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2/23-27)


마태복음1: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나는 평생 낡은 트럭만 가지고 있어서 항상 새 트럭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소원을 이루자 이런 일이 있다니…” 해튼 씨는  빨간 색의 새 트럭을 샀지만, 바로 병원에 가서 결장암 수술을 받았고, 간호사인 로버타 메스너는 한 주에도 몇 번씩 방문하며 돌보았습니다. 둘은 자주 트럭에 앉아 그들의 믿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해튼 부인이 혼자 남게 되는 것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대화 후 로버타는 부엌으로 가서 해튼 씨의 상황을 알리면서, 해튼 부인이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해튼 씨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점점 더 평안을 얻었습니다. 해튼 씨의 병세가 악화되어 로버타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몸을 기울이자,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면서 내게 손을 내밀고 계세요. 나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거예요” 속삭였습니다. 그날 저녁 해튼 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호사 로버타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방부제 가득한 병실에서 해튼 씨를 만났다면, 그의 진정한 속마음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현재 있는 곳에서 만나야 한다.” 이것은 주님이 성육신 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아기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21-27쪽, 참조)

「빈 구유」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성탄절이 끝난 직후, 앨리스는 남편과 세 자녀와 함께 성탄절 장식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남편 잭은 큰아들 네이트의 도움을 받아 트리를 치웠고, 사라는 다섯 살 된 둘째 아이 나탈리의 도움을 받아 예수 탄생 장면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사라와 나탈리가 부서지기 쉬운 인형을 조심스럽게 포장하는 동안, 나탈리가 외쳤습니다. “누군가 구유 속 아기 예수님을 훔쳐 갔어요!” 생각해 보니 이 번 성탄절은 주인공되신 예수님은 도난 당하여 사라졌고 빈 구유만 축하하였던 것입니다. 범인이 누군지 대략 추측이 갔지만, 남편 잭은 맏딸 사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음, 아기 예수님이 올해는 상자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가 봐.” 라는 말을 하며 사태를 진정(?)시켰습니다. 앨리스의 집에서 일어난 ‘빈 구유 사건’은 우리 믿음 생활을 되새겨 보도록 합니다. 매년 12월 25일이 되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즐거워 합니다. 성탄절 음악, 맛 있는 음식들, 포장지로 싼 선물, 그리고 캐롤을 즐깁니다만, 정작 중요한 성탄절의 의미는 잃어버립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만드시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성탄절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마음에 간직한다면, 성탄절의 메시지는 연중 내내 생생한 현실이 되어, 좀 더 화평의 삶을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탄절은 “위로와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날로서, 먼저 천군과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누가복음 2: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누가복음의 성탄절 이야기는, 여행 중 짐승의 우리에서 해산하고,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 이어 헤롯이 죽이려고 찾았고, 애굽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스럽고 심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성탄절 메시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깊은 행복과 심오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 볼 것이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눅2:26,27). 그것이 소망입니다. 시므온과 같은 소망은 자기의 문제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합니다. 따라서, 소망의 기초는 믿음이고,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시므온과 같은 경건한 주님의 백성들을 언급합니다. 첫째,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입니다. 그들은 밤낮 기도하였지만 늙기까지 자녀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체험과 함께 아들 요한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둘째,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동정녀의 잉태라는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겪을 때, 이 두 분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낳고 기르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셋째, 여선지 안나는 60년을 청상과부로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경건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이루심을 믿고, 하나님의 때가 도착할 때까지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사람 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전도서 2: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1:12-18절이 인간이 높이 평가하는 지혜 추구조차 허무함을 역설한 것이나, 2:1-11절은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과 성공의 헛됨을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은, 사변적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움직이는 현실에 바탕을 둔 실제적 교훈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 전도자는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을 포함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을 경험해 본 결과,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쾌락조차 무의미함을 선포합니다. 전도자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의 쾌락 추구는 참된 만족 여부의 발견을 위해 절제하면서 시도한 것이지 결코 방탕이 아닙니다. 한편, “너는 낙을 누리라”에서 ‘낙’은 ‘토브=선, 좋음, 희락’의 번역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주장됩니다. ① ‘선한 것을 발견해 내라’ ② ‘쾌락을 즐겨라’ 전자는, 쾌락 탐구를 통해 의미 있는 삶의 발견을 시도하였음을, 후자는, 쾌락의 추구를 심도 있게 시도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웃음’ 혹은 ‘술’ 등과 같은 구체적 쾌락 추구 수단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후자가 타당합니다. 결론은, ‘이것도(쾌락 추구) 헛되도다!’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이미 내린 결론을 또 다시 검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쾌락’을 추구할 경우 지혜자 솔로몬과 달리 방탕으로 치닫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절제 없는 쾌락은 사망의 길입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5).

