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3/24-2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요한복음13: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목포 양동교회의 저항과 수난 전통은 일제말기 박세연 목사님의 투옥과 순교로 이어집니다. 박목사님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군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바 있습니다. 출소 후 박연세 교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졸업하였고,이리 등에서 목회하다가 1926년 양동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10년 간 교회는 부흥하여, 죽동교회(1927년), 연동교회(1928년), 온금동교회(1929년), 중앙교회(1933년) 등이 분립 개척되었습니다. 일제말기가 다가오면서 후반 5년의 목회는 갈등과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 전남노회장으로 참석하여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의식임을 인식하고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 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 교회에 통지하여…”라고 ‘양심과 배치된’ 보고서를 제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동조하였습니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훼절한 민족주의자’와 ‘양심에 꺼림이 있는 목사’의 오명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신사참배에 이어 ‘천황숭배’를 강요하자, 조선독립을 바라는 민족주의자이며, 예수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박연세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에 인정 받을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집니다. 우리도 시험에 실패하였다고 좌절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또 한 번의 테스트를 보내실 때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이겨나가면 됩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12:12).    

전도서 2:22절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전도자는 18-21절에서 죽음 때문에 자신의 모든 수고의 결과를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수고 하지 않은 자에게 무조건 넘겨주어야 하는 삶의 부조리를 탄식합니다. 22-23절은 혹시라도 노동의 과정이나 삶의 과정이 주는 기쁨과 열매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은 의미가 있다는 질문에 답합니다. “무슨 소득이 있으랴?”의 직역은 “그 사람에게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 입니다.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란 그 수고가 단지 육체에 한정되지 않고, 마음의 고통도 수반함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자신의 분야에 어느 정도라도 성과를 내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생에 대충 대충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업적은커녕 최선을 다해도 생존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곧 패가망신입니다(잠18:9). 전도자의 삶은 달랐습니다. 지혜자인 그는 최선을 다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죽음이 임박하자 업적에 지나치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 온 자신의 잘못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때가 권력자와 부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지혜 그리고 업적을 무차별적으로 동일하게 만드는 절대 강자의 도구이며 의지의 표현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때 삶의 의미와 영생 모두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전도서2:23절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원문은 이유 접속사 ‘키’를 도입하여, 22절의 수사적 질문과 암묵적 답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일평생’이란 ‘그의 모든 날’의 의역이며,  ‘근심하며’는 속상하여 식음을 전폐한 한나와 같은 극심한 감정적 동요를 묘사합니다. 지금 전도자는 사람의 매일이 고통스럽고 일은 괴롭다는데, 부귀영화를 누리는 왕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통은 낮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 와도 여러 가지 걱정 근심, 재물에 대한 집착 등으로 마음에 쉼이 없으니, ‘아, 이것도 헛됩니다!’ 솔로몬이 이처럼 허무의 고백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 그의 인생관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솔로몬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우리야 사건이외에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관을 바른 믿음 위에 세웠기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따라서, 동일하게 수고하며 일생을 살아가도 허무하다고 외치는 솔로몬과 주님께 소망을 두고 감사하며 살아간 다윗은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과 성공 그 자체만 바라 보는 삶은, 그 모든 것을 얻어도 그림자를 붙잡는 것처럼 허무하지만(죽으면 모든 것이 타인의 소유임), 주님을 믿고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살아가면 점점 소망과 확신에 차게 됩니다. 실로 주님의 뜻을 행하면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요17:3).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신 그모스
신명기5:9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모압은 다윗에게 정복 당한 후 조공을 바치다가(150년 간) 왕 메사 때 벗어나지만, 모압의 문화와 신 그모스는 이스라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솔로몬은 모압 여인을 취하였고, 예루살렘 동쪽 어느 산봉우리(멸망산)에 그모스 신전을 세워주었습니다. 이 신전은 요시야 왕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300년 동안 존속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모스에게 제사 드린 장소입니다(왕하23:13). 가나안의 신 그모스는 주전2500-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에블라 문서에 가미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주전1400)와 예레미야서(주전600)에도 계속 등장하는 모압의 주요 신입니다(민21:29; 렘48:7,13). 성경은 모압을 그모스의 백성이라 부르지만(렘48:46), 그모스란 이름의 어원은 물론, 그 모습이나 종교적 역할도 어둠에 싸여 있습니다. 다만, 모압 땅에서 출토된 메사 석비가 그모스 신이 전쟁에 관여함을 보여주는데, 열왕기 3장 사건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제2계명(우상숭배금지)을 어긴 자에 대한 형벌을 말합니다. 우리의 우상이 멸망산에 있는 그모스처럼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벌이 집행될 것입니다. 속히 쳐부수어야 하지만 ‘탐심은 우상숭배다’(골3:5)라고 할 정도로 삶의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우상을 인간의 힘으로 깨뜨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직접 우리 우상-재산, 명예, 권력, 건강, 자녀, 지식 등-을 깨뜨리고 계심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5:10)
   
