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 10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들처럼 하게 도우소서.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 일들처럼 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일들이 닥칠 것입니다. 큰 일이 닥칠 때에도 두려워 하지 말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 담담하게 처리하며, 작은 일을 하게 될 경우에도 경시하지 않고 주님의 자녀답게 최선을 다해 처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올 한 해에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자녀들이 자라서 말을 할 수 있을 때, 부모가 제일 자주 하는 질문은 “얼마나 컸지?”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똑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만큼 커요!” 보통 아이들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키를 부풀려서 “나는 커요.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클지 아무도 몰라요” 하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물론 과학적인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 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을 작고, 약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중요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얼마나 크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크십니까? 데일 브루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두려움의 폭풍 속에서 괴로워할 때, 그 폭풍을 잠재울 능력을 가진 말씀이 바로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를 내라! 나니(I AM) 두려워 말라!”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원문은 “에고 에이미”로서 한글은 “나니” 즉 “나다”로 번역하나 이 말씀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호렙산 가시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영어로는 “ I AM”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평범한 인사말이 아니고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야훼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위대한 말씀 속에 바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쉽게 인생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당신 손안에 바로 이 우주가 들어있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6-27)
존 오토버그 목사는 “나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의 산물이라고 확신한다. 많은 사람의 문제는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면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에 지배될 것입니다. 그 결과 만약 전도할 기회가 생기더라도 “거절당하거나 알맞은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지?”하고 움츠러들게 되고말게 됩니다. 전도가 궁극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정적 안정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관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직면하거나 강한 권면의 말을 해야 할 때도 슬쩍 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작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으므로 그분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면 십중팔구 그 유혹에 넘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은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의 삶을 은밀하게 보시고 어느 날 상을 주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축소시키면 믿음 없는 기도를 드리고, 열정 없이 일하고, 기쁨 없이 봉사하고, 소망 없이 고통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신 지혜로우며 능력이 무한한 하나님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존 오토버그 목사님이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뉴포트 해변을 걸으면서 술집 안에서 일어난 싸움이 바깥까지 번져 나온 곳을 지나갔습니다. 마치 옛날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남자 세 명이 외로운 한 사람을 구타하고 있었는데 피해자는 피를 상당히 많이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별로 경험이 없었지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에 목사님 일행은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갑자기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놀라서 그들을 불러 세우고 왜 도망가느냐고 물어볼 뻔하였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곳에는 엄청난 거인이 서 있었습니다. 술집 경비원이 분명하였고, 대략 2미터의 키에 몸무게 110킬로그램 정도였으며, 마치 헤라클레스의 아들 같았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몽고(3미터 크기의 전사 상)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의 면전에서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몽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엄청난 근육을 과시하며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실로 싸움을 해결하는 것은 그의 ‘영적 은사’였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의 태도가 변하였습니다. 용기와 자신감이 가득하였으며,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일행에게는 강하고 큰 몽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몽고보다 크신 분과 항상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폭풍 속에 있는 우리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조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의 삶에 그것을 반영하지 못하며, 그런 믿음으로 직면해야 할 때 우리는 움추러들고, 기도할 수 있을 때 걱정하고, 후히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움켜잡고, 물 위로 걸을 수 있을 때 배 안에서 머물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반드시 두려움이 닥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시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의 시각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2020.1.13 – 17
하나님은 온 우주를 우리 주님을 통하여 지으시고,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신뢰하고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인간이 하나님의 광대함, 존귀함, 힘을 인식하고 선언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장려하지 않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로 평가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배는 생산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예배로 무엇이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배를 드립니까?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보여질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땅은 이미 그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고, 세상에는 두려운 일이 가득하며 결국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사망으로 귀결되도록 운명지워졌습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벌판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처럼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세상을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불안은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경험이 없다면, 세상에 압도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피조물들(경력, 실력, 돈, 명예, 인맥, 권력, 체력 등)을 경배하고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4개월만 교회에 나오지 않고 기도와 찬양이 없으며, 성경을 읽지 않으면 여러분은 세상사람과 다를 것이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인 예배의 감동과 기억이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4-5).