매일묵상(2024/12/16-20)


갈라디아서 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는 선행이며,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그 선행을 재료 삼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레이실라 비치의 글입니다. “교직에 몸담은 첫해의 선생님은 젋고 열정적이었다. 제일 처음 부임한 학교는 쿠바 하바나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있었다. 선생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아이는 아홉 살 난 여자아이로 갈색머리에 표정으로 가득찬 눈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항상 단정했으나 신발은 매우 낡아 2학기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넝마 조각 같았다. 선생님은 가죽으로 리본이 달린 새 신발을 한 켤레 사 주셨다. 너무 예뻤다. 학년 말 선생은 하바나 시의 다른 학교로 전근하셨고, 30년을 가르치신 후 은퇴하여 글을 쓰고 계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폐렴이 심하게 걸려 작은 개인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병원에 종사하는 분들의 탁월한 서비스에 놀랐다. 그래서, 다른 환자에게 자신의 감동을 이야기 하자, 그 환자도 동의하면서, “특히 부인께서 입원하신 후에는 더 친절해졌습니다.” 하였다. 결론은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병원 원장이신 멘데스 박사님이 특별 돌봄을 지시하셨습니다.”고 하였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원장에게 가서 초면인데 이렇게 특별한 돌봄을 감사드린다고 하니, 멘데스 박사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에요. 선생님께서 30여년 전에 새 신발을 받은 그 어린 소녀가 바로 저예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한 그 가죽 신발 말이에요!” 주님은 보상받지 못한 선행은 오히려 복이 되어,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14: 14) 하셨습니다.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73-75쪽, 참조)

