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21 – 25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네 번째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신 모습입니다. 그분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고”(히5:8)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복수하시는 대신 그분은 자신과 자신의 사정을 온 인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맡기셨고(벧전2:23),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불순종하라는 마귀의 무모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참고 마4:1-11). 이렇듯 그분의 삶과 사역은 시종일관 신뢰와 순종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신약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고, 원수를 사랑하셨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셨습니다. 겸손, 희생적인 섬김, 보복 없는 용서, 믿음과 순종,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나사렛 예수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니 이제 그것을 반사해야 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5-16).
고린도후서 3:18절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상반절에는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본다”고 되어 있고, 하반절에는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간다고 되어 있으며, 같은 동사가 변화 산에서 “변형되신” 예수님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동사의 현재진행형을 써서 “우리가 한 수준의 영광에서 다른 수준의 영광으로 변형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모습이 계속해서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없어졌고, 심지어 일시적으로 변형되신 예수님의 영광도 사라졌지만, 우리가 보고 그대로 변화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점점 그 정도가 더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여야만 우리는 교회의 여러 진영이 흔히 빠지는 양 극단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 양 극단은 완벽주의와 자포자기하는 모습인데,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완벽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형되고 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삶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성장은 정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거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마지막 변화의 순간이 올 때까지 마땅히 변화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점진적 “변형”이요, 점점 그분처럼 되어가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변화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바울은 계속해서 이것이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영광의 주님이 친히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에 의해 그분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주 예수님처럼 되게 하시는 분은 주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일을 성령님을 통해 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고린도 전서 3장 17- 18절은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역을 동일시 합니다: “주는 영이시니”(17절),“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절). 성화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꾸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는 다른 곳에서처럼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3장 3절에서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 그리스도의 편지에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을 견주어 말하고 있는데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도덕법을 쓰고 계신 것으로, 만인이 읽을 수 있는 추천장 같은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성령님의 활동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경과 경험을 통해 알듯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는 이기심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제임스 더럼이라는 17세기 작가는 1686년 간행한 《교활한 자아의 심각한 타락상을 일곱 편의 설교로 낱낱이 폭로한다》는 소책자에서 그것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원죄가 우리 모두를 그토록 교활하고 지독한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만들었기에, 단언컨데 우리는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의 노력으로는 그리스도 중심적 태도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에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자아가 자아를 몰아낼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사탄이 사탄을 몰아내기를 바라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저 겉으로만 예수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얄팍한 거룩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방식을 피상적으로 개조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깊은 성품의 변화를 원합니다. 그것은 본성의 변화에서 시작되어 철저한 행실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철두철미하고 깊이 있게 송두리째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또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윌리엄 템플은 당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거룩한 길을 이해시키고자 세익스피어와 예수님을 병치한 후에 어느 쪽을 흉내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내게 햄릿이나 리어 왕 같은 희곡을 주고 그런 희곡을 쓰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세익스피어는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다. 내게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을 보여 주고 그렇게 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재능이 내 속에 들어온다면, 나도 그처럼 희곡을 쓸 수 있다. 예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온다면, 나도 그분처럼 살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 힘으로는 분명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우리가 세익스피어의 천재성은 가질 수 없으나 예수님의 영은 지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거룩한 길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오셔서 사시는 것입니다. 요컨데 비밀은 ‘모방’(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함)이 아니라 ‘재생산’(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심)이다.우리는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볼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능력을 통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엡 5: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