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4/21-2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절간예배당
요한1서 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해방 후 소위 ‘재건파’ 교인들은 멀쩡한 예배당도 동방요배를 했다고 불태웠습니다. 하여, 이덕주 교수는 ‘절간’ 건물에서 예배 드리는 교인들의 심정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 적에 그거 생각할 겨를이 있었간디? 3백명 넘던 교인이 좁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그 배가 넘넌 넓은 공간을 얻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었제. 그리고 건물이 무슨 죄가 잇간디? 그 안에서 뭘 하느냐가 문제지…오히려 종교적으로 우리가 이긴 것 안것어?”(박성수장로). 그러나 목포중앙교회는 위기를 맞습니다. “1985년에 ‘절간’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느냐, 그대로 두고 옆에 새 건물을 짓느냐, 아예 건물을 팔고 다른 곳에서 새 건물을 짓느냐 하는 문제로 의견들이 팽팽혔제. 결국 새 건물을 짓자넌 교인들이 유달제일교회를 개척하고 나갔는디 그때 재력 있고 열심 있는 교인들이 많이 나가 타격이 컸지라.” 20년 후 절간 예배당의 ‘남은 자’들도 ‘아예 건물을 팔고’ 새 건물을 건축해 이전했습니다(옥암동, 2007). 성전 건축이란 부차적인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배처소로 인한 분리라면 세상과 똑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가운데 진리를 행하도록 가르침 받았습니다(엡4:15). 형제 사랑 보다 예수 사랑(진리)이 중요한 경우는 갈라서야 하겠지만, 예수 사랑(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한 쪽은 양보하여 형제 사랑을 성취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는 이런 부차적인 사건으로 숱하게 분열하였으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전도서 3:2절(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도자는 앞에서(1절) 모든 일에는 ‘기한과 때”가 있음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 주의를 환기하고, 2~8절은 7의 배수인 14쌍의 각각 반대되는 일들을 대조하여 그 섭리가 어떻게 인간의 모든 일 가운데서 작동하는지를 부각합니다. 7이란 숫자는 천지 창조나 속죄(레16:14)와도 관련되어, 완전성 내지 총체성을 보여주고, ‘둘’은 법정에서 증언을 확증하는 증인의 숫자로서 사실을 확정합니다(신17:6).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두 번 주심으로 풍년과 기근을 작정하셨음을 알려주신 것이 그 예입니다. 또한, 대조 구문은 히브리 시의 특징으로 7의 배수인 14쌍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의 완전성을 나타냅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든 사람을 강조하고, ‘바다와 땅’은 모든 피조 세계를 지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의 처음 두 쌍은 전체 생명 주기를 포괄합니다. 먼저, 인간의 생명 주기(태어남…죽음)를 기술합니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분의 뜻이 아니면 생명이 불가능하나, 생명이 떠나는 죽음의 주관자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시작부터 종결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결정 못하며 그 결정권을 지니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임은 불변의 진리입니다(삼상2:6). 따라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은 생명이 주어진 기간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여야 합니다. 솔로몬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것이 참된 선의 열매를 맺는 비법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전도서 3:2절(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말한 전단의 범위를 확대하여, 후단은 식물의 생사를 묘사합니다. 식물을 심고 뽑는 것은 인간의 일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한 과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때(계절 등)를 무시하고 심거나 뽑으면(감자 등)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행한다고 생각되는 사소한 일조차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줍니다. 상식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와 상황에 따른 삶의 지혜가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심고 뽑는다’는 말은 국가나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렘24:6;겔36:36). 이때 ‘심다’는 한 국가의 발흥을, ‘뽑다’는 멸망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하찮은 식물, 개인, 국가의 존폐를 포함하여, 만물이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사44:6)고 선포하십니다. 이는 역사의 주관자되심을 뜻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체가 없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4:24). 그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사 하나님 아버지를 자세히 설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1:18).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되셨고, 지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본문의 ‘뽑을 때’란 말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비밀 중의 비밀은 만유의 통치자, 재판장, 속죄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깨닫고 행하는 자마다 솔로몬 보다 나은 지혜자입니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시편119:10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메사 석비(하)
열왕기하 3:13절
“엘리사가….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 배반한 모압을 이스라엘(여호람), 유다(여호사밧), 에돔이 연합하여 치러 가던 중 물이 떨어지자, 선지자 엘리사에게 신탁을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아 엘리사는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면 물을 얻고 승리한다는 신탁을 줍니다. 연합군은 두루 개천을 팠고, 아침에 미쳐 에돔쪽에서 물이 흘러 와서 가득찼습니다. 기갈 해소는 물론 아침 햇빛으로 물이 붉게 보이자 분란이 생긴 것으로 오인한 모압은 공격하다 패퇴합니다. 절망에 빠진 메사는 장자를 죽여 그모스에게 바치자 연합군은 통분하여 철수합니다. 그러나, 메사 석비는 그모스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또한, 석비의 17행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땅에 ‘여호와의 화로’를 가지고 있었고 메사가 파괴하였다”는 어구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성경 외 자료로서,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여호와로 불렀음을 증거합니다. 31행은 다윗 가문을 언급한 “베이트 다비드”이란 문구가 있고, 최근에 발견된 텔 단 석비 역시 남왕국 유다 왕조를 “베이트 다비드”로 칭하였습니다. 성경 속 역사를 성경 외 자료가 뒷받침하는 중요한 발굴들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확실하고 하나님의 뜻과 활동을 명확히 증거하는 지혜의 보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들에 익숙하면, 믿음으로 사는 법과 온갖 선한 일에 능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 새번역)

