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그리고 만약 자녀들이라면 또한 상속자들입니다. 만약 우리 역시 영광을 함께 받기 위하여 고난을 함께 받는다면 하나님의 상속자들, 곧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들입니다.”(롬8:17, 사역). 17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필수적이라는 전제가 담겨있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 세상은 악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사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런 고난조차 미래의 영광과는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18절에서 단언하면서 25절까지 우리의 유업을 보증하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들은 장래 우리에게 계시될 그 영광과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롬8:18, 사역). 현재의 고난들과 미래의 영광 이 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대조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미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들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사도 바울은 장엄하고도 우주적인 배경을 마음에 두고 본 단락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 곧 교회가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에 어떻게 함께 포함되어 있는지를 사도는 본 단락의 후반부에서 계속해서 보여 줍니다. 두 피조물, 곧 옛적 그대로의 피조물과 새롭게 된 교회가 현재 함께 고난을 받고 있지만, 결국은 함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3장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저주를 함께 받았고, 지금도 그 고난을 받고 있듯이 피조물은 인간과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했던 구속함을 받게 될 때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입니다(19절). 기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현재에서는 만유가 회복되지 않았기에 절반만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재림시 가져오실 그 완전한 구원을 우리는 믿고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기대는 전혀 어긋남이 없을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허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피조물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망은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리라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신음하고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롬8:19-22, 쉬운성경). 이 단락에서 ‘피조물’이란 단어가 각 구절마다 각각 한 번씩, 모두 네 번 나옵니다. 이 구절이 피조물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고난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무’란 말(20절)은 ‘공허함’ ‘덧없음’ ‘무익함’ 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역성경의 번역자들이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며….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을 번역할 때 택했던 단어로서, 전도서는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로 하여금 굴복케 한 허무, 헛됨은 현재 우주가 변화될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현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은 대리자로 임명받은 아담의 타락으로 심판 아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형벌로 속박과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한시적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인 신자들이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나타날 때, 자연 역시 변화되어 자유와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21절). 그때 종노릇은 자유로 대체될 것이며, 썩어짐과 부패는 불멸의 영광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나누듯이 피조물도 우리와 그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을 ‘해산고통’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질서를 낳을 때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세계관을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동물 및 자연 애호가들보다 더 나은 이해와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3-25). 이 단락은 로마서8장 19-22에서 주제가 된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인 교회로 논의를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앞 단락에서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던 것에 대해 말하였지만, 이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 표현된 그리스도인들 역시 피조물과 함께 속으로 탄식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지금 당하고 있는 교회의 고난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온전히 완성되지 않은 우리의 구원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인격은 구속받았지만, 우리는 아직 죽을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죽을 몸의 속량(속전을 지불하고 노예를 놓아주는 의미)을 기다리면서 계속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질병과 노쇠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탄식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한 몸만이 아닙니다. 그 또 다른 것은 바로 육신, 곧 우리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롬7:24)라고 울부짖게 만드는 “우리 속에 거하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인 그리스도인들조차 이 두가지 짐을 벗게 될, 즉 우리의 연약한 몸이 변화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멸하게 될 장래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질 그 속량의 날까지 믿음으로 인내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합니다.“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3-25).” 이 구절을 보면 신자가 미래에 받게 될 영광이 이중적으로 나타날 것을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몸이 속량(贖-속죄할 속, 良-어질량, 양민량 )될 것입니다. 속량이라함은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던 일.”을 가르킵니다. 성경번역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못박혀 대속(代贖)하심으로 우리를 죄의 노예상태에서 풀어주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아포루트로시스’를 위해 ‘속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는 아담의 범죄의 결과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 몸이 죽도록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포도 생성이 되면 이미 거기에 사망이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가 올 때까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선고된 사망은 계속 왕노릇할 것이고, 중생한 신자들 역시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 스토트 목사님을 위시한 신학자들은 “우리는 현재 절반의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사도는 우리의 죽어가고 있는 몸 역시 그리스도의 속죄의 혜택을 볼 날, 즉 ‘우리 몸의 속량의 날’ 을 기다리라고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날에 바로 우리의 몸이 속량되어 현재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연약한 몸과 타락한 육신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죽지 않을 부활의 몸을 가지게 되어 다시는 죄와 사망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되는 날입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이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그토록 행하기를 원하고 있으나 행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에 받게 될 신자의 첫 번째 영광입니다. 두 번째는 ‘양자됨’입니다. 이는 다음 주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도서2:12-14).

오늘은 안식일의 영성에 대하여 잠깐 말씀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유진 피터슨에 따르면 주님 당시의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진 경건한 유대인들은 두 개의 촛불을 켜고 안식일을 맞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 당신께 복이 있나이다. 당신의 계명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의 불을 밝히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나이다.” 촛불 하나는 출애굽기의 명령 때문에 켜졌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출20:8-11). 두 번째 초는 신명기 명령 때문에 켜졌습니다. “…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아무 일도 하지 말고….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땅에서 종이 되었더니….”(신5:12, 14-15). 토요일에 해가 질 때 그 기도는 다시 반복되었고, 다시 초가 켜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인 ‘하브딜라’(Havadilah)가 드려지면서 안식의 거룩한 날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물론 요셉조차 알지못하던 계명으로, 지킨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러 야곱의 후손들이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루를 정하신 것이요,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서의 안식의 상징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드디어 이들에 의해 안식일에 경배를 받던 주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냈고, 안식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글자그대로 지키는 것은 낡은 것이 되었으나, 안식일이 주는 영성의 가르침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일터는 우리를 통제의 주체의 자리에 놓고, 세상의 기술과 전략을 발휘해야만 하니, 여기에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일에 일을 떠나 교회에 오면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경탄하도록 하여 일이 가지는 우상숭배적 요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동을 환영하시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기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도록 우리의 삶을 겸허히 의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4:2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