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1/25-29)

디모데후서3:15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제 책장에는 한자가 섞인 선친의 성경이 있습니다. 한자는 뜻이 명료하고, 깨달으셨던 글귀들도 적혀 있어 은혜가 되었습니다. 겉표지는 낡아 가죽으로 바꾸어서 틈틈히 읽고 있습니다. 짐 킴스탁은 240km 떨어진 딸의 대학을 다녀온 그날 밤 자신의 대학 때가 떠올랐습니다. 짐을 데려주신 후, 아버지는 오랫동안 침묵하시다가, “나도 네 형들도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단다. 대학에서는 모든 것이 다를 테고 어떤 일이 생길지 나로선 알 수 없으니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마라는 말은 못하겠다. 돈도 넉넉하게 보내 줄 수 없지만 모든 일이 다 잘되리라고 믿는다. 아주 힘들 때 이 수표를 사용하거라. 그런 후 내게 편지로 얼마를 썼는지 알려다오” 이어 아버지는 낡은 당신의 성경책을 주셨습니다: “너만 원한다면 이 성경 말씀이 너를 도와줄 거다.” 짐은 대학 내내 고학 하였지만, 졸업 후 경제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딸 생각이 났습니다. 이틑날 짐은 딸에게 다시 갔고, “너만 원한다면 이 성경 말씀이 너를 도와줄 거야”라는 편지와 함께 아버지의 성경책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입니다(눅11:28). “하나님의 말씀”이란 보화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다만, 읽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94-97쪽, 참조)

전도서1:11절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헤롯 대왕은 유대인의 환심도 살겸, 자신의 치적을 남기고자 호화스러운 유대성전을 지었으나 주님의 말씀과 같이 AD66년 경 완성되자 마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또, 기부자 세브란스를 기념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 명명되었지만, 인간의 선행이나 업적 등의 기념이 하나님 없는 삶의 무의미를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인생은 “바다를 가는 것 같다”는 어떤 작가의 말 대로 자취조차 남지 않습니다. 따라서, 11절은 “업적을 남기려는 노력의 무의미”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이전에 존재했던 것의 반복이나, 오래된 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잊었거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본질은 미래에도 동일하여, 현 세대 역시 장래 세대에 기억받지 못할 것입니다. 좀 우울하지만, 3천년 전 전도자의 말은 사실입니다. 본절은 서론을 매듭지으면서, 과거나 미래 보다, 현재가 중요함을 교훈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인간의 역사 보다도, 영원하신 하나님께 기억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창조된 세상이 애써 부인하고 무시하는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만민을 심판하실 분입니다(전12:14). 따라서, 무의미한 인생 가운데 의미있고, 참으로 기억되는 삶이란, 그분의 뜻을 행하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2:1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전도서1:12절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12절은 본론(1:12-12:8)의 시작이며, 전도자의 충고는 12:8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에서 서술 방식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뀔 때까지 계속됩니다. ‘나 전도자’와 같은 자전적 도입은 이집트, 시리아,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형식을 따른 표현이나, ‘되어’로 번역된 동사 ‘하이티’가 완료형이기 때문에 세 가지 견해가 주장 되었습니다. (1) ‘되어’의 완료형은 “전에는 왕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기에 본문의 전도자는 솔로몬이 아니다. 솔로몬은 죽기까지 왕으로 통치하였다. (2)솔로몬이 저자이나, 이를 통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솔로몬의 생애를 추측케 한다. 죄를 지은 솔로몬은 회개하고 다시 왕 위에 오를 때까지 왕이 아니었던 기간이 있었다. (3) 솔로몬이 저자이나, 솔로몬은 삶의 마지막에 왕위에서 쫓겨났고, 회한에 잠긴 솔로몬이 남긴 글이라는 탈무드의 전승을 따른다. 그러나 히브리 동사의 완료시제는 과거에 행동이 완료되어서 그 효과가 현재까지 미치는 모습을 묘사하므로, 저자는 솔로몬이고, 죽을 때까지 왕 위에 있으면서 이 글을 남겼다는 전통적 견해가 옳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왕’이라는 표현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으로, 솔로몬만이 가능합니다. 그 아들 르호보암 이후 왕국은 분열 되었습니다(BC930). 권력, 부, 지혜를 극한까지 누린 왕 솔로몬은 인생이 그토록 원하는 부, 권력, 명예, 지식 추구의 허무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의 해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이 비결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8).

