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3 – 27
이번 주는 성탄절 주간입니다. 23일과 24일 이틀간은 주님의 탄생과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1-7절 따르면 가이사 아구스도 즉 아우구스트 황제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 칙령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재임한 중에 첫 번째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었기에 호적하러 유다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다윗이 태어나서 자란 동네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도 함께 갔으며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거기서 아이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따르면 이 사건은 이미 700년 전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를 예언한 미가서 5장 2절의 성취였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마태복음 2:6; 미가5:2). 그리고 선지자 미가는 태어날 메시야를 통하여 전 인류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5:3-4).. 그러나 그 어떤 누구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호적하라고 명령할 때에 만삭이 된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가서 아이를 낳아서 성경을 성취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것을 작정하고 계셨지만 그것을 그 어떤 누구도 알 수 없는 섭리가운데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실한 믿음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3-4).
예수님이 약 1,350년 전 나오미와 엘리멜렉의 가족은 기근을 피하여 베들레헴에서 사해 동편에 위치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10년을 지내는 동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자부 룻과 함께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들레헴 성문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나오미를 보고 “이가 나오미냐?” 하니 나오미는 그들에게 “나를 나오미라고 하지 말라 마라라 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혔고 여호와께서 나를 징책하셨거늘 어찌 나를 나오미라 하느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전능자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라고 대답할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자부와 함께 며칠 집에 있었는데 이때는 보리추수를 할 즈음이었습니다. 자부 룻이 이삭줍기를 허락받고 들에 나아가 이삭을 주울 때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줍기 시작하였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추수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룻을 보게되고 그녀를 선대하였습니다. 룻은 저녁에 보리 한 에바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를 본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알게 되고 드디어 룻과 보아스를 결혼시켰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이며 오늘 본문의 베들레헴이 다윗의 동네로 일컫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각기 아들과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겼으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런 나오미와 룻을 통하여 약 1300년 후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들어오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섭리 가운데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짐승의 구유에 놓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유의 주님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서슴없이 비우시고 낮추신 그 겸손을 성탄절을 맞이한 우리는 꼭 본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우리는 “기다림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다”라는 교훈을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기다림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를 문제에서 건져줄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하염없이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 것,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것,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핑계로 “나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기다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동적 소비, 저축 거부 등의 심각한 재정 관리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엄청난 재정 혼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공급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잘못된 기다림의 예입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을 위배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선한 청지기의 자세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산안 세우기, 십일조, 충분한 돈이 있을 때까지 구매를 미루는 것 등의 새로운 재정 습관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적 기다림은 수동적이 아닌 동시에 불유쾌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법 또한 아닌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확신과 자제력과 기대를 가지고 행동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저는 당신을 신뢰할 것이고, 당신께 순종할 것입니다. 제 삶의 환경들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제가 선택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만이 저의 유일한 대안입니다.”라고 매일 다짐하겠다는 결정입니다. 따라서 성서적 기다림은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신뢰하면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편4:5).
주님을 기다리려면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성경에 말씀하신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사물을 보아도 어린 아이가 사과를 보는 것과 물리학자가 사과를 보는 것은 관점이 전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여기만을 보는 인간과 영원한 관점에서 보시는 주님과는 같은 사물과 같은 상황이라도 전혀 다른 관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후서는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어느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당신께는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래” “그렇다면 우리의 백만 달러가 당신께는 한 푼에 불과하겠군요” “그래” “주님, 제게 한 푼만 주시겠어요?” “좋아, 여기서 일 분만 기다려라.” 사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하나님의 자원은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시간은 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 푼은 원하지만 하나님의 일 분은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 하나님이 우리 안과 밖에서 행하시는 일이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다릴 때 하나님이 제대로 일하신다는 점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