레위기18: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백성’은 출애굽의 목적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모세 율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도 그들 안에 하나님의 법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풍습을 따르던 백성의 삶은 모세율법을 받고 크게 달라집니다. 먼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의 왕입니다. 1년의 삶은 농축수 산업과 함께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등 하나님께 대한 예배 중심입니다. 결혼은 4촌이 넘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고, 모세의 부모는 고모와 조카 사이 였으나 근친혼은 금지되고 친척구제를 위해 고엘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도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임명하셨으니, ‘모세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6:2). 그리스도의 법이란, 일부일처 제도, 원칙적인 이혼금지, 정당한 정부의 권위에 순종 등 일반적인 명령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섬김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된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하는 자마다 자유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성취함으로, 모세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각 신자와 교회를 가르치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27권)은 주님의 뜻이 상세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기는 침례교인들은 “그 책의 사람”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매일묵상(2025/3/17-2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누가복음13:32절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분봉왕 헤롯)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은 통렬히 비판하나,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본절이 유일합니다. 국가와 신앙은 어떤 관계일까요? “ 목포 만세 운동(1919. 4. 8)은 이경필 목사, 곽우영 장로, 서상봉, 서화일……등 양동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정명여학교의 천귀례, 곽희주, 김나열, 박음전 등 학생들이 주도했다”고 전합니다. 이들 모두는 옥고를 치렀고, 서상봉은 시위 중 일본군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어 이듬해 별세, 목포 시민들은 사회장을 치루어 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아들(서광조)은 수년 전 체포되어 제주도에 유배 중이었고, 부인과 며느리도 만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학생 시위를 주도한 박상렬 삼형제는 모두 체포·고문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그가 양동교회 교인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태극기를 그리던 곳이지요!”- 기도실로 사용되는 양동교회 예배당 남서쪽 모퉁이의 지하실 방(10평)을 말합니다. 일제 말기 조선의 신자들은 페르샤 치하의 유대민족(에스더)을 조선에 비유하여(구약신학), 천황의 조선지배를 인정하나 천황 숭배는 거절하였습니다(신사참배 반대). 신약 성경은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모두의 주님이며, 그분에게 순종할 때 인간의 행복이 보장되며, 국가란 그 행복 보장의 수단임을 가르치고, 민주주의는 국가를 국민 행복추구의 수단으로 국민이 창설한 단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한계는 명확하고 국가의 권력은 그 한계 내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분은 세금도 잘 바쳐야 합니다. 당국자들은 이 일에 항상 힘쓰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롬13:6,현대인의성경)

전도서 2:19절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본절은 죽음이 자신의 모든 수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재산과 왕위를 계승할 자가 ‘지혜자냐 우매자냐’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자신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자신의 사후 발호할 공신세력을 염려하여 거의 모든 공신들을 숙청해버렸으나, 손자 건문제는 어리숙하여 조부의 유지를 승계하지 못합니다. 결국 연왕 주체(영락제)의 정난의 변으로 장자승계의 법은 깨지나, 죽은 주원장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죠! 솔로몬 때 전성을 이룬 다윗의 통일왕국도 믿아들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처신으로 분단되고 르호보암은 남왕국 유다만 통치합니다. 다만. 성경은 이 분단은 주님의 뜻이며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벌임을 밝히면서, 르호보암의 모친(나아마)이 암몬 여인(열상14:31)임을 특별히 부기하여 알려줍니다. “다윗의 신앙유산이 르호보암에게 이어졌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부자 삼대 가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재산을 이어받을 후손의 자질에 관해서는 주님의 주권이나, 그들에게 물려줄 신앙유산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생각할 점은 재산은 물려줄 수 있지만 신앙유산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앞의 신실한 삶과 함께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길이란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특권을 내포하며, 믿음과 이에 따른 고난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읍니다.”(빌1:29,공동번역)

