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25 – 3.1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은 무엇이 선하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길잡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은 우리의 지성에 의하여 검열을 받아야만 합니다. 좋은 예가 분노와 사랑과 관련된 것입니다. 분노에는 의로운 분노가 있고 불의한 분노가 있습니다. 의로운 분노에 대한 가장 좋은 본보기는 악에 대하여 하나님이 의로운 분노를 발하시는 경우입니다. 예수님도 완악한 바리새인들의 행태에 분노하셨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불의한 분노가 역시 있기 때문에 야고보서에서는 “사람이 분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분노의 경우 우리는 분노를 발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의 분노의 대부분의 경우는 불의한 분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에서 분노의 감정이 일 때,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여 이것이 ‘의로운 분노인가 불의한 분노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하기 전에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지성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4:26-27).
우리가 흔히 남녀 간에 생기는 사랑의 감정 역시 지성에 의해 검증되어야만 하는 감정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에는 사랑말고도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여러 개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에 빠진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인가, 헌신되고 성숙하며 장성한 그리스도인인가? 그 사람은 내 자녀들에게 훌륭한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될 것인가? 그 사람은 나의 훌륭한 동반자가 되겠는가? 육체적으로 끌리는데 또한 내가 존경할 만한가? 나와 성격은 맞으며 지적 적합성이 같은가? 사랑의 감정이 내부에서 치솟기 시작할 때 지성이 이런 질문들을 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은 신뢰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존 스토트 목사님이 개인 상담한 사례입니다. 한 번은 기혼자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내와 이혼해야겠습니다. 저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이 여자야말로 저에게 적합한 사람이거든요. 저도 그 여자에게 잘 어울립니다. 우리는 천생연분이에요. 제가 현재의 아내와 결혼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저는 새로 만난 이 여자를 몹시 사랑해요. 이것이 분명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아니오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예수님의 주권과 결혼, 이혼에 대한 가르침 아래 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성경은 어떤 점에서 두개의 동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동산은 에덴 동산인데 거기서 아담은 자기 창조주의 의지를 거슬러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둘째 아담인 예수는 자신의 의지를 그의 하늘 아버지의 의지에 복종시켰습니다. 물론 그 복종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동시에 사람의 아들(人子)인 예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의지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동적으로 반응하도록 설계된 컴퓨터가 아니며, 유전적인 본능에 의해 제한되는 단순한 동물도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지성과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반역하여 우리의 의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지에 아무생각 없이 흡수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복종의 관계를 이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관계를 논할 때 어떤 사람들은(심지어 일부 신학자들조차) 반역에 찬성하곤 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부모에게 독립하려는 것이 아이들의 성숙의 과정이듯,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또 독립을 꾀할 때에만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과, 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인간이 성인이 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자율을 선포하면서 주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죄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이것이 죄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율을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은 죄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창조주에게 반역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도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러석음을 범했으며, 오늘날의 우리도 똑 같은 죄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고뇌에 찬 주님의 기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와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히 배격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극단인 하나님의 의지에 흡수되어 내 존재가 사라지면 안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호6:6-7).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이상적인 관계는 반역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흡입되는 것 또한 이상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이것은 동양 신비주의 특징으로 인한 오류입니다. 힌두교도건 불교도건 동양의 신비주의자는 자신의 개체성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또 하나님- 신비주의자들은 ‘최고의 존재’ ‘실재’ ‘세계의 영혼’ 등으로 부르는데 명칭이야 무엇이든 건에 상관없습니다 – 에 대항하는 그 자신의 존재를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동양의 신비주의자는 열반에 몰입되고, 또 존재의 대해(大海) 속에 있는 물방울같이, 또는 태고의 불길 속에 있는 불꽃같이 동화되기 위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기를 갈망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기독교에도 신비주의가 있기는 합니다만, 동양의 신비주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명한 개체성을 창조 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존재 그대로, 나는 나 그대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성에 흡수되어 우리의 개체성을 상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의지의 관계는 반역도 아니고 일방적인 흡수도 아닙니다. 그것은 복종, 그것도 자발적인 복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