전도서1:17절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자는 이미 긍정적인 측면(13,16)에서 지혜를 살펴보았고 본절에서는 지혜와 정반대인 ‘어리석음’을 탐구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을 모두 연구했음을 밝히지만, 둘 다 연구한 이유는 적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둘 중 하나에서 의미나 즐거움이 있는지 찾아본 뒤, 무엇이 참된 지혜인가를 명확히 하고자 어리석음까지도 연구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혹은, 지혜와 어리석음은 동전의 양면이므로 전체적인 그림을 얻기 위해 양 측면을 모두 살펴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실패하였음을 자인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여도 잡지 못하듯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섭렵하였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음을 말합니다. 더 나쁜 것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지식을 추구할수록 괴로움은 더욱 많아진다는 역설입니다(18).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잠1:8)를 전제로 하나, 본절의 지혜는 하나님이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데 전도자는 믿음의 길에서 방황 한 뒤 얻은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탄소 5개로 된 ‘리보스’의 2번 탄소에 ‘산소’가 있으면 RNA(리보스 핵산)을 구성하고, ‘산소’가 없으면 DNA(디옥시리보스 핵산)가 되어 전혀 다른 기능을 갖게 합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생명의 은총이나, 세상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합니다. 결과는 삶의 무의미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전도서1:18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본절은 지혜를 얻게 되면 근심 역시 수반된다는 점을 지적하여, 지혜도 허무하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1-11절은 세상에 사는 인간의 삶이 무의미함을, 12-18절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인 지혜와 그런 지혜의 추구조차 허무함을 선언하여, 해 아래 사는 인간의 모든 수고가 무의미함을 가르칩니다. 전도자의 선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낸 것이지, 신자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불신자를 위한 책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자신을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 밝히는데, 솔로몬은 성경의 전통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의 탐험 여정은 믿음 깊은 신자의 여정이므로, 성숙한 신자도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면 방황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그 방황이 전도자와 같은 지적 방황이냐, 아니면 욥과 같은 고난의 방황인가의 차이 뿐입니다. 고난 중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롭게 살아온 자신에 대해 변호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어 괴로워 합니다. 시인 아삽은 악인은 잘 살고 건강하나, 매일 고난을 당하는 자신을 보고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보듯이 아무런 삶의 고난이 없고 풍족 하여도 방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삶의 의미나, 자아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적 방황 때문입니다. 좋은 예가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 입니다. 전도자에 따르면, 이 철학적, 신학적 주제는 해 아래 인간에게는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라고 토로합니다(13).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창세기 10:22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아르박삿, 아람 족속은 아람의 후손으로 모두 셈의 자손입니다만, 고대에 두 민족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지금 아사드 대통령이 물러난 시리아를 이스라엘은 맹폭하는데 시리아는 성경 시대의 아람 제국과 동일한 지역입니다. 갈등은 3천년이나 됐습니다. 전쟁은 아람 임금 하사엘 시대(BC842-796)에 심하였습니다. 주님은 북왕국을 징계하시려고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그 후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히는 장면들이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한편, ‘그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병거용 말의 눈가리개들 중에는 아람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하다드 신께서 우리 주 하사엘에게 하사하신” 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하사엘의 역사성을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텔 단 지역에서 발견된 석비이다. 여기에는 성경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는 역사적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다윗 집’이라는 유다 왕국의 호칭이 나온다’「아람 임금 하사엘,76쪽」. 주님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타락하자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셨고,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공격하고, 가드를 점령한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자(왕하12:17), 유다 왕(요아스)은 성전의 성물과 왕궁의 금을 모두 바쳐 공격을 면합니다. 하사엘이 쳐서 점령한 가드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은 1996년 이후 현재까지 하사엘의 공격진영과 파괴된 여러 흔적들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며 유일하게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록한 신앙 교훈의 보고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시편73: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예전에 본 드라마입니다. 매우 곤궁한 어느 가장이 정신 이상이 되어 방 한구석에서 종이에 백 만원, 천 만원 등의 숫자를 쓰고 돈이라고 하다가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치료를 받는 중 의사가 정신을 차려 현실을 직시하라고 일침을 놓자 그는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퇴원하였으나 어려운 경제 현실에 직면하자 마음은 다시 무너졌고 이전과 같이 종이 돈을 만들어 공중에 뿌리는 장면과 함께 드라마는 끝납니다. 무너진 마음을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본 시편의 저자는 아삽(다윗의 성가대장)으로, 자신은 경건하나 매일 고통 중에 살고 있는데, 악인들의 형통과 교만을 보자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아삽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고, 아삽은 늘 교훈하사 지혜롭고 바른 삶을 살게 하시면서,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실 계획이셨던 것이죠! 아삽은 하나님이 ‘마음의 반석’이요, ‘삶의 힘’이 되심을 깨닫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몫은 재산, 명예, 권력 등이지만, 아삽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몫임을 깨닫습니다. 실로 그분의 인자(신실한 사랑)는 생명 보다 낫습니다!(시편63:3). 믿음 생활은 즐겁게 주님의 뜻을 행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드린 기도가 응답받는 삶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 자신이 우리의 몫(재산, 유산)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삶은 단순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가 결합되어 선을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편73:28)

매일묵상(2024/12/9 – 13)


「참 기특한 실수」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켄디 챈드의 성탄절이야기입니다. “그 해 아들 니콜라스는 여섯 살 유치원생이었고 성탄절 학예발표회 최종 연습을 구경하러 갔다. 이윽고 담임 선생님들의 인솔에 따라 들어온 학생들은 모두 식당 바닥에 앉아 청중이 되었다가, 발표 순서가 되면 무대에 올라갔다. 예상 대로 아기 예수, 구유, 그리스도의 귀중한 생명의 선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니콜라스 반은 ‘크리스마스의 사랑, Christmas Love’이란 노래를 불렀다. 맨 앞줄에 서 있는 아이들은 각각 큰 글자를 갖고 있었고, 하나씩 들어서 노래 제목을 만들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C는 크리스마스의 C”라고 노래하면 한 아이가 글자 C를 들었고, 또 “H는 해피의 H”라고 노래하면 다른 아이가 글자 H를 들었다. 이렇게 계속하면 마지막에는 노래 제목인 “Christmas Love”라는 메시지가 연출되는 것이었다. 발표는 매끄럽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한 여학생이 글자 M을 거꾸로 들어 ‘W’자가 되었다. 실수였다. 게다가 그 학생은 조금씩 움직여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옆으로 서는 통에 글자 간격이 이상하게 벌어졌다. 청중석의 아이들은 그 실수에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지만, 순진한 아이는 당당하게 ‘W’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글자가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다함께 보았고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전체 글자와 메시지는 “Christ was Love”(그리스도는 사랑이셨습니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270-73쪽, 참조)

