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20-2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사도행전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목포는 이별과 한과 눈물과 설움이 스며든 땅이다. 영산강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곳, 예로부터 고기 잡고 장사하는 뱃사람들의 터전이었기에, 억양이 높고 발음이 강하다. 목포 사람들은 대개 남쪽섬에서 올라와 정착했거나,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많다. 조선 시대에는 목포와 그 남쪽 진도, 무안, 신안, 해남, 강진 땅은 유배지로서, 양반 귀족들의 후손들이 많다. ‘양반 의식’과 ‘정치적 한’이 묘하게 어울려 자존심과 저항을 담은 민중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이덕주, 15,16 요약). ‘나그네 땅’ 목포의 특질을 보여줍니다. 목포는 나주 보다 쉽게 복음을 받아들여서, 복음은 선교사 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남장로교 선교사 에리놀즈와 드루가 선교 지역 탐색 차 전라도의 여러 지역을 거쳐 1894년 4월 18일 목포에 도착 후, 선창가에서 전도할 때 “서울 남대문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되었다”는 목포 사람을 만난 기록이 그것입니다. 뱃길을 따라 들어온 것이죠! 그럼에도 선교사들이 목포에 정착하는 과정은 복잡했습니다. 개항장 선정 결정의 지연도 그 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지역적 특색과 떨어져 수용되거나 전파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실례입니다. 주님이 갈릴리 지역을 주로 전도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방인과 섞여 살고 오랜 역사를 거쳐 자주 침략을 당한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 보다 복음의 수용도가 높았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기도와 함께 지역에 관해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전도서2:5절
“나는 정원과 과수원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과일나무도 심어 보았다.”(새번역)

본절은 4절에 이어 솔로몬의 구체적 사업의 면모를 기술합니다. ‘정원’의 원어 ‘깐노트’는 담이나 울타리를 둘러 외부로부터 보호, 격리된 뜰을 의미합니다. ‘과수원’의 원어 ‘파르떼스’는 열매 맺는 과수와 귀한 식물들이 있는 큰 공원 단지를 지칭합니다. ‘정원과 과수원’ 단지를 만든 목적은 솔로몬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습니다. 솔로몬은 그것들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어’ 경제적 유익을 거두면서도, 각종 꽃나무와 향나무를 갖추어 매우 아릅답고, 솔로몬의 창의성이 돋보였을 것입니다. 유홍준 박사는 정원의 돌을 놓는 법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질서의 일본인들은 10 개의 돌 중 9개는 반듯하고, 1개만 자연스럽게 놓고, 개성의 한국인들은 1개만 반듯하고 9개를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민족성이 드러나 있다.” 왕 솔로몬과 함께 그곳을 거닐었을 사람들(처첩들, 신하들)의 기쁨과 탄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후단의 ‘온갖 과일나무’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창2:9), 인간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였음을 뜻힙니다. 예로부터 왕들과 부자들은 좋은 정원을 조성코자 하였기에, 이 같은 정원을 만든 사람은 솔로몬뿐 아닙니다. 고 구본무 회장도 화담숲을 조성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습니다. 자연생태계도 보존하고 시민들은 휴식을 누리게 되어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행한 것이라 보이지만,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다면 이런 것조차 허망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2:11).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전도서2:6절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삼림’이란 ‘야아르’의 번역이며, ‘기름지고 무성한 삼림’을 의미합니다. ‘나무들’을 뜻하는 수목은 각종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과 여러 귀한 수목들을 포함합니다(5). 제가 20년 전 미국에 거주할 때 미국의 집들은 통상 과일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마트에 맛 있는 과일이 많았으며, 과일은 익어도 수확이 곤란하며, 새와 벌레들이 모이고 잔디에 뗠어지면 썩어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입니다. 풍부한 미국인의 삶을 드러내는 일면이나, 팔레스틴 지역 특히 고대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각종 과목은 전쟁 시에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고(신20:19,20), 모세 또한 가나안 땅을 탐지시킬 때 토지의 비옥과 메마른 나무의 유무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지금의 산업 사외와 달리 농경 사회에는 토지의 후박, 수목의 유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민13:20). 비옥한 토지, 울창한 삼림, 풍성한 열매 등은 물을 요구하는데, 공급처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팔레스틴에서 철 따라 내리는 비는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 준수와 비의 축복을 결부시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도록 장치하셨습니다(레26:4). 비가 순종에 의존하자, 솔로몬은 못들을 파서 자신의 삼림들에 항시 물을 공급해 무성하게 만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지혜이나, 인간의 성공이 하나님을 떠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그렇게 미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제자들은 모든 스승 보다 명철합니다(시119:99).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두라 유로포스 유적지」
사도행전 9: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주후 1세기 경 다메섹에는 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살았고 회당과 교회는 공존하였습니다. 비록다메섹과의 거리는 멀지만 시리아 국경 지역에서 발굴된 ‘두라 유로포스’가 그 증거입니다. ‘두라 유라포스’는 AD257년 사산 왕국에 의해 폐허가 되어 약 1700년 간 잊혀졌으나(AD257), 1920년 참호를 파던 영국군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유적들이 발굴되었으나, 주후 2세기 경 건축된 회당과 교회의 유적이 중요합니다. 회당과 교회는 모두 진흙 벽돌로 지은 가정집을 종교 건물로 개조한 것입니다. 벽면들은 성경 이야기와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로 가득했으며, 거리도 가깝고 건축 구조도 유사합니다. 차이 점이라면, 벽화의 내용입니다. 회당 벽화는 아브라함, 모세, 출애굽, 예루살렘 성전, 에스더서 등을 표현하였지만, 교회 벽화는 예수의 기적이 주요 주제였습니다. 이 교회는 발굴된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초대 가정교회의 시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라 유라포스’는 박해자 바울의 회심과 그로 인한 복음이 시리아에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은 회심 후 3년을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전도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만 만난 뒤, 길리기아 다소 성으로 되돌아 갑니다(갈1:15-21;행9:23-30). 바울은 바리새인이요 랍비로서, 이미 구약에 정통한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였고 이방 선교를 개척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1:22-24)

