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0/21-25)

하나님의 유모(humour)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배란이 끊어진 90세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웃었고 모두 웃었습니다. ‘이삭’의 뜻은 ‘웃음’으로. 하나님의 유모 중 하나입니다. 이를 경험하면, 우리의 믿음은 든든하게 되고, 삶은 사랑으로 훈훈합니다. 로빈은 오랜 암 투병 끝에 소천하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까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 언니는 아기를 낳았고, 오빠는 갓 결혼한 터라 어머니의 간호는 막내딸(27)인 자신의 몫이 되었으나, 부담 아닌 명예였습니다. “이제 난 어쩌면 좋아요, 주님?” 교회 의자에 앉아 속으로 물었습니다. 늘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삶이 끝나고 혼자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한 청년이 들어와 주위를 둘러 보더니 로빈 옆에 앉아 “늦어서 미안합니다”한 뒤 말 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몇 사람의 추모사가 끝나자 그가 로빈에게 물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메리를 마가렛이라고 그러죠?” 알고 보니, 로빈의 어머니 장례식장을 자신의 이모(메리) 장례식장으로 오인한 것입니다. 로빈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장례식이 마치자, ‘릭’이라고 소개한 그 청년은 이제 이모 장례식에는 참석치 못하니 커피 한잔 하자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첫만남으로 1년 후 로빈과 릭은 결혼하였습니다. 모친을 돌본 로빈이 외롭게 혼자 남겨진 바로 그때 주님은 릭이란 배우자를 보내셨습니다.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다”(마25:36, 사역)

전도서1:1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오늘부터 전도서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알려졌는데, ‘잠언’이나 ‘아가서’와는 달리 솔로몬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이란 문구와 1장과 2장의 내용을 검토하면, 분명히 솔로몬 왕이 맞습니다. ‘전도자’란 히브리어 ‘코헬레트’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스승’ or ‘리더’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풀어 쓰면, ‘스승-왕’ 정도의 어감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많은 염세주의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주전14세기 바벨론 작품인 「염세주의자의 대화」가 그 예로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자살이라 적혀 있을 정도입니다. 전도서 역시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적시하지만, 기쁨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의 가능성도 담겨 있기 때문에 세속적 염세주의자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주장의 결과에 직면하라고 도전하는 복음주의 소책자이면서, 삶의 ‘허무’, 악의 존재, 인생의 ‘수수께끼’와 같은 우리의 현실을 담아 내어, 피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지하게 삶을 대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전하는 일면을 갖고 있습니다. J.S 라이트의 전도서 요약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미지의 것들에 대한 열쇠를 갖고 계시지만, 그것을 당신에게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열쇠가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이 그 문들을 열어 주시도록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전12:13,14, 새번역)

