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모든 욕심과 함께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앞의 죽음은 법적인 죽음 즉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을 말하고, 이 반면 후자의 죽음은 죄의 권세에 대한 죽음으로 비윤리적인 삶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과거에 속한 것으로 일회적이며 유일한 사건으로 결코 반복될 수 없으며, 후자는 현재에 속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회심할 때).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하여는 날마다 죽어야만 합니다. 로마서 6장은 이 두 죽음 가운데 첫 번째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의 이전의 자아(옛 사람)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어떻게 죄 된 자아를 무력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7절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NIV).” 개역개정이 좀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번역들은 헬라어 단어 “데디카이오타이 δεδικαίωται”에 없는 “자유롭게 되었다” 의미를 삽입하여 번역하고 있으나, 그 단어 는 ‘의롭다 하심을 얻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진 사람이 사회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필립 얀시라는 저명한 기독교 작가는 신자인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레스토랑에서 만나 그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현재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자신이 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아내와 이혼하고 그 여자와 살려는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립 얀시를 만나서 상담을 하는 이유도, 이혼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자신이 이혼을 하고 새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용서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이혼을 하고 새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마태복음 19장 1-9에 따라 간음한 것이다. 그러나 간음한 여인도 용서하신 주님이 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시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머지고 십자가 위에 가서 속죄하시지 않았는가?” 였습니다. 그 친구는 결국 이혼의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런 쓸데 없는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구절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우리를 합리화하는 태도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어떠한 신분에 속한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 귀에 “죄를 지어라. 그래도 하나님은 너를 용서해주실 것이다”라고 속삭일 때, 또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죄에 머물러 있으라는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사단에게 2절의 말씀으로 응수해야만 합니다. “사단아,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다. 나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 죄에 대해 죽은 내가 어떻게 그 안에서 다시 살 수 있겠느냐! 상권의 삶은 끝났다. 나는 지금 하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바꿔 말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런 삶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놀라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과 그 가운데 산다는 것은 논리적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독수리를 기르는 취미를 가진 분이 있습니다. 거위틈에 자라나는 독수리 새끼가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 산 위로옮겨 바위 위에 놓았더니 그 독수리는 창공을 응시하더니 날개를 펴고 비상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독수리는 비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거룩한 삶의 비결은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아는 것(6절)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침례가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일어난 침례임을 아는 것이며(3절),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임을 깨닫고 그렇게 여기는 데(11절)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들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필수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때까지 이 진리들을 회상하고, 숙고하고, 꼭 붙들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어른이 어린아이 시절로, 결혼한 사람이 독신 시절로, 석방된 죄수가 수감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나지 않은 생활로 돌아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실로 우리의 지위와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침례가 우리를 옛 생활로부터 철저하게 단절시키고, 분리시켜 새로운 삶에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삶 중간에 우리가 받은 침례가 있습니다. 마치 두 방 사이에 하나의 문이 있어 한 방문을 닫고, 다른 한 방문을 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으며, 또한 다시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미 죽은 그 안에서 다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자기의 믿음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 살피고 따져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계십니까? 만일 깨닫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낙제한 것입니다.”(고후13:5 공동번역).
로마서6장12-14은 부정적인 명령과 긍정적인 명령이 서로 대조되면서 강력히 거룩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부정적인 명령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12-13a). 이 말씀은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죄가 불의한 목적을 촉진하는 데 너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라. 죄가 너희의 왕, 곧 주가 되어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다음은 긍정적인 명령입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13b).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너를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너 자신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 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매우 명백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하게 하셨고 우리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심으로 우리에 대한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전혀 새로운 신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어긴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은 세상과 육신과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율법의 본지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있게 성취할 수 있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꿈꾸셨던 인간상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