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이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와 연결되어 생각하게 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짝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었으나, 오직 열매를 맺는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 뿐이었습니다.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좋은 땅이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말합니다(눅8:11,15).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결실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삶 가운데 풍성하게 맺는다는 말이며,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의 9가지 열매가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풍성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냐 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믿는 순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는 바로 우리 가운데서 인간이 되어 사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입니다. 그분은 참된 가르침을 주심과 동시에 어떤 누구도 행할 수 없는 이적을 통하여 많은 선한 일을 행하시다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화평을 확보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만천하에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만지고 함께 살았던 사도들의 증언을 우리가 신약성경의 형태로 가지고 있고, 그들은 비록 2천년 전에 죽어 마지막 날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만,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께서 지금도 그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눈을 여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그 형상대로 만드시고자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결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물론 선만 행하고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는 자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면, 너희의 그 몸은 죄 때문에 죽어 있지만, 성령님은 의 때문에 너희의 생명이시다. 더나아가 만약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주하고 계신다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이 너희 안에 거주하고 계신 그분의 영을 통하여 또한 너희들의 죽을 몸들을 살리실 것이다.”(롬8:10-11, 사역). 이 말씀은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하나님의 율법(도덕법)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몸도 살리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영께 빚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를 드러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빚진 자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 대하여 ‘빚진 자’라는 이 생각은 매우 흥미롭고 경이로운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거룩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에 합당한 신분과 특권에 따라 이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정의 일, 직장의 일, 교회의 일, 공부, 만남 등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갈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결과가 산출되어 나오도록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조명하사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범사에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령님께 사랑의 빚 진자들이어서 겸손과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성령께 빚진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은 늘 겸손하게 되어 있으며,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빚에 대한 감사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8:12). 이 구절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께 빚진 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이름으로 보내신 진리의 성령께 빚진 자라는 사실이며, 그 결과 우리는 그에 합당한 신분과 특권에 따라 살아가야하며 이에 반대되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성령에 따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르는 길은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람됨과 우리의 행위 사이의 불일치, 생명을 소유함과 죽음을 자초함 사이의 일치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성령께 빚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새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특히 ‘몸의 행실’을 그의 능력으로 죽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곧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육신을 죽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13절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준엄한 선택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으로 번성하게 하고 번창하게 함으로 그것을 살게 하면 너희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13절, 의역). 따라서 우리는 이 생명에 이르는 길과 사망에 이르는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하는 바는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 자들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만 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성령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로마서 8장 5-39절은 이것을 논하고 있으며, 그 중 지금 우리가 고찰해 보는 이 단락(롬8:5-13)은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살펴볼 때 그 본질적인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곧 육신에 속한 사람들(중생하지 못한 사람들)과 영에 속한 사람들(중생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너희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니 너희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해 있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통해 너희 안에 거하시니 이제 너희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신다. 둘째, 성령께서 우리를 살리셨고, 마지막 날에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께 대하여 빚진 자들이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생명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결코 하지 않아야 하며, 오직 이러한 생명을 더 자라게 하고 성장시켜야 할 엄중한 의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새로운 신분과 빚진 자의 삶에 합당하게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신학적으로 ‘죄 죽임’(싸나투테, mortification)과 ‘열망’(aspiration)이라 불리는 두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죄죽임’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명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우리 육신의 행실들(the deeds of the body)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고, ‘열망’이란 성령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성화의 핵심적 과정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쫓는 길이요,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우리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의 길을 찾아가기로 결단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신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만큼이나 자기 비움과 섬김의 모범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자세히 고찰하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거쳐야 할 두 과정은 ‘죄 죽임’ 과 ‘열망’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먼저 죄 죽임의 과정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들을 죽이는 과정으로서 우리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습관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간순간의 회개와 모든 죄된 습관과 버릇, 관계와 생각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눈과 손과 발이 우리를 죄된 곳으로 인도한다면, 우리의 눈과 손과 발을 제거해서라도 그 길을 따르지 않으려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마5:28-29). 이것이 육신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죄 죽임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를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만, 그런 것들이 효과를 발휘하고 육체 쫓는 것을 금하는 능력은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성령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 그리고 철학과의 차이입니다.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이미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의 마음을 성령님의 일(영의 일)에 두려는 ‘열망’이라는 과정은 ‘무엇에든지 참되고 명예로우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한 것”(빌4:8)에 대한 생각과 정력에 자신의 마음과 뜻과 의지를 온전히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기도, 성경 읽기, 친교, 예배, 성찬 등과 같은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활용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성령님의 일에 마음을 둔다는 것, 즉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죄 죽임과 열망은 현재형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이 두 가지가 우리 삶에서 끊임없이 선택되고 유지되어야 할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끊임없이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중단없이 성령님의 일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와 갈등, 탐욕, 거짓말, 살인, 간음, 우상숭배 등을 만들어 내는 육신이 정복되고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과 작업이심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