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사도행전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목포는 이별과 한과 눈물과 설움이 스며든 땅이다. 영산강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곳, 예로부터 고기 잡고 장사하는 뱃사람들의 터전이었기에, 억양이 높고 발음이 강하다. 목포 사람들은 대개 남쪽섬에서 올라와 정착했거나,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많다. 조선 시대에는 목포와 그 남쪽 진도, 무안, 신안, 해남, 강진 땅은 유배지로서, 양반 귀족들의 후손들이 많다. ‘양반 의식’과 ‘정치적 한’이 묘하게 어울려 자존심과 저항을 담은 민중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이덕주, 15,16 요약). ‘나그네 땅’ 목포의 특질을 보여줍니다. 목포는 나주 보다 쉽게 복음을 받아들여서, 복음은 선교사 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남장로교 선교사 에리놀즈와 드루가 선교 지역 탐색 차 전라도의 여러 지역을 거쳐 1894년 4월 18일 목포에 도착 후, 선창가에서 전도할 때 “서울 남대문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되었다”는 목포 사람을 만난 기록이 그것입니다. 뱃길을 따라 들어온 것이죠! 그럼에도 선교사들이 목포에 정착하는 과정은 복잡했습니다. 개항장 선정 결정의 지연도 그 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지역적 특색과 떨어져 수용되거나 전파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실례입니다. 주님이 갈릴리 지역을 주로 전도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방인과 섞여 살고 오랜 역사를 거쳐 자주 침략을 당한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 보다 복음의 수용도가 높았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기도와 함께 지역에 관해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전도서2:5절
“나는 정원과 과수원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과일나무도 심어 보았다.”(새번역)
본절은 4절에 이어 솔로몬의 구체적 사업의 면모를 기술합니다. ‘정원’의 원어 ‘깐노트’는 담이나 울타리를 둘러 외부로부터 보호, 격리된 뜰을 의미합니다. ‘과수원’의 원어 ‘파르떼스’는 열매 맺는 과수와 귀한 식물들이 있는 큰 공원 단지를 지칭합니다. ‘정원과 과수원’ 단지를 만든 목적은 솔로몬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습니다. 솔로몬은 그것들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어’ 경제적 유익을 거두면서도, 각종 꽃나무와 향나무를 갖추어 매우 아릅답고, 솔로몬의 창의성이 돋보였을 것입니다. 유홍준 박사는 정원의 돌을 놓는 법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질서의 일본인들은 10 개의 돌 중 9개는 반듯하고, 1개만 자연스럽게 놓고, 개성의 한국인들은 1개만 반듯하고 9개를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민족성이 드러나 있다.” 왕 솔로몬과 함께 그곳을 거닐었을 사람들(처첩들, 신하들)의 기쁨과 탄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후단의 ‘온갖 과일나무’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창2:9), 인간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였음을 뜻힙니다. 예로부터 왕들과 부자들은 좋은 정원을 조성코자 하였기에, 이 같은 정원을 만든 사람은 솔로몬뿐 아닙니다. 고 구본무 회장도 화담숲을 조성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습니다. 자연생태계도 보존하고 시민들은 휴식을 누리게 되어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행한 것이라 보이지만,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다면 이런 것조차 허망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2:11).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전도서2:6절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삼림’이란 ‘야아르’의 번역이며, ‘기름지고 무성한 삼림’을 의미합니다. ‘나무들’을 뜻하는 수목은 각종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과 여러 귀한 수목들을 포함합니다(5). 제가 20년 전 미국에 거주할 때 미국의 집들은 통상 과일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마트에 맛 있는 과일이 많았으며, 과일은 익어도 수확이 곤란하며, 새와 벌레들이 모이고 잔디에 뗠어지면 썩어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입니다. 풍부한 미국인의 삶을 드러내는 일면이나, 팔레스틴 지역 특히 고대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각종 과목은 전쟁 시에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고(신20:19,20), 모세 또한 가나안 땅을 탐지시킬 때 토지의 비옥과 메마른 나무의 유무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지금의 산업 사외와 달리 농경 사회에는 토지의 후박, 수목의 유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민13:20). 비옥한 토지, 울창한 삼림, 풍성한 열매 등은 물을 요구하는데, 공급처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팔레스틴에서 철 따라 내리는 비는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 준수와 비의 축복을 결부시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도록 장치하셨습니다(레26:4). 비가 순종에 의존하자, 솔로몬은 못들을 파서 자신의 삼림들에 항시 물을 공급해 무성하게 만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지혜이나, 인간의 성공이 하나님을 떠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그렇게 미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제자들은 모든 스승 보다 명철합니다(시119:99).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두라 유로포스 유적지」
사도행전 9: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주후 1세기 경 다메섹에는 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살았고 회당과 교회는 공존하였습니다. 비록다메섹과의 거리는 멀지만 시리아 국경 지역에서 발굴된 ‘두라 유로포스’가 그 증거입니다. ‘두라 유라포스’는 AD257년 사산 왕국에 의해 폐허가 되어 약 1700년 간 잊혀졌으나(AD257), 1920년 참호를 파던 영국군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유적들이 발굴되었으나, 주후 2세기 경 건축된 회당과 교회의 유적이 중요합니다. 회당과 교회는 모두 진흙 벽돌로 지은 가정집을 종교 건물로 개조한 것입니다. 벽면들은 성경 이야기와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로 가득했으며, 거리도 가깝고 건축 구조도 유사합니다. 차이 점이라면, 벽화의 내용입니다. 회당 벽화는 아브라함, 모세, 출애굽, 예루살렘 성전, 에스더서 등을 표현하였지만, 교회 벽화는 예수의 기적이 주요 주제였습니다. 이 교회는 발굴된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초대 가정교회의 시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라 유라포스’는 박해자 바울의 회심과 그로 인한 복음이 시리아에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은 회심 후 3년을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전도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만 만난 뒤, 길리기아 다소 성으로 되돌아 갑니다(갈1:15-21;행9:23-30). 바울은 바리새인이요 랍비로서, 이미 구약에 정통한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였고 이방 선교를 개척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1:22-24)
에베소서 4: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선과 화평을 만들어 내는 노동자”입니다. 목적은 화평한 의요, 방법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약3:17). 노동자(일꾼, 품꾼)는 일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일과 보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일은 영적이며,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증거’를 지킴이 그 핵심입니다(계14:12). 도성인신 하신 그리스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일의 방식은 세상과 뚜렷히 구분됩니다. 세상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잘못을 숨기고자 하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행을 숨기고, 잘못은 고백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관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세상은 창조주를 부인하니 인생을 명예, 재산, 권력 등 육신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만물의 주관자를 믿고 알기 때문에, 던져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보상 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미 영생을 갖고 있습니다(요5:24), 보상은 하나, 주님의 칭찬입니다(마25:23).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 가족, 친구, 사업 등에 때때로 불이익을 당하곤 하지만 낙망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과 도우심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자들입니다(마6:11).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란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