에베소서 4: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선과 화평을 만들어 내는 노동자”입니다. 목적은 화평한 의요, 방법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약3:17). 노동자(일꾼, 품꾼)는 일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일과 보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일은 영적이며,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증거’를 지킴이 그 핵심입니다(계14:12). 도성인신 하신 그리스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일의 방식은 세상과 뚜렷히 구분됩니다. 세상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잘못을 숨기고자 하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행을 숨기고, 잘못은 고백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관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세상은 창조주를 부인하니 인생을 명예, 재산, 권력 등 육신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만물의 주관자를 믿고 알기 때문에, 던져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보상 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미 영생을 갖고 있습니다(요5:24), 보상은 하나, 주님의 칭찬입니다(마25:23).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 가족, 친구, 사업 등에 때때로 불이익을 당하곤 하지만 낙망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과 도우심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자들입니다(마6:11).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란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5:5)

매일묵상(2025/1/13-17)


마태복음 5: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빅터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입니다. 그는 걸을 때마다 발에 가해지는 심한 통증으로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수 킬로 떨어진 작업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작업량은 많았으며 배급 식량은 적었습니다. 프랭클은 “오늘 밤 무엇을 먹게 될까?” “아껴둔 담배 한 개비로 스푸와 바꿀까?” “다른 작업반에 끼게 되었다가 짐승 같은 감독이 있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갇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억지로 돌려 자신이 불이 환히 켜지고 아늑한 강의실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의하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먼 관점에서 보고 말하게 되었고, 그 자신과 그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흥미로운 정신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정신분석학자로서 수용소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세상을 볼 때의 과정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열매 맺을 때까지 믿음으로 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주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믿음을 갖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5:5). 애굽 시위대장에게 종으로 팔린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물음을 이끌고, 그 물음은 소망과 신실한 삶을 낳습니다. 빅터 프랭클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으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요15:9).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전도서2:4절(1)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전도자는 지혜와 쾌락 추구의 조화를 시도하다 무의미를 발견하고(3), 본절부터 “성공을 쫓는 삶”을 묘사하며 그 얻은 결과(허무함)를 토로합니다(4-11). 인생이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도외시 하면 율법의 목적인 ‘이웃 사랑’이 성취되지 못하고, 이것은 더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이루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쫒는 삶’ 즉, ‘자아 실현의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장 고상하게 여깁니다. 전도자 역시 쾌락 다음에 시도한 삶이었으나, 큰 성공도 헛됨을 체험합니다(2:11). 솔로몬은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는 고백으로 4절을 시작합니다. ‘크게 하였노라’는 대목은 왕 솔로몬이 자신의 의지를 갖고 노력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크게 일으켰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대표적인 사업은 집들, 포도원, 여러 동산과 과원, 각종 과목을 심고, 못들을 파고, 남녀종들을 얻고, 은금을 축적하고,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들을 많이 둠으로써, 자신의 부, 존귀, 권세를 과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를 위하여”가 여러 번 반복됨으로 “하나님을 위한”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방법 또한 정당해서 자기를 중시 하는 세상적 관점에서는 책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하는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개인주의적인 성공을 추진하고 성취하였으나, 자신조차 참된 만족과 의미를 얻지 못하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전도서2:4절(2)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솔로몬은 왕궁, 바로의 딸을 위한 건물, 그 밖의 많은 건축물을 지었는데(왕상7:1-8), 스바 여왕의넋을 뺏았을 정도였습니다(왕상10:4,5). 