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아버지를 거슬러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도 않으셨고, 반면에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들여 아버지께 흡수되기를 갈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계속 지닌 채 아버지께 복종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이 주인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의지의 반역이나 소멸이 아니라 의지의 자발적인 복종 가운데서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분은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지는 모든 권위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적의지에 흡수되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림으로써 자신에게 속박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서 참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 속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2).
한국과 터어키는 6시간 그리스는 7시간의 시차가 납니다(현지가 그 만큼 느림). 6일 아침(현지시간) 5시30분에 터키의 이스탐불에 도착하여8시20분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탔습니다. 9시30분에 아테네에 도착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아레오바고와 파르테논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보러 갔습니다. 아테네와 그 연접 도시들은 이 두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사도 행전17장에 등장하는 장소로서 사도 바울이 AD 52-3년경 데살로니가의 소동을 피하여 남쪽으로 약 300킬로 떨어진 아테네로 피신하였을 때 당시 아덴은 많은 우상이 있었습니다(가이드에 따르면 약3만개라고 합니다). 바울은 동료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아테네(사도행전에는 ‘아덴’)에 많은 우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까지 보자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어떻게 우상을 섬기는가 하면서 이야기하니 사람들이 바울을 붙잡아 가지고 그 도를 듣고자 간 곳이 바로 아레오바고입니다. 그 뜻은 신 ‘아레스의 언덕’이며, 전설에 따르면 바울은 중턱에서 모인 청중들에게 최후의 심판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비웃기도 하고 다음에 듣자고 하는 등 대부분은 도외시 하였으나 몇몇 사람은 받아들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후 바울은 거기서 서쪽으로 80여킬로 떨어진 고린도에 가서 1년 6개월을 지내면서 교회를 세웠고 아테네에 세워진 교회와 서로 교류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최초의 신자는 디오누시오로서 아레오바고 앞의 두 도로를 사도바울의 도로와 디오누시오의 도로라고 현재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1).
오늘은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90킬로미터 떨어진 고린도로 이동하여 사도 바울의 고린도 개척 당시의 정황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겐그레아 항구(소아시아로 가는 항구)와 레케온 항구(로마로 가는 항구) 두 개의 항구를 가지고 있는 상업으로 번영한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남자 자유민만 30만명이 거주하였다고 하니 노예나 여자 아이들을 감안하면 100만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은 뱃사람들이기에 각처에 식민지를 많이 만들었고 2년에 한 번 이스트미아 제전을 열어 전 세계에서 고린도로 몰려들도록 큰 축제를 거행하였습니다. 한편 고린도는 아가야 로마 총독부가 있었던 곳으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개척 당시 총독은 갈리오였습니다(1906년 델피비문 출토).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AD51-53 사이에 1년 6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천막업을 도우며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타 그리스 도시들과 같이 고린도 역시 물건을 사고 팔며, 재판을 진행하고, 목욕을 하는 등 시민들의 일상 생활이 영위되는 시장을 ‘아고라’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사진에 보는 아고라 광장에는 ‘비마’로 불려지는 재판과 연설을 위한 연단이 발굴되었으며, 거기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고소로 갈리오 총독의 재판을 받았습니다(행18:12-17). 그 비마 앞에 10개의 상가의 터가 발굴되었고 가운데 아취형의 상가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가죽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고라 위로 큰 산이 있고 거기에는 고린도의 아크로 폴리스가 있었으며, 사도 바울의 당시에는 1000명의 여사제(창녀임)가 있었던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 도시에 주님의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심히 떨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여 튼튼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 역시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행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