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3.9일 오전 일찍 그리스의 네압볼리를 떠나 터어키로 건너왔습니다. 국경을 통과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트로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시가 넘었으므로 결국 트로이 목마를 보지 못하고 드로아 항구로 내려왔습니다. 드로아 항구는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을 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마게도냐 지역으로 전도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 지역이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흑해지역으로 나가던 바울의 일행을 그리스쪽으로 돌리신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하여주신 것이었습니다(AD 51년경). 또한 이 항구는 제3차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바울의 일행이 집결하여 드로아지역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행20장). 그리고 예배를 드리다가 3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청년 유두고를 살린 기적도 발생한 곳입니다 (AD58년경).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선교를 위한 항구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기록만 남긴 채 오늘날은 터어키의 땅으로 모슬렘 사원만이 가득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16:9-10).

3.10에서 3.11 이틀 동안은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라,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를 돌아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버가모 교회를 가보았습니다. 붉은 벽돌로 된 큰 교회가 들어섰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교회는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5세기경 지어진 것이며 거기서 주일예배겸 성찬예배를 드렸습니다. 버가모는 해발 300미터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마지배중 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된 총독부가 있을만큼 정치,행정의 중심지요 20만권의 장서를 가진 대규모 도서관이 있는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제우스 신의 생지라는 것과 연관되어 지어진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과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3개의 거대한 신당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곳은 사단의 위, 즉 사단이 득실거리는 곳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우상 숭배와 세속화 되어가는 도시 분위기 속에서 사단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선교의 소명을 받아 세워진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당할 때에도 믿음을 지킨 버가모 교인들을 칭찬하셨으나,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즉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면서 이 당시의 시류를 따르던 자들을 교인으로서 용납한 것에 대하여 책망을 하셨습니다. 결국 버가모 교회는 사라지고, 지금은 모슬렘들만이 가득한 도시의 한 복판에서 그 유적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붙들고 잘못된 시류에 대하여는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버가모 교회에 이어 곧 바로 두아디라 교회를 들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고대 리디아(Lydia) 지역에 있는 한 성읍으로서, 현 이즈미르(서머나)에서 북동쪽으로 약 82㎞, 베르가마(버가모)에서 동북동쪽으로 62㎞ 정도 떨어져 있으며, 현 도시는 ‘악히사르'(Akhisar)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두아디라는 B.C. 3세기 초엽 셀류코스 1세에 의해 초기 정착지에 다시 재건되었고, 염료 산업과 금속 세공술과 다른 업종들로 유명한 상업과 산업의 도시가 된 번영하는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그 곳은 버가모와 라오디게아를 잇는 로마 도로의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동업자들은 각각 신명을 바쳐 신에게 봉사하였고, 그 도시의 사회•정치적 생활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위치에 있었습니다. 한편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개종한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온 자색 옷감 장사였습니다(행 16 : 14).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에서(계 2 : 18-29), 주님은 그 도시의 금속 동업자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자신을 가리켜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18절)자라고 칭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을을 칭찬하셨지만, 그들 가운데 ‘이세벨’의 상징적 이름을 가진 여인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秘敎的)이고 문란한 의식을 용납하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결국 두아디라 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시내 한 복판에 유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2:26-28)

두아디라 교회에 이어 사도 요한의 제자요 순교자인 폴리캅이 주교를 한 서머나 교회를 들렸습니다. 폴리캅은 주후 70년 경에 태어나 주후155년경에 86세로 순교하신 분입니다. 물론 서머나 교회는 폴리캅이 주교를 하기 훨씬 이전에 설립되었고 요한 계시록에서 칭찬만을 받은 두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서머나는 에베소 다음가는 부유하고 번영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일찍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하고 살았는데 로마정부와 결탁하여 기독교인들의 피를 많이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박해 중에도 기독교인들은 신앙 고수에 더욱 충성하였기에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권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실로 인간의 눈에는 환난과 궁핍으로 비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눈에는 부요한 교회로서, 라오디게아 교회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또한 요한 계시록이 쓰여질 당시 큰 핍박이 예정된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감독이 된 폴리캅의 순교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가 공인된 AD313년까지 무려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핍박과 환난을 견디어 낸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지금은 이즈미르(서머나) 시내에 우뚝 서 있고 로마 카톨릭에서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유일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갔을 때는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종료되어 볼 수가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밖에 서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으며 요한 계시록의 말씀과 폴리캅의 순교로 알려진 서모나 교회의 충성스러운 신앙을 본받는 마음을 다지고 떠났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