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3-25).” 이 구절은 신자들이 받게 될 두 번째 영광은 ‘양자됨’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23절에서 ‘양자 養子’란 말은 이미 15절에서 사도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 완전히 나타나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될 때까지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즉 우리는 아직 몸이나 인격에 있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녀됨은 아직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19절)이라 했던 것이 입증될 것입니다. 세상이 아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알지 못하지만(요일3:1),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분명하게 천명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 불리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피조물도 그 영광을 우리와 함께 얻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 역시 이 영광스러운 미래의 유업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으며, 여러분은 무슨 근거로 여러분 자신이 그런 유업을 받을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1-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3-25).”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미래의 유업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 근거는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을 받았기”(혹은, 성령님이라는 처음 익은 열매들을 받았기) 때문입니다(23절). ‘처음 익은 열매들 the firstfruits’ 은 추수한 첫 곡식을 성전에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유대인의 관습을 지칭합니다(레23:10-11). 이것은 추수할 모든 것을  성별(혹은 봉헌)시킨 것이었고, 후에 익을 열매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그렇지 아니하면 처음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통상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면을 가리키고 있지만,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더 많은 것이 남아 있다라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지금 받은 성령님의 열매들은 다가올 세대 즉,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우리에게 주어질 충만한 축복을 단지 맛보고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우리의 결정적인 양자됨을 받지 못하였으며, 이를 위해 우리 몸의 속량 혹은 구속(救贖)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있을 우리의 충만한 유업에 대한 보증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그런 것에 대한 보증 이상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장차 받을 유업을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사도는 고린도 후서와 에베소에서는 상업적인 비유를 통해 이를 표현합니다. 즉 매매거래를 체결할 때 계약금만 지불하고 할부로 구매한 뒤, 차액은 나중에 지불하는 관습을 빌려 우리가 받은 성령님을 ‘아라본- 보증금’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고후1:22; 엡1:14). 그러나 여기서는 농업 비유를 통해 앞으로 있을 온전한 수확물을 미리 맛보는 ‘처음 익은 열매’로 성령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자의 영이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실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몸이 구속받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히 선택될 것을 보증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입술의 고백만 있고, 그 안에 성령님을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 24-25절은, 이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로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지만, 그 구원은 우리 몸을 포함할 마지막 날에 있을 완전한 구원을 소망하며 받은 절반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있는 이 이중적인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직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지금 당하는 고난에 구애 받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립니다(25절). 19세기 미국의 가장 유명한 연설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 버그 연설을 꼽을 수 있고,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과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3분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다가 암살을 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만큼 자기의 믿는 바를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꽃을 피웠습니다. 흑백갈등이 첨예하였던 1960년대에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이자 박사는 이미 헌법에 의하여 보장된 흑인의 권리가 무시되는 현실을 철저히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득권을 누리면서  침묵하거나, 말콤엑스와 같은 폭력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3의 길인 비폭력적이나 직접적인 행동을 통하여 긴장과 위기감을 불러 일으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길은 자기 희생의 길로서,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빈번히 투옥되고, 얻어맞고, 심지어 집까지 폭파되는 위험을 감수하여야만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그런 희생은 결국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날이 제정되도록 하였고 흑백갈등이 해소되는 쪽으로 점차 미국은 방향을 잡아갔습니다. 그가 죽은 지 40여년이 흘러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이 당선됨으로 백인과 흑인이 나란히 공존하는 사회를 보고 싶다는 킹 목사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의 일도 이렇게 인내가 필요한데 하물며 온 우주가 변화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그 날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인내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날이 도래할 때까지 인류의 역사는 그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섭리로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를 믿고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1-2, 현대인의 성경). 

“성령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성령님의 생각을 아십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롬8:26-27). 26-27절에는 성령님의 또 다른 사역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그것은 무려 네 번이나 언급됩니다.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어려움을 지탱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특히 그분은 기도할 때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약점은 무지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26절). 우리는 기도에 있어 성령님의 사역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령님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8절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이방인이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던 유대인들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한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성자를 통해, 그리고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면 성부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자 하나님의 중재만큼이나 성령 하나님의 중재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더 특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라 말없이 탄식만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로 표현되지 않는 탄식, 신음, “고뇌에 찬 열망”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꼭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고뇌에 찬 열망으로 몸부림칠 때, 이러한 탄식을 격려하며, 우리를 친히 중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생각을 모두 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입니다.”(빌4:6-7, 현대인의 성경).

어제까지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사역, 곧 우리의 육신을 복종시키시며, 우리의 양자됨을 증거하시며, 우리의 유업을 보증하시고, 기도 중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글을 읽을 때 흔히 우리가 빠지는 오류가 공동체와 분리된 한 개인의 측면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교회 공동체들을 전제하고 사도는 적고 있는 것임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약성경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전제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20년 만에 깨달은 것과 같이 히브리서도 교회 공동체를 전제로 씌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삶은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혼자서는 기독교적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이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성경은 혼자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창조되고 구원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령을 통해 불러모으시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창조와 구원을 삶으로서 살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존재들이다”(현실, 하나님의 세계,430)고 갈파한 유진 피터슨의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person)을 가진 공동체이면서,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과 적극적인 교통 가운데 있습니다. 이는 우리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존재이시기에, 그분과 교제를 나누어야 알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인 믿음 역시 인격적 응답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격은 단순한 정보와 지식과 언어가 아닙니다. 인격은 서로 사귀어야만 인식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와 공동체의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성도들과 서로 사귀는 것은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금요일 저녁 7시30분부터 교회가 드리는 기도 중심의 예배와 친교가 있습니다. 정부가 요구하는 방역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바쁜 일과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겨두시고 하나 같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전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