전도서1: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대 허무와 신자의 본분’이란 본서의 주제를 ‘봉투구조’ (inclusion)라는 문학적 장치에 담습니다. 즉, 서론부(1:1-11)의 1:2절과 결론부(12:8-14)를 이끄는 12:8절에 ‘절대 허무’라는 유사한 내용을, 그 사이에 본문(1:12-12:7)을 위치시킨 것입니다. 또한, 원문에서 ‘헛되고 헛되니’는 두 개의 명사로서, ‘전도자가 이르되’ 보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동사가 서두에 위치하는 통상의 히브리 구문 상, 허무의 절대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헛됨’의 원어는 ‘헤벨 = 수증기, ‘호흡’’이며, 여기에서 ‘실체가 없음’ ‘덧없음’ ‘허무함’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좋은 예가, 인생이 덧없으니 자신이 죽도록 놓아달라는 욥의 탄식(욥7:16)과, 우상의 헛됨은 그것이 나무조각과 돌조각 금속조각일 뿐이지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신32:31)을 의미할 때입니다. 더 나아가, 본절은 ‘헤벨’이 단수형태로 세 번, 복수형태로 두 번, 도합 다섯 번이나 사용되어 하나님을 떠난 삶의 절대 허무가 더욱 강조됩니다. 전도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솔로몬은 우상숭배까지 행하여 이 허무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술, 철학, 우상숭배, 할렘을 통한 쾌락, 사업, 무역, 건축 등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무의미 하였고, 오직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옳은 삶임을 실토합니다. 이 같은 고백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만 경외하고 살도록 동기부여를 받게 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역대상22:4절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레바논 남부 지역은 성서시대에는 시돈, 사르밧, 두로과 같은 도시국가들이 존재하였으며, 신약 시대에는 베니게(Phoenicia)로  알려졌습니다(행11:19;15:3). 수공업과 해상무역에 뛰어난 베니게인은 가나안 사람 중 이스라엘과 가장 빈번히 교류하였으나, 가깝고도 먼 이웃이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궁궐이나, 하나님의 성전을 준비하거나 건축할 때, 이들은 백향목과 기술자 등 수많은 물자들을 보내어 도움을 주었습니다. 긍정과 부정이 다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는 물자가 풍부한 곳에서 없는 곳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종교와 인종이 담이 될 수 없음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그들의 노력에 따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표현입니다(눅6:35,36) 둘째,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그리스도 왕국의 모형으로, 궁궐이나 성전 건축에 베니게인들의 참여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구성될 것의 예표입니다(엡2장). 문제는 이방 우상의 영향입니다. 심지어 솔로몬은 시돈의 여자와 결혼 했고(왕상11:1), 이 민족과 교류를 통한 우상숭배의 영향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이방인의 도움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편, 신약시대에 이르면, 이방인의 땅이라 불리웠던 갈릴리와 데가볼리 지역은 주님의 복음 전도 중심지가 되고, 시돈과 두로 지방 역시 그 영향권에 들었습니다(막7:24-37). 우리는 우상숭배의 교훈을 잊지는 말되 그리스도의 복음의 눈을 갖고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새번역)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인내
창세기3:17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바이오, 물리학 등의 기술영역 경계가 융합되는 기술혁명입니다. 초연결, 초지능, 융합학에 의해 모든 것이 연결되고 지능화된 사회로 변해 가며, 인공지능과 ICBM(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서비스, 빅데이터, 모바일) 기술의 성숙 및 데이터 중심의 산업구조로 급속히 변혁 중이며, 양자기술의 발전 또한 괄목합니다. 머리 겔만(1929-2019, 노벨물리학상)이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은 금붕어와 다름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분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여 뒤 떨어지지 않아야 하지만, 이렇게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으면 안심이 됩니다. 그분이 만유를 정리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마28:18; 엡1:10). 그러나,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큰 불행입니다! 양자역학을 모르면 금붕어와 다름 없다는데, 하물며 양자역학을 만들어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더 무지하겠습니까? 인간은 그 무지의 대가를 범죄, 전쟁, 질병, 사망, 학대 등으로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길입니다. 물론 신자도 척박한 삶 때문에 고민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도움을 생각하면 염려는 사라집니다(마6:33; 롬8:37).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뜻은 열매를 맺고 그분의 살아계심이 증거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수고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매일묵상(2024/10/14 – 18)


잠언31:28절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일어난다”는 것은 예의를 다하여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며, 남편의 칭찬은 비교급 형식을 띤 최상급입니다(29). 고희연 빈객들 앞에서처럼 가족은 모두 ‘현숙한 여인’에 대한 최상의 감사와 칭찬 그리고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아내로부터 증거를 받기 전에는 그분에 대한 칭찬을 믿지 않습니다”(조지 화이트필드)는 말이 있듯이,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참된 삶이라고 평가될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자들로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우리의 행위를 증언을 할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좋은 이웃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실되고 의로운 일생을 보냈다 하겠습니다. 4세기 말 교부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떠오릅니다. 어거스틴은 “나의 어머니는 남편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주인을 대하듯 하였고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섬기는 일을 통해 여인의 덕성을 남편에게 보여주었고 이러한 모습은 어머니를 아름답게, 존경을 받게 하였으며 남편의 칭찬을 듣게 하였습니다”(고백록). 정반대의 여인들도 있습니다. 남편 아합 왕을 충동하여 온갖 악을 저지르게 했던 이세벨(왕상18장 이하), 권력을 위해 남유다 왕국을 피로 물들였던 이세벨의 딸이자 왕후 아달랴(대하22:10-12), 침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헤로디아와 그 딸 살로메 등이 그 장본인 입니다. 한편,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아내입니다. ‘현숙한 여인’처럼 남편되신 그리스도께 칭찬을 듣고 우리 믿음의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잠언31:29)