「라기스」
열왕기하18:17절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라…..”

라기스 골짜기는 평지에 위치한 다섯 개 골짜기 중 가장 남쪽에 있습니다. 드넓은 남방지역과 해안 평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이 골짜기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며 해발 천 미터 산지에 자리잡은 헤브론에 이르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텔 라기스’는 이미 여호수아의 정복 이전에 가나안 족속들의 요새였고, 왕 르호보암에 이르면 이중 성벽을 갖춘 견고한 성으로 세워져 유다 왕국의 남방 지역을 통제하는 요새가 됩니다(대하11:5-12; 23). 따라서, 라기스 성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보루여서, 열왕기, 역대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등의 전쟁 기록에 적혀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유물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되었습니다. 산헤립 연대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주전 701년 경 유다 왕국과 앗시리아 사이에 일어난 라기스 전투는 열왕기18장, 19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 천리 떨어진 앗시리아 수도 니느웨 성의 산헤립 궁전에서 같은 내용이 적힌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이것이 ‘라삼 실린더’로 불리워지는 원통형 돌인 산헤립 연대기로서, 높이 약 38cm, 직경 약 15cm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치열하였던 전투는 27미터의 부조에 상세히 조각되어 있습니다. 근동 최 강대국 앗시리아와 충돌한 왕 히스기야가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국운을 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천사 한 명을 보내어 앗시리아 군대 185,000 명을 죽여 구원하십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새번역).

시편37: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리스도인은 성례전적 시각- ‘주어진 모든 일과 사물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해리 블레마이어). 그런 삶은, 삶의 즐거움, 고된 노동, 그리고 근심 없는 휴식이란 3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 ‘삶의 즐거움’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을 때, 둘째 딸 라헬을 보자 사랑에 빠집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이나 고된 노동을 하였지만, 수 일(a few days)처럼 여겼습니다(창29:20). 라헬을 아내로 얻어 가정을 세울 기쁨과 소망 때문에 즐거웠던 것이죠! 우리의 계획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이를 믿고 기뻐하십시요!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걷되, ‘하나님의 뜻’ 행함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시편119:16).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여러 번 결혼하고 이혼하여 사생활은 좋지 않습니다만, 그의 재담이나 지성은 놀랍습니다.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할 때 유명세가 싫어 거부하려고 하자, 그러면 더 유명하게 된다는 말에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에 BBC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미 상을 받았으며 그것은 “발견하는 즐거움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물리학 연구의 즐거움이 예상치 못한 노벨상까지 이끈 것입니다. 파인만은 “저도 공부를 열심히 한 평범한 사람이에요. 기적은 없어요, 여러분.”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물리학은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그 안에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편119:14)

매일묵상(2024/11/18-22)

전도서1:9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5-8절에서, 전도자는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는 자연에 비유하면서 인생의 허무성을 지적합니다. 특히 8절은 기계적 순환을 거듭하는 해 아래에서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고통과 무의미를 탄식하나, 9-11절은 새로운 것이 없는 무의미한 세상에, 인간은 왔다가는 사라져 기억조차 없는 허무한 존재임을 밝힙니다. 전단을 직역하면, “과거에 있었던 바로 그것이 (장래에) 있을 그것이다”, 중단은, “그리고 (과거에) 행해진 바로 그것이 (장래에) 행해질 바로 그것이다”로 직역됩니다. 미래는 과거의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후단은, “그러므로 해 아래에서는 새로운 그 어떤 것도 없다”라고 직역됩니다. ‘새 것’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의 욕망은 삶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왔습니다. 자동차, 컴퓨터, 비행기, 냉장고, 에어콘 등이 그 좋은 예로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탄생, 결혼, 직업, 사망 등으로 이어지는 인간 존재의 기본구조는 물론, 명예, 권력, 돈,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역시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것’은 없습니다. 고대 아카디아인도 “과거의 삶은 곧 모든 날들의 삶과 같다”는 격언을 남긴 바 있지만, 전도서는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허무의 극복이라는 긍정적 명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무의미성’을 직시케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복음은 선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전도서1:10절
“”보라, 이것은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새번역)