(시험의 때)
신명기 8: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십계명)를 직접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의 시행세칙인 모세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율법)을 아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문제는, 그 율법이 돌에만 새겨진 문자냐, 아니면 내면에도 새겨졌는지 여부입니다. 그분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신 후 성서의 톤은 달라집니다. 전에는 불평과 반역적 행위를 꾸짖지 않고, 권면으로 끝났지만, 율법을 받은 후에는 책망과 벌을 내리십니다. 우상숭배자 3천명을 죽이시고(출32장), 불평하자 진 끝을 불사르고(디베라),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탐욕을 낸 자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민11장). 또한 모세를 질투한 미리암을 나병으로 치셨습니다(민12장). 불순종을 계속 경고하셨지만 깨닫지 못한 백성들은 결국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불순종하여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 많은 기적을 경험하나, 그 기적이 시험을 이길 믿음을 생산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을 간직하는지, 아니면, 돈, 출세, 자아실현, 기타의 욕망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지를 무척 알고 싶어하십니다(눅14:25-35). 그러나, 이기는 자에게는 칭찬과 함께 믿음의 선물을 주시므로, 항상 경건에 이르도록 힘쓰시길 바랍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

매일묵상(2025/4/14-18)

고난주간

종려주일과 월요일: 2025년 부활절은 4/20일입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구약의 유월절과의 관계 때문에 춘분(3/20-양력)이 지나고 첫 보름달 후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3/20일 후  첫 만월은 4/14일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은 4/20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가 고난주간입니다(4/13-19).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4/12),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4/13, 종려주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셨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시자(마21:1-11/ 슥9:9성취),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기적을 들은 군중들은 환호하였지만 주님은 당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시고 우셨습니다(눅19:41-44). 성전을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4/14) 아침 성전에 가다가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가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신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심판받을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등 정결케 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아침에 성전으로 가는 중,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묻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4)하시고, 형제를 용서해야 응답 받음을 교훈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왔습니다: “무슨 권위로 가르치는가?”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갖고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과 함께 와서 세금문제로 시험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지혜의 말씀을 듣자 침묵합니다.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한 모세율법을 따라,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예를 갖고 부활의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책망하신 뒤, 부활 시에는 결혼이 없는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가르침을 주십니다(막12:13-27).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하나 악인의 부활은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의인의 부활인 생명의 부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요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묻자, 주님은 즉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십니다(막12:28-34). 그 이상의 계명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질문하지 못하자, 오히려 주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고 백성들은 즐거워 하였습니다(막12:35-37). 주님은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또 자신들의 가르침조차 행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십니다(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웅장한 성전을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철저한 파괴를 선언하십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유월절 하루 전 주님은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의 축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러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의 경고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 후(요14:16,17,26;15:26;16:7-15), 모든 제자들(후에 믿을 신자들 포함)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립니다(요17장). 찬미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면서, 1시간 동안 피땀의 기도와 함께 통곡합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과 곤욕을 당합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수일 전 성전에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주님께 직접 힐문한 자들입니다.