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로마서7장 14-8:4은 율법은 정당하고 의로우나 타락한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신자 자신의 힘으로는 율법(도덕법)을 준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처하나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이기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사도는 7장 14-17절과 18-25절에서 동일한 내용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그 내용을 강조합니다. 먼저 두 단락은 우리의 상태,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솔직한 인식으로 시작합니다. 14절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아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정당한 하나님의 뜻인 율법(도덕법)을 지킬 수가 없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는 자신이 “죄의 노예로 팔린 자가 되었다”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에 상응되는 18절 역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아야 할 문제의 본질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경험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처해 있는 엄중한 현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탐내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을 얻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리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더라도 심한 갈등속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육신의 욕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두 단락(14-17절; 18-25절)에서 반복하여 그로 인해 생긴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처절한 갈등에서 당신의 영을 보내사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

7장14-20절의 단락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육신이 여전히 우리 안에 거하고 있으며, 우리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고,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육신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육신은 원죄의 뿌리인 교만이며, 하나님의 뜻 대신 자신의 뜻을 우위에 올려놓는 우리 안의 타락한 성품으로서 끊임없이 사랑과 반대되는 태도를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로 인해 생긴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새영어성경(NEB)은 15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내 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는 지금 나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즐거워할 수 없는 일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8-19절도 이를 다시 강조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그것을 원하지만 자신은 이를 행할 수 없음을 깨달은 신자가 갈등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모든 것,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기 원하며 악을 미워합니다. 그가 죄를 행한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과 의지가 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삶은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그것을 갈망하고, 행하기 원하지만 그것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는 있지만 수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주님의 삶을 우리 안에 환하게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겸손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깨닫고, 진정한 삶의 목표를 세울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을 택하는 삶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심리학자 웬디우드는 그녀의 책 “해빗”에서 본능과 싸워야 지기 때문에 상황을 미리 정리하라는 충고를 주고 있습니다. 한 실험에서 학생들에게 철자 순서를 바꿔 전혀 다른 뜻의 단어를 만들어내는 ‘애너그램’ 문제를 내고 빨리 푸는 학생에게는 25달러를 지급했습니다. 학생들은 소음이 가득한 대학원 휴게실에서 곧바로 문제를 풀거나, 5분을 기다린 후 조용한 방에서 문제를 풀 수 있었습니다. 사전 평가에서 높은 자제력 점수를 받은 학생 중 대다수는 시끄러운 휴게실을 피하고, 비록 시간이 좀 더 걸려도 잠시 기다렸다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문제 풀기 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남들보다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사람들은 집중력을 방해하는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을 미리 제거한 후 본격적인 착수를 합니다. 매우 단순하지만 이런 차이가 초래할 결과는 엄청나다는 사실을 습득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의 자세는 바뀌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중심성이라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탐내지 말라”는 계명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심판받는다는 진리를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시며,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정당한 대가만을 받도록 인도하시는 훌륭한 교사이십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롬7:16-17). 16-17절은 성령님의 능력으로부터 분리된 성도의 개인적이며, 도덕적인 무능력의 원인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0절도 똑 같은 결론으로 끝을 맺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적어 놓은 것은 우리 육신의 무익함을 폭로하고,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음을 확신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입니다만 여러분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갈5:16).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의 상태와 갈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러한 묘사를 한 가지 원리로 설명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 법(the law)을 깨닫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이끌어낸 어떤 논리적인 결론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21절, 공동번역). 이 법칙은 22절과 23절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1) ‘마음의 법’ –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는 속사람을 의미. (2)’죄의 법’ – 하나님의 법을 미워하는 내 육신 속의 세력입니다. 문제는 이 세력이 하나님의 법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 속사람과 싸워 ‘죄의 법’ 아래로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경험하는 강렬한 실제입니다. 이 영적 전투는 우리로 하여금 극명하게 상반되는 두 가지 고백을 토하게 만들어냅니다. 첫째,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같은 절망적인 탄식과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같은 탄성을 동시에 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본성의 내적 타락에 대한 깊은 애통이며, 동시에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뻐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탄성입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혹은 부활의 날까지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을 받아 선한 싸움을 힘써 싸우다가, 주님 오시면 새롭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이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섹스피어와 같은 작품을 쓰라고 하라면 우리는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섹스피어의 재능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쓸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에서 은혜로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는 실제적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이들 간에는 돈이나 재능이나 명예 등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가 여부에서 판가름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바울은 이제 7장의 마지막 절인 25절에서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노예 상태를 탁월하게 요약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하지만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섬길 것인지, 죄의 법을 섬길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의 지배를 받느냐, 육신의 지배를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마음이 육신을 지배할 수 있게 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어진 8장 초반부터 이 문제를 다루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은혜로운 사역입니다. 7장 뒷부분의 갈등이 마음과 육신 사이의 문제였다면, 8장 앞부분에서의 갈등은 성령님과 육신 사이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뒤 부활하셨고 이어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성령님을 보내셨고, 성령님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와 연합하시며, 우리의 육신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의 갈등의 전개 양상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을 때의 신자의 모습을 그린 7:22 이하에 의하면, 신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으로 불리우는 내재하는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8:4에 이르면 신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뿐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야말로 주님께 순종하기를 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그 결과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고 있는 자들인 우리 안에서 성취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롬8:4,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