9-11절은 “해 아래 인간의 삶의 무의미’가 주제입니다. 9절은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10절은 역사가의 입장에서 이를 뒷받침합니다. 먼저, 자연계에는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태양은 계속 떴다 지고, 강물은 계속 흘러 왔고, 바람도 쉬지 않고 이리 불고 저리 불지만 그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늙은 뒤 죽는 반복의 역사입니다. 아무도 왜 태어나서, 왜 살고, 왜 죽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우리가 던지는 이 질문은, 이전의 세대도 가졌고, 장래 세대도 같은 질문을 가질 것이나 아무도 해답을 갖지 못했고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한편, 자연 현상의 반복과 인간 역사의 반복은 차이가 있습니다. “태양이 내일 떠오를 것이다”고 믿지만, “내가 내일 살아서 그것을 볼 것이다”고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도, 우연히 내던져진 자신의 삶 또한 무의미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를 더 고민해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히9:27). 예수의 복음은 이 양자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합니다. 삶에는 의미를 부여하고(영생), 죽음과 심판과 관해서는 죄사함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새 것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버려진 포도밭」
이사야5:3절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엘라 골짜기에서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라기스 골짜기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평지의 나지막한 산들과 들녘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김상목 작가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포도밭’을 찾곤 합니다: “그 포도밭은 울타리가 무너지고 잡초가 무성하며 가지가 부러지고 헝클어진 머리 같아 보기에도 흉측하다.” 김작가의 경험담입니다. 작가가 오래 전 이스라엘에 유학할 당시 이 지역을 답사하던 교수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이사야서 5장을 읽도록 부탁했습니다. 이윽고 교수는 ‘버려진 포도밭’을 손으로 가리키며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라 말하였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버려진 포도밭’은 두려움이고 무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서 이스라엘 평지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드렸고, 이 후 그 현장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뜻인, 도덕법을 빌트인시키셨습니다(마5:17,18). 동물 중 오직 인간만이 만물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의 예입니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지만 서로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와 가깝다”며 물을 도(道)에 비유하였지만, 이 도를 성취하신 분은 도성인신하여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걱정은 주님께 맡기시고, 들포도가 아니라 ‘극상품 포도’를 맺도록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잠언12:1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행위가 옳은 줄로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충고를 듣는다”(현대인의성경)

스티브는 정기검진을 받은 지 며칠 후 전화가 옵니다. “오늘 오후에 병원에 오셔야 하겠습니다.” 스티브는 다소 당황해서 의사에게 갑니다. “앉아주세요, 스티브.”라고 말한 뒤, 의사는 말합니다: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는데요, 췌장암 초기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혈압도 낮고 콜레스테롤도 낮은 데요!” 놀란 스티브의 말에, 의사는 대답합니다. “아직 초기이지만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합시다.” 스티브는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철학으로 암치료를 거부하면 안 됩니다. 찰스 다윈(1809-1882)이 “생물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다”는 내용의 「종의 기원」을 냈고, 불가지론과 믿음 사이를 고민하다 말년에 성서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립니다. 진화론은 그것이 전제하는 태양, 공간. 시간의 존재를 설명 못하며, 과학임을 자인한다면 종교는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위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불가지론자 다윈은 성경의 충고를 듣고, 하나님을 굳게 붙잡았어야 합니다. 유전학을 모르는 다윈의 진화론은 형체의 비교를 통한 추측에 근거하여 이론을 전개하였고, 진화 방향의 예측이나, 검증 방법도 없어 진화 철학에 가깝습니다. 다만, 자연선택, 생명나무의 개념을 남겨 유전학을 근거한 후세의 신다윈주의자들의 출현에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반면, 성경은 발생한 사실에 관한 증언이 기록된 문서들의 집합으로 그 역사적 신빙성과 영감을 담은 가르침은 유일무이합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3:16)

매일묵상(2024/11/11-15)