잠언31:30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새번역)

30절과 31절은 10-29절의 요약이며, ‘현숙한 여인’이 칭찬받는 근원을 밝힙니다. 첫째는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요(30), 둘째는 그에 대한 주님의 보답입니다(31). 잠언은 이 두 요소를 강조하려고, 먼저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부정합니다. ‘고운 것’이란 ‘매력적인 것’을 뜻하나 ‘거짓되다’고 평가합니다. ‘거짓’은 우상의 헛됨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렘10:14). 이어 등장하는 ‘헛되다’의 원어는 ‘수증기’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수증기는 처음에는 피어 오르지만 이윽고 사라지는데, 아름다움은 우리의 눈을 끌지만 세월에 따라 없어지는 것이 꼭 수증기와 같습니다. 즉, 외형의 아름다움은 매력적이라 사람들이 우선 주목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주의를 당부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할까요?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이것이 현숙한 여인이 보여준 칭찬 받는 행실의 근원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뿌리를 내린 여인의 삶은 가사 관리, 경제 활동, 고결함과 높은 도덕성으로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여인의 가치는 진주 보다 훨씬 값지다 하겠습니다(10). 따라서, 현숙한 여인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임을 새기고, 자녀들에게 “주님을 경외”하도록, 부지런히 가르치며 모범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잠언31:31절
“아내가 손수 거둔 결실은 아내에게 돌려라.  아내가 이룬 공로가 성문 어귀 광장에서 인정받게 하여라.”(새번역)

현숙한 여인의 성공 비결 두 가지 중, ‘주님에 대한 경외’는 앞에서(30) 논하였고, 본절은 ‘노력에 대한 주님의 보답’을 언급합니다. 전단은 ‘현숙한 여인’은 자신의 노력이 열매를 맺고, 그 결과물을 누리는 축복의 선포입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상황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거나, 결실을 맺어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질병, 사망, 수탈-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그 여인을 돌보셔서 수고의 열매를 향유토록 하셨습니다. 시편128:2절의 축복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실로, 성도들의 특권 중 하나는  “우리 손이 수고한 만큼 벌고 이를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착되어진 재산, 지위 등에 만족하면서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충만하게 받았고, 주님은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히13:5). 후단은 ‘현숙한 여인’이 받는 존경의 축복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경외하는 자를 높이신 것으로 그 수단은 덕행입니다. ‘성문 어귀 광장’이란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곳이며, 그녀의 덕행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고대에서 여성이 이처럼 칭송을 받는 것은 흔하지 않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당시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마치 남편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 받은 것입니다. 끝으로, “현숙한 여인”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를 뜻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 지혜로운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계22:12,새번역)

요한복음16:28절
“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긍정적입니다. 등산을 비유로 설명하자면, 우리들은 설령 정상이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정상에 오르려 하는 등산가와 같다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을 초월하는 세상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 밖에 계시지만 인간의 삶 전체에 의미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그림 밖에 있지만 그림에 균형을 가져다 주는 ‘구도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구도점은 작품 내에서 시각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점입니다. 비록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도점은 그림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내고, 시각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합니다. 이 점을 통해 작품의 요소들이 균형을 잡고, 안정감을 갖습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구도점은 작품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포인트입니다. 인생을 균형잡고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 우리는 “예!”라고 대답하며 힘차게 긍정합니다. 이에 반하여 인생을 오직 인간적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까지 인간의 체험을 갖고 설명하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주장도 하지만, 잘못되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의 표상은 큰 관계가 없음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을 통해서 보려는 태도는 마땅히 버려야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시편14:1,새번역)

