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7-8
예전이나 지금이나 복음주의 기독교계에 생겨난 심상치 않은 동향들 중 하나는 반(反)지성주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하고도 심상치 않은 조짐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호주 멜버른 대학 출신의 한 학생이 스웨덴에서 개최된 수련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수련회장에서 그는 조국에 학생 소요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 학생은 당황하여 손을 쥐어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주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걸까?” 이 학생은 지식 없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조국에 돌아가 소요에 가담해야 한다고 결정하기 전에 소요의 전모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어야만 합니다. 성찰 없이 행동에 헌신하는 것은 광신주의이며, 헌신 없는 성찰은 모든 행동을 마비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찰과 헌신 둘 다이지, 성찰 없는 헌신이나 헌신 없는 성찰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20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는 잘 묵상해야만 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같은 구절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금하는 동시에 어린아이가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입니다. 악, 사악함 등에 대해서는 갓난아이처럼 무지하고 순결하고 미숙해야만 하나, 지성과 사고의 영역에서는 어른이 되어야만 합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
우리의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에 복종시키는 문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반지성주의적인 죄와 어리석음을 거부하고 겸손하게 사고의 성숙을 축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차례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지성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창조주는 합리적인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자신의 형상에 따라 합리적인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그것을 이해시킬 목적으로 자연과 성경을 통해 합리적인 계시를 주셨습니다. 모든 과학적 조사는 우주가 합리적이라는 신념에 기초를 둡니다. 과학적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가 조사하는 대상의 가해성(可解性)을 인식합니다. 즉, 조사자와 그가 조사하는 과학적 자료 사이에 이상한 유사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지성과 우주의 유사성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바로 합리성입니다. 합리적인 하나님은 우리를 합리적인 존재로 만드셨으며, 자연을 통해, 더 나아가 성경을 통해 합리적인 계시를 주셔서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