렉스가 의심쩍게 생각하던 것이 확인되자, 그는 아주 우울해졌습니다. “그렇담, 우리가 소들의 살을 먹기 위해 소들을 죽인단 말이예요?” “그래” “왜요?” “우리에겐 영양분이 필요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소들에게 우리가 자기들을 죽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설명을 하나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나요?” 정통 유대교인들은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들의 특별한 ‘소잡이’를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역할은 짐승들을 잡는 동안에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의식을 거행하는 목적은 어떤 신비스러운 방법을 통해 이성을 갖지 못한 이 동물들에게 그들이 선택받은 백성의 몸 속으로 들어와 그들의 몸, 즉 하나님의 성전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소들을 위하는 이들의 조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이 알렉스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많이 들은 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원래는 가인이 착한 사람이고 아벨이 나쁜 사람이었어요. 아벨은 양을 죽였거든요. 양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죠. 그런데 가인은 양을 죽이지 않았어요. 양은 귀여운 살아 있는 동물이예요. 왜 하나님께선 양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여러분들은 이에 대하여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채식주의가 사람을 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가인은 양을 죽이지 않았지만 자기 동생을 죽였고, 히틀러도 엄격한 채식주의자였습니다. 소나 양을 포함한 짐승들은 모두 인간의 생존과 지혜를 위해 주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복된 것입니다. 만일 만물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창조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뜻 대신 사람의 전통과 가르침을 준수하게 되어 그릇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