에스더6:1절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왕궁 바깥뜰에 이른 때, 왕은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메리와 남편 로렌은 둘째 아들 마이클을 낳은 뒤(1991년) 정기 검진에서 아기의 머리가 문제되어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정상이었습니다. 한 달 후 메리는 두 아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평소와는 다르게 뒤쪽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그때 한 낯선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라고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습니다. 예배 후 그 남자는 와서 마이클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면서 “제가 보기에 아드님은 선천성 골유합증인 것 같습니다. 두개골이 너무 일찍 붙어 버리는 증세이니 즉시 소아 신경 전문의를 찾아가 보세요.” “어떻게 아세요?” “저는 오하이오에서 방문차 들른 소아 신경 외과 전문의입니다. 부인의 아들은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메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주치의를 통해 덴버 시의 전문의를 소개받았으나, 빠른 시일 내 진료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병원에 전화를 하자 접수원은 방금 예약을 취소한 분이 있어 그 시간이 비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덴버 시의 그 전문의는 같은 진단을 내리고 “아이의 두개골이 이미 닫혀 뇌가 더 이상 자랄 공간이 없습니다. 수술해야만 합니다. 다행히 아기가 어려 수술하면 충분히 성공할 가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제때 아이를 데려오셨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두개골을 벌려 뇌가 자랄 공간을 마련하는 8시간의 대수술 후 마이클은 정상으로 자랐습니다. 이 사건 이후 메리는 하나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3:11a)

전도서1:7절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도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하며 그 물은 강으로 되돌아가 다시 바다로 흐른다.”(현대인의성경)

갈릴리 호수(해저 200미터)로부터 남쪽 사해(해저400미터)로 흘러내리는 강은 요단으로, 그 강물은 급하게 흐르나 사해의 수위를 결코 높이지 못합니다. 뜨거운 햇빛 때문입니다. 이 같이 끊임없이 움직여 변화를 일으키나 아무런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마지막 예는 강물입니다. 모든 강물은 바다를 향해 쉴 새 없이 흘러가지만 결코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강물의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물론, 과학적 견지에서는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는 중에 많은 유익을 인간과 생물 그리고 식물에게 주지만, 전도자는 바다를 채우려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겉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삶의 무의미를 논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변화를 줄 수 없는 강물의 흐름처럼, 인간이 목표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음박질 하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된 만족이나 삶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물은 강으로 되돌아가”란 번역은 다툼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속적으로 흐르나 효과 없이 바다로 계속 들어간다는 의미(개정개역) 임을, 다른 하나는 물이 다시 한 번 흐르기 위해 강의 발원지로 계속 되돌아가는 의미(새번역)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도 무방한 것은, 강물의 계속 혹은 반복된 흐름은 인간의 헛된 노력을, ‘채워지지 않는 바다’란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란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는 곳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롬2:6)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전도서1:8절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자는 6-7절에서, 해, 바람, 강물의 비유를 들어 해 아래 허탄한 인생의 모습을 표현하였으나, 본절은 만물로 확장합니다. 먼저, 3절을 문법에 따라 다시 번역하면, “모든 일이 피곤하다. ①사람이 그것들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으며, ②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③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가 됩니다. 솔로몬은 자연계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움직이며, 다만 괴롭고 피곤할 뿐이라는 명제를 먼저 선언한 뒤, 강조를 위해 3개의 부정문이 뒤따릅니다: 첫째, ‘말로 다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로 모든 만물을 꿰뚫는 이론은 수립 불가능합니다. 수 많은 논쟁, 이론이 명멸하니 이 또한 헛되고 피곤합니다. 둘째, 눈은 많은 것을 보지만 결코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고, 셋째, 귀는 끊임없이 들을 수 있지만 들을 것은 더 많습니다. 이를 통해 솔로몬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삶 자체가 해, 강물, 바람의 움직임 같이 무의미하고 피곤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이에 반해,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고 만물을 보면, 피곤함이 아니라 경이와 소망이 차오릅니다. 하나님은 언어 없이도 당신의 영광과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데(시편19:1),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깨닫는 자의 마음은 평안과 쉼을 얻습니다(마11:28). 어거스틴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고백록).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시편23:1,2, 새번역).

