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 2. 18 – 22

복음 전도를 순전히 감정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복음 전도의 평판이 나빠진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적 복음 전도에 충실하려면, 사람들의 감정에는 물론 지성을 통하여 그들의 양심과 의지에도 호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지성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거듭해서, 사도들이 전도 집회를 가진 후에 많은 사람들이 “설득되었다”(개역개정은 “권함”, “권면”으로 번역됨. 행17:4; 18:4 등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 끝 무렵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만일 대학교에서 전도 집회를 연다면, 100명이 회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지, 100명이 설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성경적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논하였으며, 구약 성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추론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성경적 논증을 활용하는 데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였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논증과 성령님을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됨을 명심하고, 지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 3:15).

성령님은 성경적 논법을 사용하시며,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때때로 한 장소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습니다. 가장 극적인 예는 에베소에서 생긴 일입니다(사도행전 19장). 에베소에 도착한 지 석 달 후에 바울은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두란노 서원(짐작컨대 그곳은 세상의 일반적인 회관이었을 것임)을 빌려 거기서 2년 동안 매일 강의하였습니다. 어떤 사본에 따르면, 바울이 제5시부터 제10시까지, 즉 오전 11시부터 오후4시까지, 매일 5시간 강의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강의는 매일 5시간씩 2년에 걸쳐 행해진 것으로, 만약 바울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다면 복음을 논하는 데 3,120시간을 투자한 셈입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장날에 각기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에베소에 올라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을 보러, 어떤 사람은 정치가와 면담하러, 또 어떤 사람은 친척을 만나러 그곳에 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울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바울은 매일 5시간씩 강의를 했고, 사람들은 두란노 서원에 들러 회심했으며, 거듭나서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여기서 아시아는 터키 북쪽에 있는 로마의 아시아 주를 말하지 현재의 아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님).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8-10).

지성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우리의 증거는 강화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의 세 가지 논거는 우리의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지성의 영역에서도 주님이십니까? 이를 위해 우리의 영적 순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과 주는 단순히 그들이 현실 세계에 증거해야 하는 어떤 호칭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들의 선생이며 너희는 나의 제자들이다. 나는 너희들의 주이며 너희는 나의 종들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생이시라면 우리는 그에게 의견 차이를 주장할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불복종할 자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켰습니까? 여러분 여전히 그분에게 의견 차이를 주장할 자유를 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지성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권위로 구약을 인준하셨고, 또 사도들을 지명함으로써 신약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복종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확실히 드러내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우리가 지적으로 회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키지 않았다면, 지적으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 감정에 관해서도 같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통합된 그리스도인은 반지성적이지도, 반감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간을 합리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피조물로 만드셨다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고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으며, 인간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깊은 감정도 주셨습니다. 지성의 올바른 활용을 강조하고 반지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메마르고 무미건조하며 냉랭한, 비인간적인 지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추호도 그러한 지성주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남자답게 처신하라는 철학을 가진 영국 공립학교에서 자라나 감정을 억제하도록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립학교에 다닐 동안 회심하였고 그 뒤 신약성경을 읽었을 때, 예수님이 두 번이나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 속에 순전한 감정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감상주의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아닌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3-35).

성경적 신앙은 지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인, 즉 우리의 인간성 양쪽 부분을 모두 충족시키는 신앙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과 마찬가지로 감정 역시 타락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전적 부패 교리를 믿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전적 부패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는 모든 죄인이 악할 대로 악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믿는 사람 그 누구도 이렇게 배운 적이 없으며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악할 대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 부패가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부패의 전체성은 부패성의 정도를 언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패성의 범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 박사는 이를 잘 정리하였습니다. 그는“전적 부패란 모든 사람이 악할 대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해야 할 만큼 선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타락이 우리의 모든 부분, 우리의 지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양심, 우리의 성,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의 모든 부분은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을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