전도서 2:20,21절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0,21절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삶의 부조리한 구조를 보고 깊이 탄식합니다. 20절의 직역입니다: “그래서 나는 돌이켜서 나의 마음속으로 절망하게 되었다.” 현실의 한계와 허무함, 죽음 앞에 무력함을 피력하고 있던 솔로몬은 이제 절망감까지 토로합니다. 그의 말에는 “아무리 수고해도 내 몫은 없으니 도대체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라는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21절은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로 시작하여 그 근거를 말합니다. 전단은, ‘지혜와 지식과 재주’라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여 인간의 모든 노력을 다한 사람을 등장시키고, 후단은 그렇게 이룩한 업적을 수고하지 않은 후계자에게 물려준다는 부조리를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어떤 노력도 인생을 의미 있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전도자 자신으로, 솔로몬은 인생은 무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큰 악’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세상의 삶에 너무 깊은 의미를 찾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데 힘을 쏟으라는 교훈입니다(전12:12-14).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는 예수께서 주님되심을 믿고, 둘은 그분이 명령한 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요일3:23).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에 비추어 구체화시킨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사람들」
출애굽기15:15절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찬양하는 대목 중 모압 관련 부분입니다. 1930년 모압 땅 아르(민21:28)로 추정되는 유적지 ‘발루’의 발굴 과정에서 주전 3000년경 초기청동기 시대의 흔적과 이집트 왕의 모습을 조각한 석비가 출토 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는 그 석비에 그려진 왕은 람세스 2세(주전1279-1213)로 주장합니다. 이는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이 있고, 거기에 새겨진 피정복 국가 중 모압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에돔, 암몬, 아람 그리고 앗수르를 잇는 ‘왕의 대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이집트의 모압 정복 이유는 경제적 측면만 보아도 명백합니다. 모압은 이 도로를 통해 석회석과 사해의 소금 그리고 향유를 수출했습니다. 또한 모압은 고원(900m)이라 안전하였고, 비록 덥지만 요단 강 서편(이스라엘) 땅보다는 기온은 낮고 강우량은 높아 곡물 재배, 포도밭, 과수원과 같은 농업과 양 떼의 사육에 적합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압 족속은 주어진 풍요와 평안을 신 그모스의 축복으로 생각하였는데 하나님의 계시(율법, 복음)가 없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술사 발람은 이스라엘의 축복의 근원이 야훼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 준수에 있음을 알고,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도록 모압 왕에게 계책을 줍니다. 이 죄들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사람들 만큼도 깨닫지 못하고 24000명이 죽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4:6). 

히브리서 4:2절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쁜 소식을 듣지 않았읍니까?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읍니다.”(공동번역)


본절의 배경은 민수기13,14장에 나오는 가나안 정탐사건입니다. 정탐꾼 12 명 중 10명은 땅은 좋으나 장대한 거인들 때문에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부정적 결론을, 갈렙과 여호수아 2명은 그곳 거민들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약속이 있으니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긍정적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수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도 믿음의 깨달음이 없던 백성들은 전자 편에 서서 통곡하다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지만, 믿음을 가진 갈렙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85세에 헤브론의 거인들을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믿음이 결부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뇌수술로 유명한 칼 암스트롱 박사는 동생의 약국에 들렀다가,  우연히 가난한 소녀 줄리엣의 남동생 앤드류의 딱한 사정을 들었습니다. 그는 1.11달러를 받고 앤드류의 뇌수술을 행하였다는 선행이 전해집니다. 이는 감동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현실 극복이나 믿음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신 주님의 기적 이야기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시면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겠다”(요14:14)는 약속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에게 우리의 문제들은 쉬운 일입니다. 갈렙 같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믿고 담대히 여러 문제와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


매일묵상(2025/3/10-14)