「엘라골짜기」
사무엘상17:1절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본문의 지리적 배경은 엘라 골짜기입니다. 엘라 골짜기는 블레셋 평야에서 이스라엘 산지로 올라가는 세 번째 통로이며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엘라 골짜기를 통과하여 산 능선 길을 따라 해발 700-1,000m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면 곧바로 베들레헴에 도착하며, 북으로 예루살렘, 남으로 헤브론을 공략할 수 있기에,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것입니다. 한편, 골리앗의 고향 ‘가드’에서 엘라 골짜기를 따라 산악지역을 향해 걸어가면 우편에 우뚝 솟은 텔(언덕 요새)이 ‘아세가’이며 이스라엘의 1차 방어성입니다. 이어 엘라 골짜기는 양쪽에 서 있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폭으로 좁아지고, 산지를 향해  3km를 들어가면 이스라엘 2차 방어성 ‘소고’가 있습니다. 계속 올라가면 골짜기는 마치 입을 벌리듯 넓은 평지가 펼쳐지고, 이 평지의 우편 산기슭에 ‘아둘람’(삼상22:1), 그 위로 ‘그일라’(삼상23:1)가 있습니다. 다윗은 승리의 함성이 가시기도 전에 도망자가 되어 블레셋 성 ‘가드’로 피신하였지만,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척 하여 탈출한 뒤, 아둘람 굴에 600명과 함께 은거하는 중에도,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나 배신을 알고 떠납니다. 이 같이 엘라 골짜기는 명암이 교차했던 다윗의 일생의 예고편입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 통일이라는 대업을 성취합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시는 것과 같습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시편127:2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와 신뢰하는 자의 삶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본절이 노래하는 ‘쉼’입니다. 전자는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가도 마음이 불안하여 안절부절하지 못하지만, 후자는 똑같이 고된 일과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가나 주님 안에서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신자 역시 똑같은 걱정, 근심 그리고 일의 결과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손에 그 모두를 맡기고(벧전5:7),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신자가 서 있는 믿음의 토대는 확고합니다: “내가 경영하고 노력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시편37:3-6).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은 수술하고 약을 발라 싸맬 뿐이나, 그것을 낫게 하시는 분은 주님인 것과 같습니다. 신자는 가정, 삶, 하루의 일과, 사물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해리 블레마이어의 “성례전적 시각”의 취지입니다. 삶을 성례전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감사와 함께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합니다(히13:5).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은 똑같지만 시각이 달라지니 삶은 풍요로워지고 마음은 쉼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멍에를 지고 그분을 배우니, 이것이 영생입니다(요17: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매일묵상(2024/11/4 – 8)