솔로몬은 국고성, 병거성, 마병성 등도 건축하는 등, 계획한 모든 것을 남김 없이 다 건축하였지만(대하8:3-6), 그의 성공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중한 노역이 있었음을 볼 때, 솔로몬의 건축 사업은 지나쳤습니다. 결국 ‘중한 노역’은 솔로몬 사후 왕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포도원을 일구며’란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 농업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은 먼저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며, 잡목이나 돌로 울타리를 만들며,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짓고, 포도주틀을 만드는 작업 등이 포함됩니다. 대략 10년이 걸리니 쉬운 일은 아니나, 중요한 산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포도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여 왔습니다(왕상21:3). 왕 아합 시대의 나봇도 애써 좋은 포도원을 가꾸었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탐욕 때문에 죽게 됩니다. 포도원으로 상징되는 재물과 번영은 좋은 것이나, 나봇과 그 가족의 목숨을 가져갔으니 헛되다 하겠습니다. 솔로몬도 포도원 사업을 성공시켰지만 자신을 위해 만든 많은 포도원들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필요를 넘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죠! 모든 사람은 삶의 기반을 닦아야 하나 그 당위성이 탐욕으로 이끄는 것을 보면 멈추어야 합니다. 탐욕은 달성되어도 삶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은 우리의 경제적 삶에 많은 가르침을 준다 하겠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전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18:23절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아람의 신들 중 ‘하다드’는 구약 시대에 근동지역에 바알처럼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윗과 싸웠던 아람 소바의 임금 하닷에셀(하다드는 도움)이나 아합을 괴롭힌 아람 임금 벤하닷(하다드의 아들)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초기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의 신들을 섬겼습니다(삿10:6). 고대 근동 지역은 농업사회이므로 비의 신은 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다드는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일반적으로 한 손에는 번개, 다른 손에는 철퇴를 갖고 있으나, 황소의 형상도 자주 발견됩니다. 당시 신화를 보면, 최고의 신이 된 하다드는 바다의 신 얌(yam)을 이겼으나, 죽음의 신 못(mot)에게 죽자 온 세상은 메마르게 되고, 결국 그를 되살립니다. 아람 사람들은 하다드가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여름이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비가 오는 겨울이라 믿었습니다. 시돈과 두로 지역에서는 바알을 비의 신으로 숭배하였기에 하다드와 바알을 동일하게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주님은 바알 곧 하다드에게 제사 지냈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수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 형벌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누가 비를 내리는 신인가를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내기를 하였고, 바알 곧 하다드 신의 제사장들과 겨루어 이겼습니다(왕상18장).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전쟁, 영적인 전쟁터로 부르심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과 다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힘써 기도하고 노력해야만 하나, 성령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느헤미야 13:31절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1979. 12.12 사태는 신군부가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킨 사건이며,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은 고인이 되었으나 역사의 평가는 엄중합니다. 비시 444년 느헤미야는 페르샤 황제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신군부와는 절차와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그는 페르샤 왕의 술관원으로 봉직하다가 유대 땅에 일어난 비참한 사건들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간구하는 중 응답받아, 적법하게 유대 총독으로 부임합니다(적법절차). 총독으로 부임 후 많은 반대에 직면하나, 짧은 시일 내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예루살렘의 치안은 물론,  모세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확립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였고, 토지도 사지 않고(no 축재), 총독의 녹도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식탁에는 매일 150명이 넘는 많은 동족을 초빙하여 위로하고 민정에 신경을 썼습니다. 경천애인,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의 속마음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상을 욕망하였습니다(13:22절과, 13:31).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소원이 자발적 희생으로 이끈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그 맡은 임무를 다한 느헤미야의 선행을 드러내시고 칭찬하시며 영생으로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 뿐만 아니라 주를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받을 보상이며, 생명의 부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매일묵상(2025/1/6-10)


