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른 실패자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반역자요, 결국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에 놓인 원수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러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인, 즉 고결하긴 하지만 동정심이 없어 매력을 주지 못하는 사람과 선인 (good man), 즉 따듯한 마음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라도 그를 대신해 죽는 자는 거의 없는데, 원수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원수요 죄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나 존경받는 선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매력은 물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 나올 9-11절에 나타난 논증의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9-11절은 한층 더 진전된 논증이며, 가벼운 주제에서 보다 중요한 주제로 나아가는 논증으로, 이런 방법은 옛 진리를 기초로 해서 새로운 진리를 이끌어내는 고전적인 논증 방법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의 구원의 두 단계, 즉 칭의(현재 의롭다고 선언하심)와 영화(마지막 심판날에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를 대조시키고 칭의가 어떻게 영화를 보증하는지를 보여주며, 그 결과 지금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이 해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9-11).
이제 우리는 로마서 5장 9-11절에서 바울이 칭의(稱義 – 하나님의 법정에서 현재 의롭다고 선언하심)와 영화(榮華 마지막 심판날에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를 어떤 식으로 대조시키고 있는지 조금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바울은 칭의와 영화가 무엇인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5:9). 9절은 현재의 칭의와 장차 심판 날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대조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마지막 날 있을 심판 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게 됩니다. 바울은 첫 번째 대조에서 이 질문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바울은 칭의와 영화가 어떻게 성취되는 가를 대조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대조는 구원의 두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 채택된 수단, 즉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그의 살으심입니다. 여기서 ‘살으심’이란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은 이 세상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하늘에서 완성할 것입니다. 이 진리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은 로마서8:34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한 것을 그의 부활로 완성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세 번째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과 영화롭게 된 자들을 대조시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 10). 10절에서의 논리는 만일 하나님이 원수들과 화해하셨다면, 그분이 그의 친구들을 구원하실 것은 더욱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10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완전하고 궁극적인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논증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에는 우리는 구원의 과정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보존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는 단순히 낭만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생각이 아니라, 확고한 논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논리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음에 내어주셔서 우리와 화해하셨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친구가 된 우리를 그의 아들의 살으심에 근거해 그의 진노하심으로부터 더욱 구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그분의 아들의 죽으심 같은) 비싼 대가를 치르셨다면, 전에 원수였다가 지금은 친구가 된 자들을 위해 그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한 바울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문제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복음은 단순히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회고하고, 영화롭게 될 것을 바라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구원의 삶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그분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 11).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1절). 이러한 은혜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2절).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도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9절). 우리가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도 그리스도의 살으심 때문입니다(10절). 우리가 화목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11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곧 우리를 위해 측량할 수 없는 귀한 복들을 성취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전반부의 두 단락(1-5절과 6-11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상이 칭의에서 영화로, 곧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것으로부터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금도 완성해 가고 계신 것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1-2절(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과 9절(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에서 분명해집니다. 나아가 1-5절과 6-11절, 두 단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진술하면서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당신의 아들을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것들 이외에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두려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1-3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넘쳐흐르고 있으며(5절), 우리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선언합니다(8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될 것이며, 궁극적인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독단적이거나 거만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곧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실 그분의 사랑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상의 두 단락(1-5, 6-11)은, 그 사랑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가지 근거, 즉 객관적인 근거와 주관적인 근거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객관적인 근거는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 아들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이를 새영어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입니다.” 주관적인 근거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체험을 통해 그 사랑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체험, 이것은 우리 안에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신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울 때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알게 됩니다. 1955년 6월 5일 쉐퍼 박사 부부는 유럽의 지성인들을 돕고 복음을 전파하고자 스위스 산속에 ‘라브리’ 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지식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기 위해 라브리의 운영과 관련하여 물질이나 일꾼이나 어떤 누구의 도움도 요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느 날 밤 부인으로부터 빵이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늘 기도 응답해 주시고 돌보아 주셨음을 체험하였기에 쉐퍼 목사님 부부는 걱정하지 않고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새벽이 되었을 때 저 산 밑에서부터 여러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참 지나서 몇 명의 젊은이들이 배낭과 양 손에 먹을 것을 잔뜩 지고 ‘라브리’로 들어섰습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온 청년들이었고 여기에 오도록 몇 달 전부터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져온 빵으로 조반을 준비하여 식탁에 앉았을 때 그 시간은 정확히 평소에 목사님이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쉐퍼 목사님은 너무나도 감격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