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이제 다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반역적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를 갈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왜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한단 말인가?”라고 말하곤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요한복음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고뇌하신 후에 군병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고 베드로가 방어하려 했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의지이며, 그분의 의지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복종하실 만큼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으며 그의 경외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그럴 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는 적극적이고 건설적이며 사랑에 찬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 하늘 아버지의 의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반역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여러분은 예수님이 “내 일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사역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내가 먹고 마실 것이다. 그것이 나를 만족케 하는 것이다. 나를 새롭게 하는 것은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비통한 고뇌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이 증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태도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큰 기쁨과 평안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통치, 곧 주되심 아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만큼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이란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부인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오늘은 직업과 소명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명은 오늘날에는 본래의 성경적 의미보다 훨씬 더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소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정중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한 사람들은 “저는 의사입니다” “저는 교사입니다” 또는 …입니다라”라는 대답을 예상합니다. 그러므로 소명 훈련은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직업을 위한 훈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명이란 단어의 성경적 의미가 아닙니다. 신약에서 ‘부른다’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칼레오(kaleo)’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최소한 150회 이상 사용됩니다. 때때로 그 단어는 세상적인 배경에서 사용되어 결혼식이나 잔치에 초대 받는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헤롯 왕이 현자들을 소환했을 때처럼 누군가를 소환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은 이러한 개념 둘 다를 포함 하는 것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은혜로운 잔치로의 초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 있는 소환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무언가를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되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따르면 소명이란 단순히 우리의 직업보다는 우리의 성품과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에 더 많이 관련되어 있습니다.그것은 중고등학교에서의 교육의 목적이 대학입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이 되기 위한 인성 교육이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훌륭한 의사는 불가능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6:22-23).

데오도르 로작의 명저 《반문화 만들기》는 서유럽 대학에서 학생 소요가 절정에 달한 직후인 1960년대 말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서유럽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입니다. 그런데 로작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상상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어휘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즉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리고는 “인간이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생은 우리가 어떤 직업적 능력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인간이 되는 것, 즉 온전하고 통합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 비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작의 이 말에는 실제로 경험되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전율할 정도로 방대한 실재를 고려한 인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훌륭한 그리스도인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훌륭한 인간이 되고나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훌륭한 의사가 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훌륭한 인간으로 되려고 애를 써야만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인간은 결코 자신이 하는 일을 떠나서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간 혹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은 주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의 자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2-33).   

우리의 기독교적 소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님은 7 가지로 이를 나누어 논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십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이 얼마나 놀라운 구절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해 말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나절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6)고 사도 바울은 쓰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사람을 부르셨을 때, 그분이 “나에게 오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복음서에 아주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그를 알라는 부르심이요, 그에게 속하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됨을 의미합니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이자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