고린도전도7:21절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1900년대 초, 가난한 목포 교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장로와 한국인 목사를 세우고, 1백여 평 예배당을 마련한 데는 뜨거운 신앙과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증거는 예배당 서쪽 출입문입니다. 서쪽 출입문은 남자 교인들을 위한 문으로, 문 위쪽 반원형 아치 조각돌에는 행서체 한문 글씨로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와 같이, ‘隆’자와 ‘熙’자 사이에 한말에 유행했던 좌우대칭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것이 어떻게 해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안내하시는 목사님은 “그게 저도 신기합니다. 아마 지금은 뽑아낸 큰 등나무에 글씨가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출입이 많았던 동쪽 출입문(여자교인들용)은 같은 형태이지만 “쥬강성일쳔구백십년”이란 아홉 글자만 새겨져 있지 태극 문양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은 타당해 보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한 때는 1910년으로, 그 해부터 한일합병으로 인한 일제의 무단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돌에 새긴 ‘大韓’글씨와 태극 문양에 담긴 ‘독립 정신’의 의미는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독립정신입니다. 전자는 죄와 마귀의 지배를 이기는 능력이고, 후자는 일제의 지배를 극복하게 한 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지만, 현실에서 합법적으로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야 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전도서2:17절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본절은 지혜자도 죽음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지성은 물론 엄청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나, 그런 노력 끝에 지혜자가 되었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선악과를 따 먹고 지혜를 얻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스스로 영생하려는 인간에게 내리신 철퇴입니다. 전단은 전도자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싫어한다는 내용입니다. 후단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지혜와 업적을 오는 세대가 기억하지 못함을 직시하자, 모든 이생의 자랑이 괴로움으로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지푸스 신화의 시지푸스가 받은 괴로움 같습니다. 시지푸스의 일은 돌을 밀어 산 꼭대기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올려 놓은 돌은 굴러 떨어져 다시 올려야만 하니, 시지푸스의 괴로움은 영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상징하나, 고통을 끝내는 죽음이 없는 시지푸스와 다릅니다. 문제는, 죽은 다음에 오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전도서에는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하여 분명한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는 구절을 통해 사후 심판의 진리를 인식했다고 생각되기에, 세상과는 다른 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부인하는 세상이나 금생의 무의미를 탄식하는 전도자와 달리, 심판날에 있을 우리 행위에 대한 주님의 판단을 염려합니다. 따라서, 심판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축복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눅11:28,새번역)

전도서2:18절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본절에서 전도자는 상속자에게 모두 넘어가고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못하는 죽음을 생각해 보자자신의 모든 수고와 업적을 미워합니다. 잠언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5:2)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지혜를 창조세계에 숨기셨으므로, 인생이란 각자의 삶에 감추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45년 동안 활동한 개그맨 이경규 씨는 집에 들어 오면 모든 OTT를 흩어 보며 그날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들을 흩어보며 흐름을 파악하고, 실패한 것들을 살펴 통찰력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는 그간의 경험을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이란 책에 담아 펴냈습니다. 아마, 개그맨으로 사는 동안 느낀 것들을 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이경규 씨는 예능의 관점에서 노력하여 돈도 벌었지만, 희극 보다 놀라운 삶의 희극을 많이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경규씨는 그 깨달음과 함께 수고한 부를 그대로 남겨야만 합니다. 전도자 역시 왕의 권세와 지혜로 쌓은 부와 유산의 운명을 숙고한 후,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기고, 선을 행하라고 교훈합니다(전3:12,13). 지혜, 재물, 노력, 업적 등은 생전에는 유익이 있지만, 그 자체로는 오는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을 수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따라서,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자, 저는 자, 맹인, 몸 불편한 자를 청하라”(눅14:13)는 주님의 가르침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14: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사람들」
신명기2:9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모압의 영토는 사해 해변을 끼고(서쪽), 아르논 골짜기를 경계로 암몬과 나누고(북쪽), 세렛 시냇가를 사이에 두고 에돔과 대치하였습니다(남쪽). 모압에 관한 자료는 거의 구약 성경에 의존합니만, 디몬의 메사 석비는 성경 본문 이해(왕하 3장)에 매우 중요합니다. 모압 도시들의 이름은 이사야서에 여럿이 등장하나(사 15장, 16장), 디본과 헤스본이 대표적입니다. 디본은 모압 신 그모스의 신전이 있었고(사15:2), 헤스본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시혼으로부터 정복한 땅이지만 그 전에 모압의 소유였습니다. 모압어는 히브리어와 가장 유사하고, 모압과 이스라엘은 같은 혈통입니다.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가 모압 조상 롯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과 전쟁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데,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모압 족속에게 아르 땅을 배정하셨기 때문입니다(신2:9).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재 물, 명예, 권력 등을 배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직면하면 이 사건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모압은 술사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다가 실패하고, 끝내 미디안 여자들을 이용하여 타락시키자 하나님은 염병으로 백성들을 치셨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음행하는 남녀를 죽여 벌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시고(민25장), 그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하십니다(민25:13). 제자들의 삶이란 의로우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잠언16:7,새번역)