마태복음 19: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삶의 의미는 행동 없이 생각만으로는 찾지 못합니다. 삶은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가라! 팔아라! 주어라! 오라! 따르라!” 이 말씀을 실천하면 삶의 의미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믿음의 체계 그 이상입니다. 이는 삶의 양식, 곧 책임 있게 자신을 투신하는 행동 양식이요, 하나님 아래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행동 없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겨 있고,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에게만 나타납니다(마11:25). 주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실 책임은 그분의 고유한 개인적 책임입니다. 그 책임을 받아들신 후, 주님은 겟세마네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주어지는 자유를 발견하셨고,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육신 하신 삶의 의미를 확정하였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만이 져야 하는 ‘고유한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 사회 등에 대한 책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책임과 희생을 받아들여야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즉 섬김을 실천할 때 비로소 얻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시겠다고 결심한 순간, 겟세마네의 고뇌로부터 놓여 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자유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같이,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주어지나, 삶의 의미는 그분의 뜻을 행한 뒤에야 얻게 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매일묵상(2024/10/7-11)

잠언31:26절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현숙한 여인이 행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취를 다룬 잠언은, 본절에서 그런 성취를 가져오게 한 영적 도덕적 가치를 언급합니다. ‘입’은 ‘그녀의 입’을, ‘그의 혀’는 ‘그녀의 혀’로서 원문은 시작과 끝에, 그 중간에는 ‘지혜’와 ‘인애의 법’을 배치함으로 내부가 강조된 교차대구법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26절의 중심은 ‘지혜를 베푸는 것과 인애의 법을 말하는 것’에 있습니다. 전단의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는 언어생활의 지혜로움을 뜻합니다. 지혜는 휼륭한 유산과 같이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 솔로몬은 ‘무엇보다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언어생활도 같습니다. ‘때에 맞는 말은 은 쟁반 위에 아로새긴 금사과’와 같습니다. 바울 역시 ‘오직 덕에 소용되는 대로 필요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사역)고 명령합니다. 신자의 언어생활은 매우 중요하며, 기도와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이 분야에서 탁월한 명성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후단의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한다’는, 자비하고 인자한 태도로 자녀와 종들을 가르치거나 지시하는 모습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 마다, 동의가 되고 마음은 은혜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한편, ‘법’은 모세오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토라’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인애의 법’이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의 도를 말합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 만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알기에, 본절은 참된 제자들의 전형적인 삶을 묘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31:27절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27절의 첫 단어는 ‘보살피다’를 뜻하는 ‘차파’로서, 히브리어 18번째 자음( ‘차데’)로 시작됩니다. 알파벹 시인 ‘현숙한 여인’의 찬가는 18번째(10∼27절) 이르렀고, 이제 4 개의 자음만 더 나오면 끝 날 것입니다. ‘차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낱낱이 둘러보심(15:3), 혹은 파수꾼이 적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함(삼상14:16)을 묘사하기에, 집안 대소사를 꼼꼼하게 살피고 다스리는 여인의 태도가 떠오릅니다. 후단의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를 직역하면 ‘그녀는 게으름의 빵을 결코 먹지 않는다”입니다. ‘게으름의 빵’이란 일하지 않거나, 불의한 소득을 상징하므로, 이 여인은 부지런하고 정당하게 일하고 살아 갔습니다. 실로, ‘현숙한 여인’은 노동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정직과 진실에 기초하여 경제 활동을 수행해 왔으며, 그런 성격의 소유자는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게으르게 살아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누구도 게으름의 빵을 먹도록 허용치 않는다”(스코트)고 해석한 학자도 있습니다. 이 같이, 27절은 가정과 경제 활동의 특정부분을 다루지 않고, 그런 결과로 나타나게 된 ‘현숙한 여인’의 성품을 요약한 뒤(전단), ‘정직한 삶’의 결정적인 결과물을 적어 강조합니다(후단). 진정한 지혜란 단순히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격에 내재되어 삶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잠언의 교훈이며,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진 자의 삶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에서 그는 ‘지혜자’로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마가복음5:19절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빅터 프랭클은 정신분열증 환자(60세)의 사례를 보고합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환청을 들어왔고 바보 취급당했습니다. 지나치게 흥분하는 때도 있었지만, 자기 누이동생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았습니다. 프랭클은 누구 때문에 자신을 조절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사랑하는 누이동생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요!”라는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환자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중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랫동안 귀신 들려 고통받은 거라사의 광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 당신을 따르고자 하자,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자비의 빛으로 삶을 깊이 돌아보도록 권면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거라사의 광인과 같이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이해도 해결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광인이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를 보고 이유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그는 일생 주님으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심이 인격의 중심에 자리잡는 현상입니다(벧전3:21). 사랑을 받은 자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 이후 사라졌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그 따슷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재창조된 인간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누가복음3: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심리치료(요법)’란 심리적 문제를 심리치료 전문가와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면서 자기 이해에도달하나, ‘의미치료(요법)’은 환자의 세계관을 재조정하여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과정입니다. 빅터 프랭클에게 명석하나 선천성 우울증에 자주 빠지는 여교사가 찾아 왔습니다. 처음에는 약을 처방하여 신체적 치료를 시도하였지만, 그 우울증은 심리적인 문제에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심리치료를 도입하자 이 환자는 갇혀 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비하감, 삶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빈곤감 등을 모두 내려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녀는 운명적인 우울증의 재발로 무력증에 빠져 음울하게 살아 왔었습니다. 프랭클은 “가능한 한 우을감을 무시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녀를 ‘로고테라피(=의미요법)’의 치료 영역으로 이끌었습니다. 프랭클은 실존분석(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환자에게 발생하는 운명적인 우울증에 스스로 도전하도록 깨우쳤습니다. 그 여교사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고 훨씬  책임감 있게 살아가게 되자, “저는 선생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실 때까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써 보냈습니다. 탕자는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제정신이 들었을 때)’(눅15:17, 사역), 자신이 설정한 쾌락 중심적 삶의 문제점을 깨닫고 책임성 있게 그것을 고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돌이켜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을 향해 살겠다는 마음의 결단’은 회개의 본질입니다. “침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벧전3:21,새번역)