완벽한 실수
요한복음12:14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종려주일에 주님은 감람산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행진하시나, 제자들은 성경(스가랴9:9)을 성취하시는 사건임을 후에 깨닫습니다(요12:16). 대릴 윌터만 스튜어트의 외할아버지의 일화입니다. 대공황 시절 시카고의 추운 어느 토요일 목수인 할아버지는 아침에 20달러나 주고 안경을 사신 후 교회에 가서 중국의 한 고아원에 보낼 옷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윗 주머니에 넣은 안경이 부지중 떨어졌고 옷 상자는 중국으로 보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결국 안경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중인데 이게 뭐예요?” 라고 불평하였습니다. 몇 달 후 그 중국의 고아원 원장이 휴가차 미국에 와서 여러 교회를 방문하였고, 할아버지 교회에도 와서 설교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께서 작년에 보내주신 안경에 감사 드립니다. 공산당이 휩쓸고 지난간 후 제 안경을 포함해 고아원의 모든 것이 망가졌고 저는 정말 절망했습니다. 돈이 있어도 제 도수의 안경의 구입은 불가능했어요. 잘 볼 수도 없는데다가 두통이 저를 괴롭혀서 동료들과 함께 매일 이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 주신 옷 상자가 도착했고 그 상자 뚜껑을 열자 제일 위에 바로 이 안경이 놓여 있었고 도수가 꼭 맞았습니다. 안경을 보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 과정은 오직 할아버지만 아셨기에 뒷좌석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실수를 완벽하게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55-57쪽」. 기도를 쉬지 마시고 주님의 일을 하다가 손해를 보아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전도서1:5절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5-8절은 계속 반복되나 인간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는 그 허무성을 해, 바람, 강물의 끝없는 순환을 통해 표현합니다. ‘해의 순환’을 다루는 본절에서, ‘뜨고..지되’란 계속되는 태양의 출몰을 말합니다. 태양은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고, 오직 무의미한 반복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태양 밑에서 사는 인간의 일상과 노동의 무의미성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논리적 필연입니다. 이에 반하여, 성경은 태양을 포함하여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선포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통제 하에 있습니다. 따라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분명한 실체입니다(시19:1). 물론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현상으로 솔로몬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질서 아래 풍요로운 소산물이 나고, 인간과 동식물의 생존 기반이 됨은 변함이 없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나, 무신론자들은 우연으로 치부합니다. 만약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연 그 자체만을 떼어 놓고 본다면 태양의 움직임은 의미가 없고, 인간의 삶 역시 허무하며 매일이 지친 일상입니다. 후단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간다”란, 태양이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가지만 순환과 무의미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밑에 사는 인생의 온갖 노력에도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짙은 허무를 재차 강조합니다. 태양은 고대에 가장 신성시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는 인생의 허무가 이 보다 강렬하게 기술될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전도서1:6절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6절은 ‘바람’의 무의미한 움직임을 관찰한 뒤 인생 무상을 토로합니다. (1)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킨다’는 구절은 ‘바람은 남쪽으로 불며 또한 반대로 북쪽을 향해 분다’는 뜻이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2) ‘이리 돌며 저리 돌아’는 ‘돌이켜 불며, 돌이켜 불며, 계속 분다’는 뜻이며, 역시 그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모르고, 오직 바람의 무의미한 반복적 활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3) 후단은 내키는 대로 움직이던 그 바람이 결국 ‘그 불던 곳으로 되돌아 갑니다.’ 심히 요동치던 바람이었지만 종래는 시작하였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태어나서 삶의 의미를 모른 채 이리 저리 살아보려고 노력하나, 결국은 모두 다 무덤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1985년 경 제가 공군에서 복무할 때 동작동 국립묘지에 단체로 참배를 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중년 여성이 한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아들이 공군 전투 조종사로서 훈련 중 순직하였습니다. 그때 함께 있던 조종사가 인사드리며 아들과 동급생이라고 하니, 그분은 “이렇게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그때, 당신의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믿음을 갖고 세상을 바라 본다면, 세상은 의미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고, 허무는 물론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상11:5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솔로몬 왕은 성전 건축과 부국강병을 이루었습니다. 왕위에 오르자 재판이란 왕의 직무를 위해 ‘듣는 마음’, 즉 분별력을 구하였지만, 감동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넘는 ‘지혜와 지식’(대하1:10)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동식물을 포함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갖고 부국강병을 이룩합니다. 그는 다윗 같은 믿음이 아니라, 세상 지혜로 주변국가와 정략적 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축하였고, 이에 따라 여인들과 함께 이방 신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고 솔로몬까지 굴복시킵니다. 시돈 여인과 여신 아스다롯이 그 예입니다(왕상11:1). 베니게의 신화에 따르면, 아스다롯은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난 여신으로 아세라, 바알랏 게발과 함께 엘의 부인이 되었고, 7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스다롯은 풍요와 다산, 전쟁의 여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주요 성지는 키프로스, 시돈, 두로, 그리고 비블로스 등 베니게 사람들의 도시이지만, 이스라엘 라기스에서도 금판(BC1600-1200)에 새겨진 아스다롯이 발굴되었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허무한 이야기이나,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들은 쉽게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벌과 축복을 부기하셨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에 이르는 복을, 당신을 미워하는 자(예, 우상숭배자)에게는 자손 3∼ 4대에 걸친 벌을 주십니다(출20:4-6). 오늘날은 황금이라는 우상, 즉 탐욕이 더 문제로, 세상 지혜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만유의 주님되심을 믿는 자만이 이길 수 있는 것은(요일5:5), 주님은 금생과 내생의 복의 저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하나님 없는 인간- 장폴 사르트르
시편14:1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네가 네 자신의 주인이 되라
”고 주장하였던 니이체를,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가 이어받습니다. 그의 작품 「구토」의 내용입니다: “어느 날 연금생활자 로강탱은 바다에서 돌을 줍다가 구토를 느낀다. 그렇게 시작된 구토는 나무뿌리를 보고도, 카페에서도, 파이프나 포크를 보고도 일어난다. 목적 없이 던져진 존재의 본질, 그것이 구토를 일으키는 원인이었다.” 사르트르는 “종이를 자르는 가위는 용도가 있지만, 인간은 용도가 없다. 가위의 창조자는 제작자이지만, 인간에게는 창조주가 없기 때문이다. 목적 없이 던져진 너 자신을 받아들여라(실존), 그리고 자유를 가지고 목적이나 용도를 스스로 창출해 가라(본질). 너는 너 자신의 주인이 되라!” 고 주장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인본주의적 삶을 세워가자는 주장입니다. 그는 무신론적 실존철학에 근거하여 공산국가 소련에 후한 평가, 알제리독립전쟁무기지원, 월남전 반대를 외쳤으며, 시몬 보부아르와 51년 동안의 계약결혼, 많은 여성편력으로 비판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실로 하나님 없는 자유를 구가하였습니다. 문제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반항하는 사르트르를 데려가심으로 그의 철학에 철퇴를 내렸습니다. 시간, 공간, 엄청난 우주, 양자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시며(요1:1), 세상은 그분의 뜻에 따라 지음받았습니다. 성경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당신을 계시하셨고,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토록 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매일묵상(2024/10/28-11/1)