전도서 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본절은 속담체로, 인간의 무능력을 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구부러진 것’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고쳐지기 바라는 모든 잘못된 상태이나, 문맥상 도덕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특히, 유사한 구절인 7:13절(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과 비교할 때 자명합니다. ‘구부러진 것’의 예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요9:1)으로, 그는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인간은 마음대로 세상을 다룰 수 없음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또 ‘모자란 것’이란, ‘필요하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단은 ‘인간이 원하고 필요하지만 없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라고 해석됩니다. 예로서, 모든 병을 치료하고, 죽지 않게 하는 ‘생명나무 열매’ 혹은 ‘생명의 떡’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본절에서 전도자는 이런 인간의 무능력을 깨닫고 절망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복음의 전제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이제 만유를 회복하사, 사망을 철폐하실 것입니다(롬8:17-25). 그러므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 즉 맹인, 귀먹은 사람, 말 못하는 사람, 절름발이, 중풍병자, 문둥병자 등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은 새 창조의 예표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생명나무’(요일5:13)와 ‘생명의 떡’(요6:35)이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전도서 1:16절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2-15절은 세상 모든 일의 허무함을 밝히나, 16,17절은 그런 지혜 추구 과정 자체도 허무하고 무의미함을 기술합니다. 본절은 두 번째 성찰의 문구로서, 전도자는 자신의 신임장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전대미문의 탁월한 지혜자’로 자칭하는 것 같아 다소 주제넘게 들리지만, 그것이 본절의 초점이 아닙니다. 요점은, 그런 지혜를 갖고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와 역대서를 보면,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왕 위에 등극하자 정적- 아도니야, 요압, 시므이-을 지혜롭고 과감하게 처단합니다. 나라가 자신의 손에 굳게 세워지자, 비로소 기브온에 갔고, 직접 일천번제를 드려 주님을 감동시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기 전에도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감동하신 주님이 원하는 것을 묻자, 그는 맡은 왕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재판의 지혜(‘듣는 마음’)를 구합니다. 주님은 기뻐하사, 판결의 지혜는 물론, 지식과 재물까지 주십니다. 솔로몬은 정말 현명한 왕이 되었고, 그 지혜로 부국강병을 이룩하였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우상숭배로 전락하였고, 이스라엘 왕국 분열의 모든 씨앗을 뿌립니다. 그는 단명은 아니지만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지혜가 바로 세상 지혜입니다. 솔로몬 같이, 사람은 주님에 대한 순종을 떠나면 행복도 또한 떠나버립니다. 행복은 주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만이 가지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시편84:1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람 사람들”
사도행전 17: 26절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온 인류의 조상은 노아이며,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그중 한 명이 ‘아람(=고지대)’으로, 적어도 BC1200년경부터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 유프라테스 강까지 펼쳐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셈의 아들 아르박삿의 후손이나, 신명기는 야곱을 ‘방랑하는 아람 사람’(신26:5)이라 하였는데, 리브가나 레아와 라헬이 아람 사람이고, 야곱 역시 20년을 아람에서 지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람 왕국은 다윗 시대 이후 적대적이 되었고, 특히 벤하닷과 하사엘 왕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왕상20:26;왕하6:24). 그러나 두 나라는 필요에 따라 무역을 하거나 왕래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말을 이집트에서 사서 아람 임금들에게 되팔았고(왕상10:29),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나병 치료를 위해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한 것이 그 예입니다(왕하5장). 아람이 고대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앗수르 왕 디슬랏 빌레셀1세(BC1114)의 연대기이며, 그는 아람 사람들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아람은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BC720). 또한, 1966년 텔 단에서 출토된 석비는 다윗 가문과 하사엘 아람 왕에 관해 기록하여 성경을 뒷받침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특히 유다 왕국은 약소국이었습니다. 이들은 강대국의 침략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도움으로 살아간 것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지금 비상계엄사태로 어지럽습니다. 적법절차를 따라 조속한 정국 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잠언3:5절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새번역)

