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인문학

누가복음 19:1 – 10

“희망의 인문학” 책의 저자인 얼 쇼리스는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청년들과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1995년 10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처음으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였습니다. 이들에게는 거짓말과 고백, 범죄, 임신이 다반사였으며 언제나 외로움이 붙어 다닌 자들이었습니다. 얼 박사는 이들의 가능성을 보고 그 점을 역설하였고 그들에게 희망을 팔았습니다. 실로 가난에 대처하기 위한 연방정부 지침서 같은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입주형 쉼터, 사회복지 관련 기관, 무료진료소, 임시 집단거처, 최저 임금 일자리, 마약중독 치료프로그램, 푸드 뱅크 시설이 있지만 이 기관들이 가난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시인하고 인정할 때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그들을 끄집어낼 정치적 대책이 전혀 없을 때 비로소 가난해지는 것임을 얼 박사는 깨달았습니다. 클레멘트 코스의 학생 선발 기준을 세울 때 바로 이 점을 중시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었고, 그런 삶을 누릴 공간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파에 떠밀려 워낙 심하게 치이며 살다 보니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그들이 14세기 때 이탈리아 그림을 알아야 할 이유나, 논리학을 배울 이유,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 부분의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클레멘트 코스가 시작되면서, 시, 예술, 철학, 논리학, 역사 등 다섯 과목을 순환적으로 돌아가면서 수업을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의 일부분, 파이돈에서 일부분 하여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결국 인문학은 학생들이 자기 안에 내재된 인간의 존엄성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고이들 또한 사랑을 통해서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들은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가 우리들의 의견에 귀기울여주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 좋은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데이비드 하웰이라는 학생은 1996년 1월 어느 토요일 오후에 얼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서로 간에 인사를 하고는 본론에 들어갔다.

““직장에 문제가 좀 생겼어요” “아 그래요?” 나는 나쁜 소식이 생겼다고 짐작했다. 데이비드는 덩치가 큰 사람으로 평소에는 유머스럽지만, 화를 좀 잘 낸다고 그의 어머니가 애기한 적이 있다. 그는 교실에서는 아주 훌륭한 학생 가운데 한 명이며, 꾸준한 학생이었다. 나이는 26살이었고 인문학을 매일 매일의 삶과 재미있게 연결시킬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알고 보니 자신의 직장에 함께 일하는 어떤 여자가 있는데 서로 간의 대화를 자신의 상사한테 가서 자신이 한 말을 일러 바쳤고, 상사가 그 문제로 자신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나이가 마흔 살이고 사회적응을 잘 못하였는데, 자신이 잘하니 은근히 자신을 시기하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쇼어스 씨, 얼마나 열이 받던지 그 여자를 벽에다가 내치고 싶었어요. 친구들한테 날 좀 진정시켜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때 나는 내 자신에게 ‘소크라테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물었어요.”

데이비드 하웰은 그 상황에 대해 심사숙고했고, 자신의 본능적인 반응과는 다른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이 클레멘트 코스 때문에 한 사람이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게 된 최초의 확실한 사례였으나, 그 후에 그런 수 많은 사례가 생겨났고, 인문학이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삭개오가 올라가 앉은 나무 밑을 지나가게 되셨습니다. 주님은 그 나무 밑에 이르러 멈추어서신 다음 위로 올려다 보시며, “삭개오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할 것이다” 말씀하시니 삭개오는 즐거워 하며 급히 내려 와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메시야로 알려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들 꺼려 하는 세리 장의 집까지 찾아 하루를 머무르시려는 그 은혜가 고마웠습니다. 집에 모셔들이고 대접하는 중에 사람들이 수근 거려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 하는 말이 드렸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예수님께 “주여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누구에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라고 결심을 밝혔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문학을 공부하여 인간을 이해한 후에 변하는 것과 질이 다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인됨과 그 죄인을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맛보고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 감사하여 삶 자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문학은 구원을 줄 수 없지만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