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엇보다도 신앙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힘써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주님과 바른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경건한 삶” 혹은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인간들이 세상에서 경험하여 터득한 지혜를 배우고, 일을 할 때 오는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릎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22:16) 혹은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 한다”(22:13)는 격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주인이 계십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22:12)라고 선언함으로써, 주님을 성공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눈밖에 나면 주님은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부수어버리시곤 합니다(전5:6). 그러므로 우리는 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하여도 현실적이어야만 합니다.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잠22:7). 당연히 부자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빚쟁이의 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너의 양 떼의 형편을 잘 알아 두며, 너의 가축 떼에게 정성을 기울여라. 재물은 영원히 남아 있지 않으며, 왕관도 대대로 물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잠27:23-24) 라거나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잠12:12)과 같은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잠22:2)는 말을 마음에 두고, 주님을 경외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지혜롭게 돌볼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부와 빈곤의 문제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균형추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제대로 다룰 지혜의 원천은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 어떠한 지혜도, 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잠21:30-31).2020. 7. 27 – 31
공산 치하의 루마니아에서 비오리카라고 하는 크리스천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친구들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한 죄로 학교에서 심하게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소녀는 결국 기절을 했고, 구급차가 와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비오리카는 이틀이 지나서야 의식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녀가 정신이 들자, 옆에 있던 의사가 말하였습니다. “가엾은 애야, 드디어 눈을 떴구나. 그동안 나는 너를 이렇게 모질게 때린 너희 학교 교장 선생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증오로 불타고 있단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싶구나.” 비오리카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분을 미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어요. 제가 눈을 뜨기 직전에 저는 예수님을 뵙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예수님이 저한테 아직도 아프냐고 물으셨어요. 그리고 하늘나라에 오면 예수님을 위해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두신 아름다운 왕관을 받을 거라는 이야기도 하셨어요. 그리고 나를 괴롭힌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들도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데 도움이 될거라구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수를 보여주는 어린이들의 신학입니다. 자기들을 때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어린 비오리카는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이들조차 자기들의 구주께서 행하신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될수록 성경에 대한 지식과 이해력은 증가하나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말씀은 우리의 강팍하고 둔한 마음이 담아둘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우리는 진주를 던지지 말아야 할 ‘돼지’같은 사람들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양쪽을 구비할 수 있도록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19세기 초에 살았던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던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자기가 어린 시절에 하나님께 대하여 품고 있었던 열망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미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등의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종일 하늘을 쳐다보아도 거룩한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회색 구름이 만들어 내는 의미 없는 모양들만 보았기 때문에 저녁이면 아주 슬픈 마음이 되었다. 나는 어린이들도 알 수 있는 천문학적인 사실들에 대해 굉장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수백만개의 별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크고 아름다운 땅덩이들이라는 사실과 단 한분의 하나님께서 이 반짝거리는 별 하나하나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 한번은 꿈 속에서 굉장히 높은 곳에, 아주 멀리 계시는 하나님을 본 적이 있었다. 하나님은 하늘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고 계셨는데, 그분은 유대인들처럼 작은 턱수염을 기르고 계셨다. 그 씨앗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꽃이 피더니, 무한한 우주 속에서 점점 커져서 우리 지구처럼 반짝이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들이 되었다. 나는 이 환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나는 그후로도 행복한 노인이 하늘의 작은 창문을 통해 별들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마치 우리집 하녀가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던져 줄 때 하는 것처럼 그분이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도 들었다.” 어른이 된 하이네는 종교와 교회를 조롱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증오하던 칼 막스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어렸을 때에 본 환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다시 그 기억을 회상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알 특권을 가졌던 사람들은 어렸을 적에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유지하도록 애써서, 그릇된 철학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한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AD 286-305)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로마신의 제의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고(303년),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노역에 처했습니다.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가 동시에 나왔습니다. 이 당시 길리기아 주에 줄리에타라고 하는 귀족 출신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이방신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나의 재산뿐 아니라 목숨까지라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총독 알렉산더는 그녀의 세 살난 아들 퀴리커스를 품에서 빼앗고, 그녀를 심히 매질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이는 고통 당하는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에게 돌아가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아이를 붙잡아다 자기의 무릎 위에 앉히고 아이의 입을 맞추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그 총독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몸을 빼내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총독 알렉산더는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줄리에타는 오히려 이 어려운 고통을 더 이상 당하지 않도록 먼저 아들을 불러가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10년의 고난의 세월이 흐르고 드디어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정식종교로 공인되어 박해는 끝났습니다만, 로마의 주류사회에 평안히 정착하게 된 기독교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일제하의 마지막 10년을 생각해 봅니다. 감리교의 초대총리인 양주삼목사는 개인적으로는 경건하고 존경받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1936년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자 “기독교인은 종교인이기에 앞서 국민”이라며 신사참배를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신궁, 일본의 이세[伊勢]신궁과 신사를 참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광복후에는 “출옥성도나 교회를 지키기위해 신사참배를 한 성도나 고생한것은 마찬가지”라는 논리로 교권을 유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분은 1950년 8월 납북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떤 자세로 그리스도를 섬겨야만 하는지를 마음에 늘 새기고 주님 만나뵐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8:5-8).
“왜 아빠는 언제나 아빠 말씀에는 우리가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우리나라 헌법은 우리 모두가 똑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약 70년 전 루마니아가 공산주의 국가였을 때 아멜리라는 소녀가 자신의 아빠에게 한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딱히 내세울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아바이 동무’라고 호칭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강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는 근거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라고 하나님은 막 애굽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후 1500년이 지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 범위를 넗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즉, 부모에게 순종하는 근거는 하나님이고,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은 땅으로 상징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부모님들은 미리 삶에서 체험하였기 때문에, 정당한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자녀들이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모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은 청년 때까지입니다. 장성한 뒤로, 특히 결혼한 부부는 부모를 떠나야 하고, 부모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근거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이것이 청년 때 부모님께 순종하도록 하는 보다 깊은 이유입니다. 부모님에게 순종을 배우지 못한 자녀들은 대부분 하나님께 대하여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불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아이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잘 듣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 진정 이것은 머리에 쓸 아름다운 관이요, 너의 목에 걸 목걸이이다.”(잠1:7-9).
어느 날 아멜리는 자신의 아빠에게 또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시작되었어요?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하늘에 있게 되었어요?’ 범브란트 목사님은 아멜라에게 “우리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주 조금밖에 모른단다. 우리는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이 한계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주시겠습니까?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신29:29). 우리가 아멜리의 질문에 대한 답은 비록 갖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삶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하여는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이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백범은 1947년 12월에 있었던 설산 장덕수의 암살 사건과 관련한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였습니다. 검사가 “직업이 무엇이요?”하고 질문하니, 백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한편, 주님은 체포되시던 날 밤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16:28)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대속의 과업을 완성하시고, 이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시어 만유의 주로 임명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아버지의 뜻의 성취가 삶의 목표이셨고, 그것을 훌륭하게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로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청지기적 소명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을 때 발견할 수 있으나, 세속적인 우리로서는 실천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발견하였을 때는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1: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