즐겁게, 그리고 고된 노동 후에는 그 결과는 하나님 손에 맡겨야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맡겨주신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저의 수고는 여기까지이며, 나머지는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후, 잠을 자야 합니다. 온갖 감정이 요동칠 수 있으나, 주님이 맡으셨음을 생각하고 근심을 몰아내는 연습은 경건의 훈련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모순어법 같지만, 온갖 염려·불안으로 마음은 무거우나 하나님께 맡겼다는 사실을 근거로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 정직하게 살고 염려되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면 이렇게 해결되는구나!”는 삶의 경험은 우리에게 믿음의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롬8:32)이니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따라서, 신자는 주님을 본받아 안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폭풍으로 배에 물이 가득하자,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로 가득찼으나, 주님은 고물에서 깊히 주무셨습니다. 열심히 가르치신 날 저녁이라 피곤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 맡깁니다” 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죽음 이후의 일을 맡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눅23:46). 그 결과는 부활이었고, 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6).

매일묵상(2024/12/2-6)


요한복음 11:5,6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본문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의 배경으로, 주님은 2틀을 지체하심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드셨습니다. 낸시에게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5살 딸 사라가 있습니다. 어느 더운 7월의 아침, 부러진 선풍기의 날개 소리에 잠을 깨자, 자신의 삶 중 부러진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사라의 심장 수술 등으로, 엄청난 병원 빚과 함께, 얼마 후면 남펀의 일자리도, 집도 없어질 것입니다. 성경학교에 갈 시간이 이르자 사라는 필요 없는 물건으로 채워진 가방을 메고 “짜잔”하면서 나타났습니다. 사라를 성경 학교에 데려다 주고 여러 가지 용무를 보았습니다. 낸시는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지? 우리 집은 어떻게 될까?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까? 라는 질문에 다다르자 생각이 멈췄습니다. 이윽고 낸시는 교회에 다시 도착하였고, 사라가 있는 예배당으로 갔습니다. 사라는 배낭을 메고 모자도 반바지도 윗도리도 모두 거꾸로 입고 있었습니다. “사라를 정말 사랑한다”는 마음이 스쳐 지나간 바로 그때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는 하나님의 잔잔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도 마치 사라의 거꾸로 입은 옷처럼 부조화에 엉망일 것입니다. ‘왜 너는 걱정과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쓸모없는 배낭을 메고 있니? 내가 그 배낭을 대신 메 주마”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낸시는 그날 밤 사라를 양육하는 특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11-14쪽, 참조)

전도서1:13절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3-15절까지는 전도자 자신의 지혜 추구의 결과의 허무를 선언힙니다. ‘지혜를 써서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는 고백은 솔로몬의 최고의 지혜가 결집된 책이 전도서로서(참조 왕하4:29-34), 그가 살핀 인생은 한 마디로 “괴롭다”로 정의되는데, 고통을 수반하지만 아무런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스러운 노역”이라 직역됩니다. 불교에 “인생은 고해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나, 전도서는 인간의 모든 일이 무의미를 넘어 고통스럽기까지 이유는 하나님을 무시하였기 때문임을 밝혔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철학자들은 지혜 탐구의 삶의 고귀성을 주장하나, 본절은 오히려 ‘괴로운 일’(혹은 ‘지저분한 일’)로 묘사합니다. 인간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사 수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3:17-19). 마치 하데스에게 벌 받아 영원히 돌을 굴려올리는 시지푸스와 같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절은 이런 ‘괴로운 일들’이 왜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할까요? 지식과 지혜를 포함한 모든 삶이 주권자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타락한 인간은 이를 무시하고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자들의 작업을 어리석게 하십니다. 대표자가 니이체입니다. 그는 평생 가족을 의심하며 초인을 부르짖고 혼자 살려고 하였지만, 정신병에 걸린 말년의 10년은 어머니와 누이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절대 강자가 정한 구조를 인간은 넘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지혜자입니다.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20).