고린도전서15: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엘리자베스 로스는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로스 의사는 몇 해 전 병원에서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얼굴이 매우 밝아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주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중환자실에 갈 때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담당 의사인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복도에서 청소하는 그 아주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도대체 내 환자들에게 어떻게 하는 거죠?” “그냥 병실을 청소할 뿐이에요” 그 말을 들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이유를 몰랐으나, 3주 정도 지나 깨닫게 됩니다. 그 아주머니는 몇 해 전 여섯 아이 중 하나를 잃었습니다. 응급실로 가서 의사가 오기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폐렴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가끔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면 환자들이 몹씨 겁에 질려 있어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다가가 그들을 쓰다듬으면서 나도 죽음을 보았는데 죽음이 다가와도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냥 함께 있어 줍니다…. 그것이 사랑이지요” 그러면서 로스는 사랑이란 바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며 돌보아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로스는 비그리스도인입니다만, 호스피스 환자들과 같은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인간이 그 이상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으면 영생이 있음과 그 영생이 우리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아무리 지혜자라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 특히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전달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전도서 2: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1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2절은 그 ‘쾌락’를 ‘웃음’과 ‘희락(=쾌락)’으로 나눈 뒤, 전자는 ‘미친 것’으로 후자는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웃음’과 ‘희락(=쾌락)’이란 두 단어는 성경에서 교차해 사용되나, ‘웃음’은 피상적인 기쁨을, ‘희락’은 좀 더 진지한 기쁨을 표시합니다. 이같은 뉘앙스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나 즐거움은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취지를 말합니다. 잠언은 ‘웃음’과 ‘희락’의 추구가 종종 ‘슬픔’과 ‘근심’을 숨기기 위함임을 지적합니다(잠언14:13). 게임, 술, 마약, 도박에 빠져 사는 현실도피의 삶이죠! 따라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그 삶에 있는지 파악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전도자의 충고를 따르려면 웃음과 쾌락 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직업을 갖고 우리 손으로 수고한 만큼 벌고 그 한도에서 살려는 태도입니다. 경건한 삶의 기초가 여기 있습니다. 경건한 삶에도 당연히 즐거움과 웃음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웃을 때가 있다’(3:4)고 선언합니다. 다만, 바보와 현자의 경우, 웃고 즐거워 하는 시기와 대상에서 차이가 납니다. 바보는 악을 행함으로(부정축채, 더러운 농담 등), 현자는 지혜(선행과 덕을 세움 등)를 행함으로 웃고 즐거워 합니다(잠10:23).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웃음과 쾌락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전도서2:3절(새번역)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도자는 삶의 의미 혹은 유익의 원천으로써 쾌락(즐거움)을 구체적으로 탐구합니다. 시작은 가장 감각적인 것, 즉 술입니다. 전도자는 짧은 인생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지 방탕에 몰입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툼이 있으나, 술과 관련한 실험에서 전도자는 품위를 유지하였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그래서, 루폴드는 “전도자는 술을 방탕한 자가 아니라 감정가로서 탐구했다”고 강조하는데, 근거는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개정개혁)라는 부분입니다.” 다만,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개정개역)라는 표현을 보아 전도자가 술중독은 아니지만, 술에 자신을 맡겨 본 경험은 가져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잠언은 ‘어리석음’을 지혜의 반대로, 전도서에서는 ‘악함’(7:25)의 동의어로 파악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세상이 정의하는 쾌락을 탐구하고, 그것이 실제로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지 보려고 술잔의 바닥까지 비어 본 것입니다. 물론, 그 실험은 무의미로 귀결됩니다. 인생이 짧기 때문에 삶에 대한 세상의 답은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즐거움의 상징인 ‘술’에 대한 탐익은 ‘절제’를 요구하시는 성령님의 뜻에 거역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 하고,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성령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5:18,새번역).

