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절) 라고 사도는 탄식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한편으로는 생명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망을 초래할 수 있을까요?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망이 율법의 허물인 것일까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은 단호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죄악 된 우리의 본성은 나쁜 목적을 위해 선한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율법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되고 죄악 자체를 비난해야 합니다.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죄를 범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체포된 후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형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그가 자신의 범법행위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감옥에 가둔 법을 비난하고픈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정죄한 것은 법이지만 법을 어긴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유발시키며, 그것을 정죄할 뿐입니다. 우리의 죄와 사망에 대한 책임을 율법에 돌려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율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부패성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인해 율법 자체만으로는 우리를 구원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는 독립성, 즉 죄된 마음이 내주하고 있기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 7-8).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준엄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살지 않는다는 것과(롬7:1-6), 또한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유, 즉 율법의 연약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된 부패성인 육신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롬7:7-13). 이제 우리는 율법의 정당성을 고찰해볼 차례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진심으로 율법을 즐거워할 수 있으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율법의 정당성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7장14절에서 8장4절까지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4절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나’와 관련된 두 가지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동사 시제의 변화입니다. 7-13절에서 바울은 과거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경험을 서술했습니다. 예를 들어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절)이나, “죄가 나를 죽였는지라”(11절)과 같습니다. 이 구절들의 모든 동사들의 시제는 과거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14절부터 동사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바꾸어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경험에 대해 말합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14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 이 동사들의 시제가 모두 현재형입니다. 둘째, 상태의 변화입니다. 14절에서부터 바울의 상태가 갑자기 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지금도 결코 패하고 싶지 않은 죄와의 싸움을 고통스럽게 계속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와 관련된 두 가지 변화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바울 자신의 삶에 대해(7-13절),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겪는 자신의 도덕적인 갈등(14-15절)에 대한 묘사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거듭났지만 어린아이 같은 신자들만이 아니고, 바울과 같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전쟁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멈추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현재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로마서 7장14-8장4절의 단락은 율법의 정당성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정당한 요구에 맞닥뜨린 바울과 같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구원을 향해 울부짖는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라고 말하며, 24절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의에 빠져 있는 불신자들은 결코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혹은 ‘비참한 사람’(쉬운성경)이라고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또한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이처럼 구원을 갈망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에 대해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며, 소망을 두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만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육신 안에서 선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율법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인정하며, 생명을 다해 율법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즉 바울은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을 진실로 실천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불신자가 할 수 있는 그런 고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율법으로 나타나 있고 율법에 대한 불신자들의 태도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만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고 있지만, 자신의 육신은 원하지 않는다는 이 모순적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성령님을 따라서 사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지만 성령님을 통해 육적인 악한 행위를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8:13, 쉬운성경).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7:14). 여기 나타난 ‘신령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퓨뉴마티코스’ 로서 그것은 ‘영적인, spiritual’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상 ‘영적인’ 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적이다’라고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혹은 성품의 반영 등을 나타냅니다. 율법은 그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반면 바울은 ‘육신’에 속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육신’은 헬라어 ‘사르키노스’의 번역으로 ‘육체로 되어진’이 문자적인 뜻입니다. 물론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 그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그 육체를 통해 들어오는 여러 감각, 욕망, 생각 등에 대하여 우리의 자기 중심적인 욕구가 너무나 깊이 반영되어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행하지 못하게 되는 면을 강조하고자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비영적인, unspiritual’이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쉽습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고 있지만, 나의 행동은 도저히 그런 거룩한 뜻을 준행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죄 아래에 팔렸도다’는 ‘죄에 대한 노예로서 팔렸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노예라는 말이 원어에는 나오지 않지만, ‘팔렸다’ 라는 헬라어는 ‘피크라스코’로서 이 동사는 노예를 파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육신에 속한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존재임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라는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을 묵상해 보면 바울의 고민이 무엇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7장 14-25의 단락에서 왜 자신의 경험을 갈등과 패배로 묘사했던 것일까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왜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고 있다고 하였겠습니까? 답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불신자는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7-13절). 불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여전히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실체를 진술하였습니다(14-25절). 바울은 자기 자신이 율법은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율법을 즐거워하며, 지키려고 합니다. 불신자는 할 수 없는 그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육신, 곧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그의 타락한 본성- 자기 중심성, 이기적인 마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만한 마음 -은 회심하기 전에는 멸망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심한 후에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본성이 억제되지 못한다면 죄를 짓게 되고 결국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의 결론입니다. 성화의 첫 단계는, 회심 이후에도 우리의 육신은 절망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에 대한 정직하고 겸허한 깨달음입니다. 실제로 자기 자신에 대해 높은 견해를 갖고 있는 나머지,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바울처럼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못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것 말고 우리를 선으로 이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힘과 교활함에 결코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다음 주부터는 로마서 7:14-8:14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 들어가겠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성품 때문에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우리의 죄값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롬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