전도서 1: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모든 일이 시간과 죽음 앞에서 사라질 운명이라, ‘지적 노동’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절대 잡을 수 없고, 설령 잡는다 해도 아무것도 없다”는 함의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13)를 ‘해 아래’로 바꾸었지만, 둘 다 인간 세상을 의미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과 삶을 성찰하면서 얻은 깊은 지혜를 주려 합니다. 먼저, 13절은 세상사를 ‘괴로운 것’이라 결론 짓고, 14절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을 토로하여 괴로움을 강조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선풍기 앞에서 바람을 쐬다가 바람을 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잡지 못한 것에 비유됩니다. 미성숙한 어린아이는 시도하다 안 되면 화를 내고 결국 절망하여 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삶의 의미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또한, 바람은 표식이나 경고없이 진로를 변경하고, 이리저리 불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현상이,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과 매우 흡사합니다. 1920년에 발병한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 명, 그 후 100년이 지난 2020년의 코로나 19로 7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돌연 사망이 닥치매 악인· 의인· 지혜자· 우매자 모두 동일하게 죽어 자취가 남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돌보시며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편37:24,새번역)

「라기스」
역대하 32:19절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


본절은 앗수르 왕 산헤립(BC705-681)이 라기스를 공격하는 중 신하들을 예루살렘에 보내 수행한 심리전을 묘사합니다. 산헤립의 일대기는 그가 46개의 도시를 치고 예루살렘을 향했으며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조공을 얻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열왕기하 18:14-17과 역대기하 32:9 의 히스기야의 조공 기록과 부합합니다. 라기스 전쟁은 니느웨의 산헤립 궁전 벽 부조에도 새겨졌습니다. 라기스 주변은 대추야자나무와 포도나무로 둘러싸였고, 이중 성벽이며, 성문의 탑과 성문으로 향하는 경사진 비탈길도 보입니다. 또한, 그 당시 남왕국 유다의 의복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앗수르 군사들과 다른 헬멧과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라기스 성벽을 향한 공성퇴를 매단 병거가 보여, 언덕을 쌓아 공성퇴를 사용하였는 산헤립의 일대기 내용과 일치합니다. 전쟁의 극심함은 주변에서 발견되는 화재의 흔적과 함께 수백 개의 무기들, 즉 물맷돌, 화살촉, 창끝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벽 부조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무너진 라기스는 80년 뒤 재건돼 요새로 쓰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됩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믿고 앗수르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앗수르 제국과 유다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왕하18: 7,8). 전쟁을 대비한 히스기야 같이 주님을 신뢰하면서도 뱀 같은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히스기야 왕조차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교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늘 겸손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시편20:7)

시편128: 2절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경건한 삶의 두 번째는 ‘고된 노동’입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후 인류에게 선고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관리하면서 즐겁게 노동을 하던 아담이 범죄하자 쫓아내시면서 고된 노동을 명령하셨는데, 여섯 가지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① 징계의 의미 : 땅은 저주를 받아 계속해서 가시와 엉겅퀴를 냄으로, 생존과 가족 부양을 위해 남자는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창3:17-19). ② 지혜의 수단: 일을 통해 하나님이 숨겨둔 지혜를 체득하며, 고된 수고를 통해 그 열매의 가치를 깨닫게 하십니다.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단: 수고를 통해 양식과 재물을 얻지만,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열매를 맺습니다. 농부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곡식이 영글지 못함을, 상인 역시 노력만 한다고 재물을 얻지 못하고 때와 기회가 와야 함을 깨닫는 것처럼, 일에 착수하여 성과를 얻기까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여러 변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교만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④ 성례전적 시각: 그리스도인은 일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에, 고된 노동 가운데 즐거움을 찾습니다. ⑤ 왕 같은 제사장: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수고를 해야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와 줄 수 있습니다. ⑥주님의 심판 : 최후의 심판 시 주님은 우리의 수고가 들어가 있지 않는 열매들은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와 탐욕을 버리고 주님만 의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16:1).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