특별한 식탁보
룻기2: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1948년 10월 초 젊은 목사 부부가 오래된 교회에 부임하여 건물을 보수하던 중 성탄절 이틀 앞두고 몰아친 폭풍우로 교회 강대상 바로 뒤의 벽에 큰 구멍이 났습니다. 낙심하였으나 그날 오후 중고등부의 자선 경매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아름다운 낡은 식탁보(4.5m)를 발견하고, 구입하여 그 구멍을 가렸습니다. 성탄절 전날은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교회 문을 잠그고 나오던 목사님은 근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한 중년 부인을 보고 교회에 들어와 추위를 피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최소한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개 숙여 기도한 부인은 벽에 걸린 식탁보를 보았고, 달려 나와 “제 거예요. 제 만찬용 식탁보가 틀림없어요!” 외치고는 한쪽 구석에 수놓아진 자신의 이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은 유모 면접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었고, 그녀와 남편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살았는데, 2차대전 중 부인만 살아남고 남편은 나찌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부인은 식탁보를 교회에 놓아두고 떠났습니다. 그날 저녁 성탄 이브 예배 중 그 식탁보는 더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예배 후 한 노신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그 식탁보를 황홀한 듯 바라본 뒤, ”참 이상한 일이에요. 오래 전 제 아내와 저는 똑 같은 식탁보를 갖고 있었어요…비엔나에 살 때였는데”라는 순간 목사님은 그날 오후 교회에 들렀던 부인에 대해 애기 하였고, 두 분은 그렇게 다시 재회하였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아름다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 출처: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17-20쪽)

전도서1:3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2절은 해 아래 안생이 피할 수 없는 절대 허무를 선언하고, 3절부터 11절까지는 인생의 다양한 상황에 비추어도 절대 허무임을 확증합니다. 3절은 노동과 허무를 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면, 무의미와 고통 속에서 살다가 덧없이 죽는 것이 인간 실존의 비극입니다. 이때, ‘해 아래에서’란 표현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은 다양한 사고방식이 존재합니다. 태양이 무엇인가? 신자들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임을 주장하지만, 불신자들은 태양의 존재를 우연으로 보고 인생에 대해 불가지론을 주장하거나, 어리석게도 태양을 신으로 경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양에 대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노력해야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신자들은 감사하며 수고하고,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전혀 없으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심은 놀라운 은혜입니다(눅6:36). 한편, 모든 사람은 수고한 어떤 것도 갖고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해 아래’로 표현된 이 세상에서, 열심히 땀흘리고 살아간들, 자신이 먹고 마시며 일하는 즐거움을 빼면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허무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므로(전12:14), 속지 말아야 합니다. 실로, “악한 친구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히므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고전15:33,34).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 시 수고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5)

