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종된 것은 ‘영의 새로운 것’을 위한 것이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로마서 7장 6절에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제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라는 메시지를 기록한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메시지를 고린도 후서 3:6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 사이의 철저한 대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 공동번역). 옛 언약은 문자, 곧 우리 밖에 있는 돌판에 새긴 외적인 계약입니다. 새로운 계약 즉 새 언약은 복음, 곧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마음의 할례요,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방법이요, 현재 우리의 새로운 종의 신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율법은 우리를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들을 완전히 충족시키심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이 반면, 우리의 새로운 삶에서 우리는 여전히 종의 신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종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이시며, 우리 또한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지위에서 나오는 감사가 율법에 대한 복종의 원인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만, 복음은 “살아났으니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지금까지 로마서7장 1-6을 논의하여 왔습니다. 쉬운성경은 이 부분을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지금 율법을 아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이를테면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에 의해 남편에 매여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는 남편에게 매여 있던 법에서 해방됩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는 간음죄를 짓는 것이 되지만,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는 그 법에서 해방되므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내 형제 자매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 열매를 맺기 위해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 우리가 죄의 성품에 사로잡혀 살았을 때는, 율법이 우리 몸 속에서 죄를 지으려는 욕망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를 가둔 율법에 대해 죽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문자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롬7:1-6, 쉬운성경). 여기에 나타난 바울의 논증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전히 종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섬기는 방법도 문자나, 율법조문이 아니라 성령님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섬기되 그분이 보내셔서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섬기는 사랑(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5:13, 쉬운성경).
로마서 7장 7-13절은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지만 육신에 속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율법의 연약함). “전에 우리가 죄의 성품에 사로잡혀 살았을 때는, 율법이 우리 몸 속에서 죄를 지으려는 욕망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했었습니다.”(롬7:5, 쉬운성경). 이와 같이 5절은 우리의 죄와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율법에 돌리고 있습니다만, 7절부터는 율법에 대한 부당한 비판으로부터 율법을 변호합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당하게 드러내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죄된 성품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탐내지 말라”라고 규정한 율법(십계명)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이 계명을 어기고 다른 사람의 소유나 명예 등을 탐하는 우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7절과 13절에 의문문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7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13절). 이 질문들을 바꿔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나의 죄와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느냐?” 이 두 질문에 대한 사도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지만, 이 말은 율법이 죄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즉 우리가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 된 것은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죄와 율법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삼중의 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1) 율법은 죄를 폭로한다(7절 하). (2) 율법은 죄를 유발시킨다(8절 상). (3) 율법은 죄를 정죄한다(8절 하 – 9절). 이것이 율법의 3가지 무서운 결과입니다. 사도는 이런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은혜의 복음이 필요하였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 내일 이 3가지 결과를 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도 증언한 것입니다.”(롬3:20-21, 쉬운성경).
사도는 죄와 율법 사이에 다음과 같은 삼중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율법은 죄를 폭록한다.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마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롬7:7, 쉬운성경). 로마서 3:20도 이와 동일하게 말합니다. 둘째, 율법은 죄를 유발시킨다. – 앞서 5절에서 보았듯이 율법은 죄를 폭로할 뿐 아니라, 죄를 자극해 죄를 범하게 합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이용하여 기회를 엿보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일으켰습니다.”(8절 상). 여기 “기회를 엿보아,” 혹은 “기회를 타서”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군사 작전에서 전투를 벌이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행위를 말합니다. 율법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은 실제로 죄를 저지르도록 우리를 자극합니다. 율법이 이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실제로 경험합니다.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속도를 줄이라는 도로교통 표지판을 볼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표지판을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거나 오히려 더 내려고 합니다. 또 ‘출입엄금’이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표지를 보면 더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실로 율법의 명령과 금지가 우리로 하여금 그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도록 자극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탐심을 금하는 십계명에서 발견한 원리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죄를 유발시킵니다.
셋째, 율법은 죄를 정죄한다. – “율법이 없다면,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전에 내가 율법과 상관이 없었을 때, 나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가 살아났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계명이 사실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계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가 계명을 이용하여 기회를 엿보아 나를 속였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습니다.”(7:8–11) 이것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바울을 사망에 이르게 만든 역설을 표현합니다. 내일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롬3:23).
죄와 율법과의 삼중 관계 중 세 번째 대목(율법은 죄를 정죄한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율법이 없다면,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전에 내가 율법과 상관이 없었을 때, 나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가 살아났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계명이 사실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계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가 계명을 이용하여 기회를 엿보아 나를 속였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습니다”(롬7:8b-11). 여기서 사도는 율법에 무지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을 때에는 나는 살았지만, 율법의 의무를 져야 하는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율법의 심판 아래서) 죽었다”는 의미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 대목이 인간의 역사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결과를 묘사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 때 그 율법은 이스라엘을 살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폭로하고, 죄를 유발하고, 고취시키며, 정죄하도록 만든 역사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살리시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계명 한 가지를 주셨을 때 그만 탐심을 내서 과일을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죄인으로 발견된 것을 암시한다고 보고, 이런 것들을 전 인류에게 확대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레18:5 –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고, 행위의 근거로서의 율법이 그를 속이고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세 가지 무서운 결과입니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유발하며, 고취시키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가 죄를 짓도록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에 의해 자극받음으로 그 정체가 드러난 우리의 죄악 된 본성입니다. 율법 그 자체는 거룩하고 선합니다. 이렇게 죄와 율법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사도는 사망과 율법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롬7:12, 쉬운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