여호수아14:9절
“그래서 모세는 그 날 ‘네가 주 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으므로, 너의 발로 밟은 땅이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산이 될 것이다’ 하고 맹세하였습니다.”(새번역)

38년 동안 노예의 정체성을 가졌던 갈렙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자 거듭납니다. 야곱과 그 자손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간지 430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화 속에만 존재하셨으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10가지 재앙과 유월절 예식, 홍해와 광야의 이적들을 베푸신 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현현하셨습니다. 갈렙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고 이후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믿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유다지파나 하나님께 모두 충성스러웠으며, 그의 믿음은 가나안 정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정탐 내용을 보고하면서 10명은 불신앙에 서지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전쟁하자고 외쳐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민14:24). 갈렙은 믿음의 삶, 즉 하나님의 약속에 터잡아 사는 비결을 터득하였습니다. 45년 뒤 85세의 갈렙은 “나는 모세로부터 제비뽑기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땅을 소유할 약속을 받았다. 이제 난공불락의 요새 헤브론을 배정해 달라”고 담대히 요청합니다(수14:9). 갈렙과 같은 ‘믿음의 정체성’은 주님의 인정을 받을 때 생겨 나며, ‘금생과 내생’에 보상이 따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모든 것의 주님 되심을 배워가며, 이것이 영생의 핵심입니다(요17:3). 주일예배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는 방편입니다. 우리는 물론 자녀들의 예배참석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삼가 말씀을 따라 살면 행운의 열쇠를 얻고 야훼를 믿고 살면 행복의 문이 열린다.”(잠언16:20,공동번역)

매일묵상(2025/3/3-7)


열왕기상6:1-2절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480년이 지나고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가 되는 해 2월에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성전 규모는 길이가 27미터, 폭이 9미터, 높이가 13.5미터였으며”(현대인의성경)

남장로회 선교부는 복음의 열매를 보고 목포 선교부를 존치시켰습니다(1907). 오웬 선교사가 별세하자 담임 목사 프레스톤은 광주로 전출되었고, 대신 군산에서 활동하던 해리슨이 내려 왔습니다(1909). 같은 해 한국인 윤식명 목사가 부임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인들이 목사 생활비를 전담한다는 의미에서 ‘자립’의 실천이며 호남 최초입니다. 목포 교인들의 ‘자립’ 신앙 열기는 새 예배당 건축으로 연결됩니다. 1898년 최초의 예배당(한옥) 9평은, 1903년 18평으로 늘렸지만, 5백명의 교인을 수용하기에는 좁았습니다. 더구나 그 한옥 예배당은 남자 교인만 예배드렸고 여자 교인들은 영흥학교 교실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므로, ‘한 지붕 아래서 남녀가 함께’ 예배 드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해리슨 선교사의 보고입니다. “많은 기도와 의논을 거쳐 교인들은 62×36피트짜리 석조 예배당을 짓기로 결의하였는데 이곳 가난한 교인들 형편으론 버거운 계획이었습니다….많은 여인들이 은가락지와 비녀를 빼서 바쳤고…” 1년 후 유달산 돌로 지어진 1백평의 예배당은 솔로몬의 성전(74평) 보다 더 크고, 제사장만 들어갔던 솔로몬의 성전과 달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 2:5)

전도서2:15절
“혼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리석은 자가 당한 일을 나도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얻은 유익이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헛된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솔로몬은 본절에서 자신에게도 닥칠 죽음의 숙명 앞에서 자신의 지혜의 유익이 무엇인지 따져봅니다. 먼저, 솔로몬은 인생의 길을 잘 헤쳐나갈 지혜를 소유한 자신도, 어리석은 자와 동일한 결과, 즉 죽음을 피할 지혜의 부족을 토로합니다. 죽음이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동일하게 어리석다고 선언하는 것은, 둘 다 죽음을 이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무슨 유익을 주었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는, 이 세상에 속한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하여 권세, 명예, 재산 등을 얻게 하는데는 능력이 있으나, 영생을 주지 못하고 명성과 업적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세속적 지혜는 결코 이 세상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버리니, 세속적 지혜의 한계이며, ‘이것도 역시 헛되다’고 솔로몬은 탄식합니다. 세속의 지혜는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죽음을 오직 신체적 소멸현상만으로 이해하나, 그리스도인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신체적 죽음은 결정된 것이고, 이 세상도 없어질 것이나,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음을 알고 있습니다.(히9:27). 그들은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명성과 업적을 남기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오는 세상에서 주님께 칭찬 받을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를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자기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고전3:18,현대인의성경)