우리는 때로 베드로처럼 배 밖으로 나갈 때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가 아직 공산주의 치하에 있을 때,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친구와 함께 2주간 설교하러 그곳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초청한 지하 교회들은 50권의 주석 성경을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성경 밀수가 문제를 일으킬까봐 염려가 되었지만 목사님은 시도해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러 미국 교회들이 필요한 성경을 기증하였고, 떠나기 직전에 한 여성이 다가오더니 목사님의 손에 한 권을 더 쥐어줘서 목사님의 선교 일행은 총 51권을 가져갔습니다. 당연히 세관 직원이 이 선교팀의 옷 가방 중 하나를 열더니 성경을 압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오토버그 목사님은 세관의 수장인 관리가 교회 리더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최악의 상황이 올까 봐 두려웠습니다. 에디오피아의 교회 리더들은 감옥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감옥을 ‘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은 하나님이 그의 리더들이 성장하기를 원하실 때 보내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셉처럼 그들 중 일부는 간수들이 쉬러 갈 때 감옥을 책임지기도 하였습니다. 간수들은 라이플 총에서 총알을 빼어 그리스도인 죄수들에게 건네주고 돌아올 때까지 경비를 서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여러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관리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불법입니다. 하지만 눈 감아 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도 한 권 갖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1권을 기증받은 것 역시 이 관리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깨달은 목사님은 회고합니다. “그날 내 하나님은 좀 더 커지셨습니다. 주님이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크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 능력의 배 밖으로 나갈 때마다 그의 하나님은 좀 더 커진다는 진리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3-4).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려 할 때 집중하지 못하고 흐트러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방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주목합니다. 방심상태에서 나의 몸은 현장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어느 곳을 자동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때때로 이런 방심상태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몇몇은 아예 생활의 한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방심은 우리를 예배하지 못하게 막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되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에 주목하지 못하고 방심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미스터리를 제거해 버리는 시대에 살면서 미스터리가 없어서 아쉬워합니다. 발신자 추적을 하고, 아기들이 태어나기 전에 성별을 알고, 출구 조사를 하여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누가 선출되었는지 알고, 텔레비전 마술사들이 항상 숨겨 왔던 비밀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경이를 파괴해 놓고서 그것을 몹시 갈망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너무 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접할 때 우리는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명령하지 않아도 폐는 계속 공기를 흡수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 매일 잠이라는 작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부활시키는 기적을 잠시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일으키는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들려올 때 느껴지는 아름다운 선율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귀를 울리는 공기 분자의 진동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기 분자의 진동의 의미를 알아듣고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외치는 작은 신현(神顯)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예배가 때로는 지루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예배의 방식이나, 찬양의 종류 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배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산과 폭풍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말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미지는 더 작아지고 더 편해지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천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천사들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적 존재에서 편한한 개인의 수호 천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CS 루이스는 성경에서 천사의 등장은 항상 두렵고 무서운 사건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천사를 만나는 모든 경우 “두려워 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항명으로 1965년 감옥에 들어가 12년간 옥고를 치루고 1976년 풀려 나온 고 이인수 장로님이 1985년 장교들이 모인 앞에서 한 간증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감옥에서 낙망과 절망에 잡혀서 나날을 보내던 중 병까지 들었습니다. 몸무게가 38킬로 그램 정도로 내려갔고 의사도 이제는 끝났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병상에서 위로를 받으려고 성경을 잡고 펴니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한다는 내용이 적힌 로마서 5장 3-4이 나왔습니다. 마음에 “다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어”하고 부정하자마자, 옆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 까짓 정도 가지고 낙망하냐!” 고 책망하셨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아쉽게도 1985년 출간한 그분의 간증집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에는 누락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 체험 등으로 감옥에서 12년 간을 이겨내고 드디어 석방되어 여러 해 동안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항상 하나님과 천상의 존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3:10-11)
C.S. 루이스의 책 『캐스피언 왕자』에서 한 아이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 아슬란과 우연히 만납니다. “아슬란, 당신은 더 커졌어요.” “그건 네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지, 애야” 아슬란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요?” “나는 나이가 들지 않아. 그러나 매년 네가 자랄 때마다 내가 더 커진 것을 보게 될 거야.” 우리와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이야기가 예배로 끝나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예배는 전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순환시킵니다. 예배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제자들이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배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제자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크시지?” 베드로는 머리 위로 손을 높이 들어올리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만큼 크셔!” 예수님이 배 안으로 들어가시자 바람이 잠잠해졌고 폭풍도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배 안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한결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누군가 배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그렇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결코 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결과가 무엇이든, 그들이 빠지든 헤엄치든 무언가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명을 분별하여 순종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하나님은 더 커지실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예배와 믿음은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강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 그분을 신뢰하고 나설 사람들을 아직도 찾고 계십니다.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이에 대하여 우리들도 믿음으로 응답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히11:1-2,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