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누가복음 4:16-21

(클레멘트코스의 철학)
다 아는 바와 같이 ‘클레멘트코스’는 미국의 얼 쇼리스 박사의 제안과 노력으로 탄생하였으며, 그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난을 벗어나게 하여 주려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인문학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을 공부하면 그들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보는 생각을 변화시키게 되고 그 결과 주체성 있는 사람으로서 서게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새로운 눈이 뜨게 되어 연구하고 생각함으로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며, 매사에 생각없이 단순 반응만을 반복합니다. 마치 외부자극에 조건반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클레멘트코스의 사례)
따라서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인문학은 틀에 박힌 사고에 갇힌 지루한 일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는 남들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과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 시를 음미하는 법, 교향곡을 즐기는 법을 새롭게 배웁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미술작품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상황이 열 가지 라면 그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열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배우는 것은 시작하는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시를 읽는 것 위대한 미술작품을 보는 것 자체가 모두 시작하는 일이며 새로워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롭게 시작하기’를 사업이나 학문을 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작하도록 가르칩니다. 지유로워지기, 우리가 맞닥드리는 일상을 새롭게 생각해 보기, 과거에 짓눌리지 않기, 되풀이하지 않기, 전통을 억압이 아닌 혁신의 동력으로 이해하기 같은 것들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치적인 삶을 페리클레스식으로, 즉 사람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삶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한없는 자유가 가능하게 하는 이 세상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시작하기’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 가야 할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개혁하고 또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1995년경 장소와 교수진과 교과과정까지 준비가 다 끝났을 때 얼 쇼리스 박사는 본격적으로 학생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약물중독자 재활센터를 찾았습니다. 이 센터는 뉴욕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지역인 사우스 브롱크스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서 코카인 중독증을 치료하던 여자 두 명을 설득했습니다. 그중 한 명인 카르멘은 교도소에서 10년을 보냈으며, 버나데트라는 다른 한 명은 거리의 성매매 여성이자 약물중독자였습니다. 몇몇 곳에서는 학생을 단 한 명도 모집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인문학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직업을 구해 주겠다거나, 돈을 벌게 해 주겠다거나, 혹은 대학 학점을 주겠다는 등의 약속 대신 인문학을 가르쳐 주고 수업에 쓸 책 몇 권을 주겠다는 약속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더 도어’라는 곳에 갔을 때 (그곳은 끼니를 해결하려고 도시 전역에서 몰려든 열여섯 살에서 스물 한 살까지의 젊은이들에게 저녁식사를 무료로 제공한 곳임), 실무진의 도움으로 그중 몇 명을 모아 작은 방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얼 쇼리스 박사는 “저는 여러분을 록펠러만큼 부자로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하자 록펠러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기에 다시 “빌 게이츠만큼이요”하고 덧붙였습니다. 이 말에 다들 웃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표정들이 진지해졌습니다. 그리고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1) 미술, 문학, 역사, 철학, 논리학 같은 것들로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2)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위대한 사상들을 접할 것이며 (3) 생각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 (4) 그 결과 여러분의 삶은 이런 것들로 풍성해져서 세상의 귀한 보배들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기관과 다른 몇 군데 기관을 통해 31명의 학생을 모집했습니다. 그중 몇 명은 전과자였고, 몇 명은 노숙인이었으며, 외국인 학생들도 네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클레멘트코스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학생들의 단순한 반응(reaction)에서 반성적 사고(reflection)의 단계로, 무력(force)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계에서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단계로 발전하였습니다. 졸업 후 학생들의 진로가 많은 경우 바뀌었습니다. 클레멘트코스에 와서 공부할 당시 노숙인을 위한 쉼터에서 살았던 한 친구는 강한 스페인어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를 쓰는데다 읽기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드대학에 진학해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고 합니다. 첫해에 코스를 수료한 학생 두 명은 치과의사가 됐습니다. 또한 다른 한 명은 간호사가 됐습니다. 10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던 한 여성은 쇼리스 박사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마약중독자 재활센터’에서 상담실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서맨사는 쇼리스 박사 부인의 충고에 따라 ‘패선기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또 첫해 수료생 가운데 또 다른 한 명은 영문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2006년에 벌써 전세계에서 4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 코스를 졸업하였습니다.(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거리의 인문학, 38-56)

그러나 인문학을 통한 자유와 변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인문학을 통해 힘과 자유를 얻어 정상적인 직업을 갖게 되고 시민으로 살아가다가 남보다 월등한 힘이 생기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도록 이끌어 갑니다. 이것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복음을 통해 변화되는 사람들은 변화의 폭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남에게 줄 것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두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입니다. 또한 인문학으로만 죄의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없으며, 더구나 인간의 삶에는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만 되지 않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고난과 사망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 문제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인문학은 또한 영생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