전도서1:4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3절에서는 수사의문문을 사용하여 ‘해 아래’ 즉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동과 허무를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짧은 인생에 주목하고 대구법을 포함 3중으로 허무를 강조합니다. (1) ‘한 세대’에 해당하는 ‘또르’는 ‘선회하다, 돌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며, 한 사람이 태어나서 생존해 있는 기간과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끊임 없이 흐르는 유구한 세월에 비한다면 한 개인의 일생은 극히 짧습니다. 마치 찰나에 불과한데, 그 짧은 시간 속에 인간이 업적을 쌓고자 발버둥을 쳐도 무슨 의미를 남기겠습니까?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그야말로 허무한 존재입니다. (2) 또한, ‘가고’와 ‘오되’의 히브리어는 모두 분사형으로 ‘끊임 없이 가고 오는 현상이 계속됨”을 표현합니다. 전도자는 인간의 역사에서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는 일’이 계속되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더욱 허무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3) 후단은 짧은 인생에 비해 “영원하다”라고 생각될 정도의 긴 세월을 존속하는 땅을 등장시켜, 인생 무상을 강조합니다(반의 대구법). 물론 전도자나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창조된 이후 수십 억년을 존속하였고 앞으로도 오래 존속하겠지만 영원하지는 않으며, 시편기자도 그 점을 지적하여 노래합니다(시편102:26). 영원하신 분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현재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벧후3:10이하). 당연히 경건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90: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상22:39절
“아합의 남은 행적….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베니게(푀니키아) 사람들은 이집트나 인근 지역의 예술을 발전시켰는데, 근엄하게 앉아 있는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날개를 활짝 펴고 날렵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바꾼 것은 그 예입니다. 이들은 석수와 목수를 솔로몬 성전에 보내어 언약궤를 지키려고 날개를 활짝 편 그룹(천사)을 조각하였고, 이와 비슷하게, 그룹 이외에도 지성소와 외실의 벽으로 돌아가면서 새겨진 “종려나무와 활짝 핀 꽃모양”은 베니게의 상아 조각에서 흔히 보이는 이집트의 로투스 꽃 형상이나 종려와 꽃의 복합적인 모습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사마리아 궁전 발굴에서, 그룹, 종려, 활짝 핀 꽃 형상의 모습을 한 상아 조각 500여개를 얻었고, 베니게의 영향을 보게 됩니다. 오므리 왕은 아들 아합을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시켜 베니게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습니다. 따라서, 오므리가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고(BC870년경) 이곳에 거대한 궁전을 지을 때 두로와 시돈은 목수와 석수들을 보냈으리라 판단됩니다. 특히 1910년 경 발굴된 ‘아합 왕의 상아궁’은 이들에 의해 주도 되었을 것입니다(임미영, 59쪽). 성도들이 세상과 교류하고, 발달된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편리함과 화려함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상아궁’을 건축하고 이름을 남긴 아합 왕은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 보다 주님 보시기에 악하였습니다”(열상16:30). 이는 바알숭배 등의 죄 때문으로, 실로 헛된 명성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하나님 없는 인간- 니이체
전도서6:10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니이체(1844-1900)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만의 삶을 주장합니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투라는 산을 내려오다 한 노인을 만나 후 ‘탄식합니다 :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구나?” 그리고 니이체는 ‘초인사상’을 전개합니다: “만약 신이 죽었다면, 끊임없이 반복하여 발생되는 수 많은 인간의 문제들, 즉, 고통, 죽음, 쾌락, 사랑, 허무함 등을 해결하기 위해 남은 길은 하나다. 선악의 기준을 만들어 내던 신의 개념을 집어 던지고, 자유로워져라! 너 자신의 힘으로 이런 문제를 극복할 ‘힘’을 추구하고, 초인(자신만이 가치척도, 자신에게 책임과 약속을 지키는 인간)이 되라! 이것이 인간의 길이다.” “네가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 네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라.” 니이체는 자아성찰의 무거운 짐을 지는 낙타의 기질, 새 가치를 위하여 권리를 쟁취하려는 사자의 정신, 어린아이처럼 삶을 놀이로 만들고 자신만의 세계를 되찾는 창조성을 요청합니다. 그러나니이체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치자,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목을 안고 울다가 그 자리에서 미칩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태리 ‘토리노의 말’이며, 10년 뒤 정신병원에서 사망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니이체에게 인생은 너무 무거웠고 마음의 평화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자신들이 죄와 연약함에 싸여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죄, 사망, 세상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니이체와 달리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