전도서2:16절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현대인의성경)

15절에서는 죽음 앞에서는 지혜마저도 의미 없다는 전도자의 깊은 탄식은, 본절에서 더 깊이 증폭되어 지혜뿐만 아니라 모든 활동이 무의하여,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참된 지혜자는 누구일까요?” 만유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죠! 16절의 전단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어, 15절의 내용, 즉 ‘죽음 앞에 지혜도 의미 없다’는 진술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어 다음 세대에게 둘다 잊혀지므로, 지혜도 의미없다는 뜻입니다. 후단은 전단의 내용을 재 진술하여,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려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군사천재 케샤르,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책사 제갈공명, 정관의 치의 당태종, 서성 왕휘지, 연개소문, 태종 무열왕 등은 모두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들은 자기 시대에는 굉장하였으나 지금은 영향력도 없고 기억받지도 못합니다. 아마, 수십 억년이 지나 태양계조차 사라지면, 지구와 거기에서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문명은 잊혀지고, 그 후의 세대는 우주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것입니다. 하물며, 영원한 부활의 나라가 도래할 때 누가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 뿐입니다(요일2:17).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카르타고의 도벳
예레미야 7:31절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몰렉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도벳 사당이라 부르는데 , 유다 왕 요시야의 종교개혁(BC620) 후에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도벳의 예가 발견된 바는 없습니다. 도벳의 대표적인 모습과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관습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카르타고는 주전 9세기경부터 베니게의 식민지였기에 가나안의 문화가 침투된 곳이며, 바알 함몬과 그의 배우자 타닛이 주신입니다. 카르타고의 공동묘지는 큰 고고학적 성과로서, 50년 간(1920-70) 발굴되었습니다. 공동묘지는 주전 8세기부터 로마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BC146넌) 사용되었고, 그리스의 문헌에 등장하는 카르타고의 종교적 관습을 확인시켰습니다. 무덤에는 영아 시신을 화장하여 담은 작고 붉은 항아리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인들은 희생제물로 아이들을 바쳤는데,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희생제물로 바칠 아이들을 따로 키웠다고 합니다. 전쟁과 같은 위급한 시기에 이렇게 키운 200명의 아이들이 바쳐지기도 하였으며 제사하는 동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실제로 북이 연주되었습니다. 이방 카르타고는 별론으로 하고, 율법을 가진 유다백성들은 인신제사의 범죄를 왜 저질렀겠습니까? 두려움, 기근, 전쟁과 전염병 등의 절박한 사정을 아이들을 바쳐 신의 도움을 받으라는 귀신의 미혹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군사를 포함한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는 자마다 자유함을 받습니다(요8:31,3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히브리서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새번역)

정체성의 형성과정 중 ‘타인의 인정’이란 요소는 청소년기에 특히 중요합니다(인정철학).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가 어릴 때입니다. 복사로 신부를 도와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실수로 포도주를 흘리자 신부가 화를 내고 빰을 때리며 ‘당장 나가 다시는 성당에 나타나지 마라’는 말에, 티토(1892-1980)는 울며 성당을 나갔고,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카톨릭을 탄압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폴튼 쉰(1895-1979)은 동일한 실수를 하였지만, 신부는 부드럽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단다. 너는 언젠가 좋은 사제가 될 거야.’하며 위로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훌륭한 미국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칭찬이 중요합니다. 자녀를 보물로 여기면 칭찬은 자연히 나옵니다. 어느 스님이 시주를 위해 한 집에 들어 가자, 그 집 어린 아들은 부모에게 매맞고 울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갑자기 그 아이 앞에서 절하고 일어난 뒤, 놀란 부모에게 “이 아이는 장차 정승이 될 것이니 소중히 잘 기르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후 부모는 아이를 귀히 여기고 양육하였고 후일 그는 정승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스님을 찾아 물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님의 말입니다: ‘세상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귀히 여기면 귀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알아맞추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남의 인정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자신을 인정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중요한 믿음의 정체성 형성의 기회가 있는데, 신실한 믿음의 삶을 통해 받는 주님의 인정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2,현대인의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