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6:15). 이 구절은 정확히 1절의 질문(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가 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반박하기 위해 도입한 수사적인 방법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서 6장은 전반부(1-14)와 후반부(15-23)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믿음과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우리 자신을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우리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종이 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23). 이를 1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구절에는 두 종류의 종이 대조되는데, 사도는 계속하여 그 두 종의 발단(17-18절), 전개(19절) 그리고 결말(20-22절)을 보여줌으로써,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며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는 띠위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를 남용하려고 한다면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하에 들어가게 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사도는 로마서 6장에서 성화(거룩하게 되는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기 보다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가 반도덕주의를 조장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고자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though you used to be slaves to sin (NIV)’에서의 동사 시제는 과거미완료형으로서, 이는 우리가 원래 어떠한 자들이었는지, 곧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여기서의 시제는 부정과거형으로 이전에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들이 믿어 순종한 모습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바울의 말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잘 보여 줍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우리의 종 된 상태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에 순종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의 종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야만 하신 것입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기계가 만드는 가상의 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다가, 비로서 모피어스로부터 설명을 듣고 여러 현상을 체험하자 비로서 알게됩니다. 우리는 도저히 인간들 사이에 발생되는 죄의 문제와, 여러 불행한 질병, 사망 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가 죄와 사망의 환경에 태어났으며, 거기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마귀의 가르침을 받아 탐욕부리며 죄짓고 살다가 결국 사망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구원을 부르짖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19).

이것은 죄의 종이 된 결과가 도덕적인 타락이라는 무서운 삶으로 나타나는데 반하여, 하나님의 종됨은 도덕적인 거룩함의 삶으로 전개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각의 종 된 상태는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으로, 결코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어떤 것의 종이 되어 점점 더 나아지든가, 다른 것의 종이 되어 끊임없이 나빠지든가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상태에 서 있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6개월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마지막 장막절 축제(양력으로 10월경)에 참석하셔서 행하신 설교에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요8:29-50). 명절 중간 즈음 되어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니, 수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둘러싸고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과 그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요8:30).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에 머물러야 참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서 자유함을 얻을 것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성전과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을 가진 이 유대인들은 반발하여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어느 누구의 종된 적이 없다고 대답하고는, 주님이야말로 오히려 문제투성이의 사람이라고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로 방금 믿고 예배에 열심인 이들이 마귀의 자식들임을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열심하지 않고, 그들의 아버지인 마귀의 욕심을 행하는데 열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귀의 자식들로 판명된 그들은 주님을 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살인자들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은 유대인들이 알고보면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기준은 누구의 뜻을 행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면 마귀의 욕심이냐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0-22). 사도 바울은 두 종됨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사람의 결말은 사망이요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반문하기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됨의 결말에 대하여는 그 마지막이 영생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이것을 요약합니다. 여기에는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삶, 즉 옛 자아의 삶과 새로운 자아의 삶이 언급되는데, 그 둘은 서로 완벽히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전자를 사망에 이르는 넓은 길이라 부르셨고, 후자를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둘을 두 가지의 종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의 종이었지만, 은혜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종은 도덕적인 멸망과 사망 외에는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거룩함과 영생이라는 값진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듯 본 단락의 논증은 우리가 회심, 즉 복음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 이르렀고 이제 그런 신분에 합당하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에 이른다는 사실을 말하여주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왜냐하면 죄의 삯들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그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사역). 이 구절은 로마서 5장과 6장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계속 죄 가운데 거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각 단락(1-15절, 16-23절)을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바울의 은혜에 의한 칭의교리를 비난하던 자들이 제시한 질문일 뿐 아니라, 죄 가운데로 우리를 몰아넣으려는 복음의 원수인 사단이 지금도 속삭이는 휴혹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 속에 “왜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느냐? 이제는 네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단다. 그러므로 마음껏 죄를 지어라”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교활한 사단의 질문이 제기될 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라고 선언하고는 이렇게 선언하는 분명한 논리적인 근거가 있음을 되새겨야만 합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나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나는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고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죄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논리의 핵심은 우리가 침례와 믿음을 통하여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리고 우리 삶에 죄의 유혹이 올 때마다 우리는 “그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로마서 6장의 메시지를 선포하여야만 합니다.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어느 여집사님의 간증입니다. 불신자였던 당시 자신이 대학에 입학하고 어머니와 함께 점을 치러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점술가가 자신을 보더니 영부인이 될 관상이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기뻐서 복채를 듬뿍 주었다고 합니다. 그후 이 학생은 굉장한 자부심이 생겨 심지어 미팅 주선이 들어와도 내가 나중에 영부인이 될 사람인데 라고 생각하며 미팅조차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이런 자부심이 있는지 늘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