사도행전13:1절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의 지도층은 출신과 지역이 서로 다른 5명입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출신 레위인이고, 시므온은 흑인인데, 그의 별명이 ‘니게르’(라틴어 ‘검다’)이기 때문입니다. 루기오는 북아프리카(현 리비아 지역) 출신의 로마인으로 보이고, 마나엔은 헤롯 안티파스 분봉왕과 함께 자란 인물로 높은 지위의 귀족입니다. 사울은 튀르키에 남서쪽 다소라는 큰 도시 출신의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방 선교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성령께서 이들 중 바나바와 사울을 택하여 사도로 소아시아 지역에 보내 본격적인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후 교회는 이 모델을 따라 준비된 일꾼들을 각 나라와 지역으로 파송하였고, 1800년이 지나자 조선에도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으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겪었던 출신과 신분 사이의 갈등을 함께 겪었고, 이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해결해 왔습니다. 제1차, 2차 대전을 겪고 비로소 깨달은 앙리 베르그송처럼, 지금 대한민국은 인간이 만든 법률 보다 상위의 가르침, 즉,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웃 사랑)을 배울 때입니다.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주님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만민을 포용하고 화목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말론적 실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는 그런 갈등을 ‘그리스도의 법’을 통해 해결한 역사 그 자체이며, 그리스도의 법의 가장 핵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연동교회의 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갈라디아서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갖바치(가죽신 제조) 천민 고찬익(1857)은 자신의 신분을 비관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는 중, 선교사 게일에게 전도 받고 회심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회심 일화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받은 그날, 고씨는 꿈에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움에 “고…고…고”라고만 대답하자, 다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에, “내 이름은 고가이고, 싸움꾼, 술꾼에 망나니올시다. 뉘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울며 대답합니다. 그때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고씨의 몸을 치면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말하고 사라집니다. 고씨는 꿈에서 깨어나 전도지를 또 읽고 게일을 찾아 갔고, 주님을 영접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게일 선교사는 고씨에게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찬익 贊翼’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1896년 무어 선교사는 천민 거주지인 종로 5가 부근에서 연동교회를 창립하고 1900년 게일 선교사가 담임 목사를 맡습니다. 고찬익은 조사로서 갖바치, 백정 등에게 전도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1905년 장로선출을 위한 공동의회가 열렸습니다. 교인들은 양반이 아니라 천민 고찬익을 첫 장로로 선출하였습니다. 일부 양반들은 교회를 떠났지만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천 이백석 되는 예배당까지 신축하였습니다(1908). 세상을 떠났을 때(1908), “고찬익 장로는 한국에서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게일 선교사)으로 평할 정도로 그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매일묵상(2025/1/2-3)


누가복음13:13절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본문은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보시자 그를 앞으로 불러내 고치신 장면입니다. 여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나 회당장은 안식일을 강조하여 주님의 행위가 제 4계명을 깨뜨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사물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관점과 생각도 다채롭습니다. 인생이란 어떤 관점을 갖고,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형형색색의 철학이 등장하나, “만유의 주님이 통치하시므로, 너는 잔꾀를 부리지 말아라”는 잠언의 핵심적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섭리 가운데 다스리면서, 사람들, 특히 하나님 백성의 대화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선지자 말라기는 “그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다” (말3:16,새번역)고 밝힙니다. 말이란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터져 나온 결과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첫걸음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 경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우리의 삶이 다시 세상을 비취어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해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고린도후서2: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요셉 시주(Joseph R. Sizoo)는 그의 책 「우리는 아직 소망할 수 있다, Still We Can Hope 에서 “우리는 원자의 신비를 파악했지만 산상수훈을 거절했다. 우리는 지혜없이 놀라운 일을 그리고 양심없이 힘을 얻었다. 우리는 핵에 관한한 거인이 되었으나 도덕에 관한한 어린아이들이다.” 고 한탄합니다. 인류는 양자역학을 알자 곧 바로 멸망할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지식의 나무가 아담의 마음을 드러낸 것처럼, 원자에 대한 지식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이 악한 마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마치 향수와 같습니다. 방안에 향수병을 놓으면 필연적으로 향기가 나지만, 반응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싫어합니다만, 누구도 향수 냄새가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와 아이 성을 멸망시키자, 그 소식은 가나안 땅 전역으로 퍼져갔습니다. 그러나 아모리 족속 다섯 왕은 연합하여 대적하였고, 기브온과 그 인근 3도시는 항복하였습니다. 전자는 멸망당하였고 후자는 생명을 살렸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취할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담당하겠습니까? 복음의 제사장들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건짐 받을 유일한 방법은 마음에 악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매일묵상(2024/12/30)

(2024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시편23:5절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새번역)


벌써 2024년이 저물고, 2025년이 다가왔습니다. ‘매일묵상’은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에서 출발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선으로 이끄신다’는 섭리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지혜입니다. 2024년을 되새겨 보고 우리가 연초에 계획한 것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 감사한 것들과 회개할 것들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나 계획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국가에 대하여도 같습니다. 연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혼란이 대한민국의 정치를 강타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잘 정리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특히, 어제 무안공항의 대참사로 무려 179명의 탑승객이 사망하였습니다. 재발방지와 유가족 위로를 위해 주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끝맺음은 전도서 2: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입니다. 2025년은 나만의 좋음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도록 마음에 다짐하고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잠언3:6,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