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2.11 – 15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 – 1630)는 우주를 연구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이에게는 더욱 합당한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을 쫓아 하나님의 생각을 사고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은 바로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의사소통되는 것은 우리의 지성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읽는 것입니다. 과학적 조사와 성경 연구 모두에서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이며, 또 우리의 합리성의 중요한 일부인 인간성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지성의 적절한 활용이야말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둘째, 지성의 적절한 활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여기 우리는 일반적인 교육, 예술, 문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울론 이러한 것들이 인간 생활을 매우 풍요롭게 해주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기독교와 관계된 지식과 성경을 통해 밝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성경 없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경우, 우리는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경배의 경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경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종해야 할 계명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습니다. 신뢰할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증거해야 할 좋은 소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약속, 명령, 그리고 좋은 소식의 계시는 모두가 성경 안에 있습니다. 성경과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온전한 생활이란, 그분이 신적 주도권을 갖고 하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7).

경배를 예를 들어 지성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전 존재를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의 지성 전체가 포함됩니다. 그러나 교회에 갈 때마다 머리를 의자 밑에 놓아 두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배드릴 때 자신의 머리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한 것은 일종의 감상적인 종교 감정이었습니다. 그는 지성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존 스토트 목사님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 대회 때의 일을 언급하면서 탄식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렐루야라는 말을 끝없이 읊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목사님은 자그마한 소리로 할렐루야라는 말만 20번가량 되풀이하는 노래를 상기하면서, 그것이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물론 할렐루야라는 말은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앞뒤 문맥 내에서만 노래해야만 합니다. 시에는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는 것도 많습니다만, 이 시들은 처음 할렐루야와 마지막 할렐루야 사이에 주님을 찬양하는 이유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주지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경배에서조차 지성이 제외된다면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할렐루야는 히브리어로 구약의 경우 시편에 23번 나오며 그 뜻은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특히 시편 146편에서 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고 있어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흔히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03편의 시작과 끝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인데 여기서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은 할렐루야를 풀어 쓴 것으로 같은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찬양할 만한 이유를 2-19절까지 계속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이렇게 찬양하는 많은 이유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유념하여야만 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냥 “할렐루야”라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구속자 하나님,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러한 시편들을 ‘할렐루야 샌드위치’라고 부르는데, 이 시편들의 처음과 끝에 할렐루야가 있고 그 사이에 교리라는 고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알고 나서 “할렐루야”를 외쳐야 합니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3:22).

불가지론자로서 기독교 비평가인 멘켄은 신앙의 정의를 내리기를 “신앙이란 간단히 말해서,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 일어나리라고 믿는 비논리적인 신념”이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잘못된 정의이자 신앙이 의미하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과 이성은 성경에서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신앙과 이성이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신앙과 이성을 결코 상충시키지 않습니다. 이 반면 성경은 신앙과 눈으로 보는 것을 대비시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은 현저하게 합리적입니다. 신앙은 경솔한 믿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또한 미신의 다른 표현도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신앙이란 합리적인 신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그분에 대한 합리적인 계시에 기초한 신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그가 신뢰할 만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뢰할 만한 것을 신뢰하는 것은 언제나 합리적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이유는 그분의 성품과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식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신앙 가운데 성숙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지식 가운데 자라나야 하며,이를 위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