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안에서의 삶의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사역을 언급합니다. 앞서 설명한 로마서 8장 4절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한다고 구속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들이 성령님의 지도를 받고 그분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면 ‘율법의 정당한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5절부터 사도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육신에 속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고, 영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영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5, 사역).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마음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사고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잠23:7)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생각과 사고에 지배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5절에서 갈파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라 행할 때에라야 율법이 성취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육신’ 혹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누신’은 몰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심, 곧 우리의 열망과 우리의 관심을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일은 자기 중심성이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있는 일들입니다. 영의 일들은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우리 자신이나, 자녀들이나 혹은 어떤 사람이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중 어디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면, ‘지금 당신의 시간과 돈, 힘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으며, 자신을 어디에 헌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돈과 시간을 쏟고 있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관심이 있는 곳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육신에 속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고, 영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영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5, 사역). 우리가 주의할 것이 육신의 일은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하고, 영의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분의 뜻을 따라 세상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5장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일이 어떻게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드러나고 있는지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19-23).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라 살아갈 때에라야 하나님의 뜻인 율법이 성취되는 이유를 로마서 8장 5절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6절은 이러한 두 사고의 상반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사망할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사망’ 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죄에 이르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데 이것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것은 거룩에 이르고,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제에 이르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이며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우리 내면의 평화를 조화시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그러면 이것이 너의 몸에 보약이 되어, 상처가 낫고 아픔이 사라질 것이다.”(잠3:6-8, 새번역).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5-6절에서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육신에 속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고, 영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영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인류의 두 가지 영적 상태 혹은 사고 방식을 육신을 따르는 경향과 영을 따르는 경향을 나누고, 이에 따른 사람들로 다시 구분합니다. 만약 우리가 육신에 있다면, 우리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되고, 육신에 따라 행하면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 안에 있다면, 우리는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라 행하므로 생명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결정되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위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 곧 죽음과 생명이 결정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 혹은 생각에 달려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으며, 마음을 어떻게 지배하며, 어디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을 적어 놓은 것이 7-8절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계속 근거와 이유를 기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확실하게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영적인 상태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도덕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뜻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표현인 율법(도덕법)입니다.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탐욕과 교만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공의로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승천하신 주님이 보내주신 성령님에 의해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가 없다고 사도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이 말씀은 로마서 8장 5-7절까지의 논의해 왔던 인류의 근본적인 불순종의 문제에 대한 결론입니다. 이제 사도는 9절에서 이 진리를 독자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이 구절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표현이 다른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 둘째, ‘영에 있다’와 ‘우리 속에 영이 거하다.’ 셋째, ‘우리 속에 영이 거하다’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적인 동의적 표현과는 별개로 9절은 기독교 교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님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가장 두드러진 표지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7:17, 20절에서 두 번이나 ‘우리 안에 거하는 죄’에 대해 언급했던 사도는, 이제 우리 안에 거하는 영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죄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짊어진 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대항해 결국 그것을 굴복시킬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지혜이자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목표로 제시하시는 분은 바로 주 예수님이시며, 주님의 형상에 맞추어 우리를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사도 바울은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분에게 속해 있지 않습니다.”(롬8:9, 사역). 이를 쉽게 말하면 신자들은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님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10절과 11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면, 너희의 그 몸은 죄 때문에 죽어 있지만, 성령님은 의 때문에 너희의 생명이시다. 더나아가 만약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주하고 계신다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이 너희 안에 거주하고 계신 그분의 영을 통하여 또한 너희들의 죽을 몸들을 살리실 것이다.”(롬8:10-11, 사역). 즉 현세에서는 우리 자신(인격, 영혼)이,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우리의 몸까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주님이시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몸이 현세에서 죽는 이유는 아담의 죄로 인하여 받는 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죄인들일 뿐만 아니라, 아담의 후손은 스스로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몸은 죽도록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히9:27).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저주를 걸머지고 죽고 부활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의로 인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인정된 의 때문에 마지막 부활의 날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올 것입니다(요5:29). 우리는 10절과 11절에서 삼위일체의 세 위가 은연 중에 다시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시키는 성부 하나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 부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가 요한복음5장 29절과 연결하여 나옴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