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로마서 제7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에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특권은 율법(모세율법을 의미- 다수학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의로 구원의 방법으로서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말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경우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규범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이를 지키도록 허용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도 제사법은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제사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민법적 규정의 모세 율법 역시 로마의 지배하에서 로마법에 충돌된다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만 십계명(안식일 규정 제외)으로 대변되는 도덕법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히 적용되나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소위 세 번째 기능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다 포함하여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사에 있어서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만이 받은 여러 가지 특권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합니다(롬9:4). 그러므로 모세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모세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증오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되어 심히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14, 15절). 바울이 이러한 주장이 그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혁명적으로 들렸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율법(도덕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서 7장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6).
로마서 7장은 율법과 관련하여 다음 세 부류의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 율법폐기론자, 율법을 준수하려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먼저,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섬기는 자들로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가 율법의 순종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 즉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은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들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음으로 율법폐기론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율법의 요구에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얻은 자유를 방종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셋쩨로, 율법을 준행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율법주의자들과 율법폐기론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롬8:3). 율법이 연약하다는 것은 율법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 즉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거나 거룩함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에 복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율법에 복종하려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부패한 인류는 자기 사랑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준수하려는 신자들은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율법을 즐거워하며 성령님을 의지해 율법에 복종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두려워하여 율법에 속박되어 있고, 율법폐기론자들은 율법을 혐오하고 거부하려고 하지만, 율법을 준행하려는 신자들은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물론 구원의 방법으로서는 아닙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로마서 7장에서 8장4절까지는 율법주의자들, 율법폐기론자들, 그리고 율법을 준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직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각 자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먼저 율법주의자들에게, 사도는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1-6).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셔서 우리를 살리시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다음으로, 율법폐기론자들에게, 사도는 우리의 죄와 사망의 원인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과 우리의 죄악된 본성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 자체는 당연히 선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부당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속죄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율법을 준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 많은 갈등이 있지만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 하나 이겨갈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합니다(7:14-8:4). 사도는 이런 갈등을 ‘육’과 ‘영’ 사이에서의 투쟁(갈5장), 혹은 ‘마음’과 ‘육체’ 혹은’ 내 마음의 법’와 ‘지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 사이의 싸움 등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이 모든 것은 7장 25절로 요약되는데 거기에서 사도는 두 주인, 즉 두 법을 섬기는 종으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그대로 둔다면 우리는 연약한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성취하도록 하셨습니다(롬8:4). 성령님께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도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박되어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러한 속박에서 해방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비난하는 율법폐기론자들은 율법은 거룩하나 우리 자신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율법을 사랑하고 순종하고자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정당성을 이루기 위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하심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그러면 본격적으로 로마서 7장에 대한 존 스토트 목사님의 강해를 따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롬7:1). 이 구절에서 ‘주관하다’라는 헬라어 ‘키라유오 κυριεύω’는 마가복음 10:42에서 ‘주관하다’라고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법의 전제주의적 권위를 뜻합니다. 하지만 이 권위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사망은 그것을 무효화시킵니다. 사망은, 사람이 맺은 모든 계약상의 의무들을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법은 살아 있는 사람만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반적인 원리를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결합되어 있는 결혼에 비유해 율법을 설명하고, 그 원리를 적용시키고 확대해나갑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2-3절). 결혼한 여자가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다른 남자에게 가면, J.B 필립스의 표현대로 ‘간음을 행했다는 오명을 얻게’ 되지만, 남편이 죽으면 재혼을 한다 해도 음란한 여자라는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같은 재혼을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듯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바로 남편의 죽음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첫 번째 결혼 관계가 끝났기 때문에 두 번째 결혼은 도덕적으로 정당합니다. 죽음만이 이전 결혼법에서 여자를 해방시켜 주며, 재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줍니다. 1절의 원리와 2,3절에서 언급한 결혼과 같은 실제적인 예 다음에 그 원리의 적용을 다루는 4,5절이 뒤따릅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서 놓여났다는 요지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당한 요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절대적인 조건임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