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 – 6
소망은 우리 마음의 원동력입니다. 교통사고나 다이빙 사고가 나면 신체가 마비 되지만 소망이 다치면 마음이 마비됩니다. 소망 때문에 인류는 타락한 이 세상에 자녀를 내 보냅니다. 자녀 때문에 힘들어도 자녀가 자신보다 더 낫고 더 고귀하고 더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거장 화가 헨리 마티스는 늙어서 관절염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손가락을 구부려 붓을 잡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왜 계속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자 마티스는 대답했습니다. “고통은 사라지지만 아름다움은 남습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파블로 카잘스는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로 인정받고 난 후에도, 연로한 육신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하루에 5시간씩 연습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연습하는지 질문하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연습을 하면 기량이 향상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시스티나 성당을 땅거미가 완전히 덮으면 미켈란젤로는 지치고 쑤신 몸을 이끌고 회의에 차서 사다리를 밟고 발판에서 내려왔습니다. 쓸쓸히 저녁을 먹은 후 고달픈 몸으로 시를지었습니다. 마지막 행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화가도 아니다.” 그러나 해가 다시 떠오르면 미켈란젤로는 침상에서 일어나 다시 발판으로 올라가서 창조주에 대한 장엄한 환상에 하루 종일 또 다시 몰두하였습니다. 그가 다시 사다리를 올라가도록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소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는 곧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소망이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떠나게 했고 모세를 파라오와 맞서게 하였으며, 선지자들을 권력과 대결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2-4).
사람은 무수히 많은 것을 잃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소망을 잃으면 살 수 없습니다. 소망이 사라지면 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능력은 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 보다 폭풍의 압도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문제에 빠지게됩니다. 예수님은 배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실 때마다 그 각각에게 물 위로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분은 결코 가라앉게 만들려고 사람들을 부르지 않습니다. 때로 가라앉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님의 부름은 절대로 실패의 전주곡이 아닙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탐사 하라고 정탐꾼 12명을 보냈습니다. 10명은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거인입니다. 우리는 방향을 바꿔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우리는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2명 모두 똑같은 땅을 보았고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였지만, 완전히 상반된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란 목동은 군 복무 하고 있는 형들에게 보급품을 가져왔습니다. 세계레슬링연맹에서 나오는 인물 같은 적의 대장 거인 골리앗이 그들을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군인들은 이것을 보고 겁에 질려 나서지 못하고 낙심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물매를 가지고 그와 맞섰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 타고 있을 때 폭풍이 닥쳐왔습니다. 제자들은 죽을 것처럼 무서워서 겁에 질려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배 안에 계신 예수님은 평화롭게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정확히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평화로운 반응을 보였고 어떤 사람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낙심했고, 어떤 사람은 용기를 냈습니다. 여러분 밑을 내려다보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셔야만 합니다. 모든 힘과 소망이 머리이신 그분으로부터 옵니다.“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단순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냐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썼습니다. 그 진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을 너무 염려하지 말고 이제 그만 선교헌금을 보내라고 만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백지수표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호나우도보다 골을 많이 넣고 파바로티 보다 높은음을 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맞설 수 있고 결코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인하여 나의 노력이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굳게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낙관론과 소망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낙관론은 발전에 대한 믿음, 즉 나의 일들이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소망은 낙관론의 모든 심리학적 장점을 다 포함하는 동시에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내가 소망 한다는 것은 오늘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다고 해서 최악을 예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망을 가진 자들은 최악을 대비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생명의 소망’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씀에 지배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 마음은 폭풍 한 가운데서조차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종종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무심하게 취급합니다만, 그런 능력은 평소에 우리가 우리 마음에 무슨 생각을 공급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를 가지고 자동차 경주 대회를 참가하려고 한다면, 값싸고 열량이 낮은 무연 휘발류를 차에 넣겠습니까? 또 만약 당신이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 참여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당신의 삶에서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경기 때까지 초콜릿만 먹는 다이어트를 하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을 먹는지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자동차, 몸, 자녀, 심지어 애완 동물에게까지 무엇을 먹이느냐에 매우 주의합니다. 인간의 신체에 무엇을 집어넣느냐가 수백억 달러의 산업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으로 들어가는 연료가 궁극적인 성과와 안녕을 결정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종종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자원인 마음을 무심하게 방치한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무슨 생각들을 주입하느냐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삶과 장래가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파괴적인 생각, 절망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 원망하는 생각, 비상식적인 생각, 낙심하는 생각, 좋지 않는 생각 등을 집어 넣으려고 온갖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의 마음에 공급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무장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폭풍이 치는 동안에도 그리스도께 계속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좋은 연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은 마르다는 무덤 속으로 들어간지 나흘이나 된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법칙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식의 법칙(law of cognition)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심리학자 아처볼드 하트는 “한 사람이 생각하는 세계가 그의 존재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확신이나 두려움 중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여부는 어떤 종류의 생각이 우리의 정신을 점령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태도를,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정서의 틀을, 더 나아가 당신의 행동을 지배합니다. 또한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면역 체계와 질병에 대한 취약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내면의 상태와 외부 행동의 연관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좋은 생각(정확한 인식, 건강한 정서, 건전한 욕구, 고귀한 의도)이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고, 나쁜 생각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물과 환경 그리고 사람들의 말을 보고 들을 때 어떻게 인식을 하는지를 매우 세심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똑 같은 환경에 처해도, 똑 같은 말을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어려움에 처해도 하나님께서 능히 힘주시고 은혜주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해 주신다는 믿음의 생각으로 우리 삶을 견고하게 붙들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의 인식은 우리 삶을 복된 삶으로 변화시키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잠2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