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주님은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임을 밝힙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시는데(마26:67-68), 베드로는 3번 부인하였습니다(눅22:54-62). 이 같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은 700년 전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사53: 7-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합니다: “네가 왕이냐?” 주님은 당신이 왕이나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당신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세상에 왔음을 밝힙니다(요18:36-37). 진리란 복음을 뜻하며, 복음온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으나, 주 예수께서 보냄을 받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이를 믿는 자는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죄가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는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입니다(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둠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12은 주님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인 것을 잘 설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5/4/7-1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마태복음 3: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목포중앙교회는 1923년에 시작되어, 성장을 거듭하다 1957년 일본 절 동본원사 건물과 대지를 5백만원에 구입, 50년 동안 예배드렸습니다. 목포 사람들은 “절간 예배당”으로 불렀는데, 구입일화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목포 남부교회와 정광사가 매매 합의에 거의 도달 하였을 때, 그 정보를 입수한 목포중앙교회는 웃돈을 주고 가로챘으며, 거절 당할 우려에 교회가 아니라 김요한 장로 2인 명의로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2007년 목포중앙교회는 ‘절간 예배당’을 매각하고 현 옥암동 새성전을 신축, 이전하였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절간 예배당’의 유래를 찾다가 보현정사 주지 정각 스님을 만났는데, 정각 스님은 1980년대 목사, 신부들과 지역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기독교에도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절간 건물 뿐 아니라 ‘문화재급’ 탱화와 부처상까지 팔아 사업 자금을 마련한 승려(등암 스님)의 소행을 비판하고, 이어 기독교에 대하여도 한 마디 하였습니다. “자유당 시절, 불교계 안에 대처승과 비구니 사이에 약간의 분쟁이 있었는디 그걸 빌미로 정부에서 법으로 불교계를 탄압하고 많은 불교 재산을 국가 재산으로 접수하였지라. 그때 기독교인들이 정부 권력을 앞세워 불교 재산을 솔찮게 가로챘는디 우리 불교계 원로들 중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도 섭섭허게 생각허는 분이 많지라. 언젠가는 밝혀야 헐 부분이제.” 한국 교회 현대사에서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대목입니다. 이웃의 계명은 원수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불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5:14) 

전도서 2:26절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본절 중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는 부분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의 통치자는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믿고,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도 시험에 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죄인의 유형은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악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불의의 재물과 권력을 잡고 으시대며 살아갑니다. 그들의 끝은 패망이란 사실은 상식입니다. 다만, 악인에 대한 심판이 신속히 집행되지 않는다면, 경건한 사람들은 그 박탈감을 견디어 내야만 합니다. 욥, 아삽, 요셉의 인내는 좋은 모범입니다. 욥은 극한 고난 끝에 깨달음과 축복된 결말이 주어졌고, 아삽은 성소에서 예배드릴 때 고난 당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시73편). 요셉은 고난 중에 지혜을 쌓고, 연마한 지혜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훌륭한 통치 업적을 남깁니다. 다음의 유형은 부지런하나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다”(딤후2:6)는 삶의 원리를 따라 부지런히 일하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없습니다. 부를 축적하면 선한 행위 보다는 자신의 창고를 넓히는데만 관심 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데려가시는 그 밤에, 그가 부지런히 모은 재물은 타인의 소유가 될 것이니 참으로 허망합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로서, 그는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는 부요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전도서 3:1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1:1-2:23절은 인생의 절대 허무를, 2:24-3:22절은 허무극복 방법을 제시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 2:24-26절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라는 교훈을, (2) 3:1-15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때와 시간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앞의 교훈을 뒤받침합니다. 즉, 솔로몬은 인간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밝히고(2:24), 본단락에서는 모든 일에 때와 기한이 있으며, 하나님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시고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가장 좋다는 충고입니다. ‘범사에’는 ‘모든 것’(everything)을 뜻하는 바,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심을 강조합니다. 이는 피조물로서 겸허함과 창조주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한’과 ‘때’가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데는 반드시 시간질서가 담겨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일’(천하 만사)과 ‘모든 소원’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집니다. 솔로몬은 이어지는 2-8절, 총 7개 절에서 28개의 중요한 인생사를 예시하고, 성취의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심을 교훈합니다. 주님 앞에 겸손히 살면서 그분이 이루어 주심을 믿고 기뻐하는 신뢰의 삶은 인생이 가야할 길입니다. 노인이 된 다윗 왕은 이 진리를 강조합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시편37:3-6,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메사 석비(상)
열왕기하 3:4절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듯이 모압의 신 그모스에 대하여 모압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메사 석비는 요르단 디반에서 출토되었는데(1868년), 성경 외에 가나안 땅의 역사를 기록한 석비로서 중요합니다. 재질은 현무암(높이 1m 너비 60-68cm)이고, 언어는 모압어로써,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모압 임금 메사가 임금이 되었을 때 그는 그모스 신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고 그모스 신은 당시 모압 땅 메드바를 차지하고 있던 오므리와 그의 아들을 부수리라는 약속을 하였다. 결국 메사는 그모스 신의 자비로 이스라엘과 싸워 이겼고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에돔을 땅에서 몰아냈다.” 열왕기하 3장은 그 전쟁의 배경을 말합니다. 북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죽자(BC 852) 모압은 배반합니다(왕하3:1-5). 이스라엘(여호람), 유다(여호사밧), 에돔이 연합하여 모압을 칠 때 곤경에 처하나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다급한 모압 왕 메사는 장자를 죽여 그모스에게 바쳤고, 연합군은 통탄하면서 회군합니다(3:27). 이때 석비는 메사가 이스라엘 칠천 군사를 죽였으며, 승리는 그모스의 도움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마치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이긴 다윗 왕에 대한 성경의 진술과 비슷합니다. 성경의 기록은 정확합니다. 아합의 이름은 앗수르 살만에셀 3세의 기념비에 나와 있고(BC853),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은 메사 석비가 확증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압 입장에서 기록하였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 책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완전한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딤후3:17,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 8: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내가 늙어 싸워 이길 수는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는 말을 남기고 69세의 나이에 청군과 싸워 장렬히 전사합니다. 기록에 보면 온 몸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처럼 되었다 합니다 그의 가문은 단번에 명문가로 발돋음 하였고, 12대에 걸친 만석의 부를 이어갈 정신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조상 최진립의 충군애국의 정신은 후손들의 마음에 떨어져 열매를 맺고, 그 후손들은 존경받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의의 열매를 못 맺겠습니까? 열매 맺는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뿌리를 둔 믿음이 자라서 아름다운 결실이 맺어지는 삶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갈렙의 예가 보여줍니다. 갈렙은 ‘네 발바닥으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민14:9)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45년 간 섬길 기회를 찾다가 드디어 잡았습니다. 유대지파가 추첨하여 받은 땅 중앙에 모두가 두려워 하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한 갈렙은 85세였지만 최진립과 달리 이들을 내쫓고 헤브론을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믿음의 열매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보물처럼 간직하여, 행동의 시기(희생의 시기)가 왔을 때 주저 없이 행동하고 말씀의 열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는 사랑이요, 믿음의 열매의 본질도 사랑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4,35)

매일묵상(2025/3/31-4/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요한복음13:36절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태평양 전쟁(1941년) 이후 일제는 ‘천황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3.1운동 당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룬 선생 박연세는, 목사가 되어 시무한 교회에서 신사참배 동참을 참회하던 중, ‘천황숭배’에 직면하자 박해를 각오합니다. ‘지나사변 5주년 기념일’을 지키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보고, 특별예배 때(1942.7.7) “성전(聖戰)이 아니라 약육강식일 뿐이다”고 선포하고, 주일예배 때(8/30)는 “육으로는 천황 폐하를 제일 존경할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존경의 대상이다.”는 설교를 하여, 천황을 ‘현인신’(顯人神)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교인 김동만, 전태균 등이 경찰당국에 알렸고 박연세 목사는 ‘불경죄’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1942.11.10). 당시 18세였던 딸 박지영 권사는 “그날 저녁상을 받으시구 몇 숫갈 뜨지 않으셨는디, 형사 서너 명이 들어와 아버님과 함께 서재로 들어가시드만요. 그리곤 얼마 있다가 나오셔서 ‘한복 좀 가져오시오’ 하시드만 한복을 입으시구 그들과 함께 나가시는디…”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직후 박연세 목사는 독방에서 ‘동사’(凍死)하였습니다(1944.2.15). 일제가 감방 마루 아래로 물을 흘려 보내 그 안에서 얼려죽였다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을 슬퍼할 필요는 없으나, 주님의 길을 따른 그분의 믿음과 애국심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전도서2:24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1:12-2:23절까지 하나님 없는 인생의 절대 허무와 절망감을 토로하나, 2:24-3:22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허무 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구체적으로, 2:24-26절은 일상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3:1-15절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세를, 3:16-22절은 하나님의 심판과 신실한 삶을 교훈합니다. 본절 전단은 축복 받은 삶의 모습을 ‘먹고 마시며 수고한다’로 표현합니다. ‘먹고 마시며’는 평화로운 일상의 삶을, ‘수고한다’는 노동의 과정과 결과를 통한 축복을 말합니다. 안락한 삶과 노동의 즐거움이란 표현은 1:12-2:23절에서 묘사된 비탄에 대한 부정입니다. 즉 인생의 매일이 괴로움이며 노동의 결과는 헛되고 그 자체는 큰 악이라고 소리친 전도자가 24절에 들어서서갑자기 긍정의 톤으로 바꾼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24절 후단에서 그 깨달음의 근거가 제시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내재돼 있던 긍정적인 측면이 부상하면서, 삶에는 통일성이 부여되고,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솔로몬은 이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은혜 받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저명한 곤충학자 최재천 박사는 인간을 단백질이 모여 만든 유기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삶의 의미나 목적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면서,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간지는 30년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간절히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만, 주님께 돌아가면 발견할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전도서2:25,26절
“25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24절은 최선의 삶은 일상의 책임을 다하는 중에 기쁨을 누리는 것이나,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25,26절은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증언합니다. 먼저,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5)는 구절은 “그분 없이 누가 먹고 즐길 수 있느냐”로도 번역됩니다. 전자는 솔로몬 자신이 최상의 희락을 누렸음을 상기시키면서 다음의 진술(26)에 권위를 부여하고, 후자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합니다. 문맥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에 후자가 타당합니다. 26절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는지에 대한 솔로몬의 관찰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지혜, 지식, 희락’인데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짐을 깨달았다는 언급입니다. 잠언에서 ‘지혜, 지식, 희락’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 그리고 기쁨이 근본을 형성합니다. 반면,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힘든 일을 주시고, 그 재산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목적은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을 떠나서 삶의 의미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헛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어진 삶에 책임을 다하고, 소망은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그모스와 몰렉
열왕기하 3:27절
“그래서 모압 왕은, 자기를 대신하여 왕이 될 장자를 죽여, 성벽 위에서 번제로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여, 그 곳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새번역)


오늘 본문은 비씨 840년경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에 포위된 모압 왕 메사가 신 그모스에게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며, 암몬 신 몰렉(몰록)의 제사관습과 같습니다. 그모스와 몰렉은 같은 신일까요? 학자들은 다투고 있습니다. 한 쪽은 구약성경은 그모스를 모압의 신으로, 몰렉을 암몬의 신으로 구별하여 부르므로 각각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쪽은, 메사 석비에 등장하는 모압 임금 메사의 아버지의 이름은 ‘케모쉬 멜렉’이며, 이는 ‘그모스는 임금이다’ 혹은 ‘그모스는 몰렉이다’로 읽힐 수 있어 그모스와 몰렉은 같은 신이라는 주장입니다.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같이 바른 성서 이해를 위해서도 고고학은 중요합니다. 그 석비는 메사가 전쟁 중에 여인들을 죽이지 않고 ‘아쉬타르-그모스’에게 헌정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쉬타르-그모스’는 여신이며 아세라(=아쉬타르)로 부르는 바알의 배우자이지만(가나안 지경), 모압 땅에서는 최고의 신 그모스의 배우자로 보는데, 우상이란 모두 인간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철저히 인간적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저주란, “철저히 하나님과 격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사 하나님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므로, 인간적인 모든 상상을 접고 주님의 계시를 붙잡아야 합니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신명기1:36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은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가 전심 전력으로 나를 따랐으므로 나는 그가 밟은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현대인의성경)
갈렙은 40년의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 전쟁 5년 동안 이 말씀을 간직하다가, 유다지파의 땅이 제비뽑기로 확정되자, 가장 정복하기 힘든 요새 헤브론(920미터)을 요구하였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주님께 순종하여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차지할 권리를 받았습니다. 85세의 갈렙은 왜 헤브론을 원했을까요? 2개가 떠오릅니다. (1)역사와 전통적 측면: 헤브론(‘연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미 700년 전 갈대아 우르에서 온 아브라함의 삶의 터전이었고,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 등 조상들의 매장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헤브론은 조상들이 이방인이었지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00년을 살아간 유서깊은 지역이었습니다. (2) 유다지파 화근의 제거(수14:15): 아낙자손은 거인 중에도 가장 키가 큰 자들로서, 45년 전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두려워 한 그 거인들이었습니다. 유다지파 존속에 관하여 큰 위협 요인이라, 만약 이들을 쫓아낸다면 유다지파의 땅을 보호하며, 자신의 후손들도 안전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지파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함께 여호수아 앞으로 나갔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정탐꾼일 때나 85세의 지금이나 장군으로서 섬길 자리를 찾았습니다. 자신의 권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를 위하여 가장 힘든 일을 맡아 완수해 낼 책임으로 해석한 그 믿음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