시편40:8절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새번역)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질병과 치유를 함께 생각하면 대답이 좀 더 쉽습니다. (1) 인간을 순전히 생물학적 유기체로만 볼 경우, 유기체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는 약물과 수술로만 고치고자 할 것입니다. (2) 인간 존재를 어떤 심리적 장치로만 파악할 경우, 심리학적 상처(트라우마)를 밝혀내는 일에 기반을 두고 치료할 것입니다. (3) 인간 존재를 단지 영적(or 정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경우, 삶에 대한 의미를 중심에 두기 때문에 환자의 가치 체계 훼손이 질병이라 간주하고 치료할 것입니다. 따라서, 치료는 상기 3가지 차원이 모두 고려되어야 하나,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설명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도 삶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육체적 질병(맹인, 열병, 나병 등), ‘심리적 질병(죄로 신음하는 중풍병자), 영적·정신적 질병(거라사 광인), 그리고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고르반 제도를 통한 부모공경 계명을 왜곡한 바리새인의 가르침)를 모두 고치셨습니다. 몸의 질병은 기적적인 치유로, 과거의 죄로 신음하는 심리적 고통은 죄 사함을 주심으로, 귀신에게 사로잡혀 영적·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자에게는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는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밝혀내고 교훈하심로 바로 잡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고의 틀 내에서 행동하도록 가르치신 점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요8:31,새번역)

매일묵상(2024/9/30-10/4)


잠언31:24절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31:13-23절에서는 현숙한 아내의 유능하고도 성실한 활동과 그에 따른 복된 결과를, 24절부터 29절까지는 같은 내용을 반복합니다. 그 중 본절은 이 여인의 경제 활동 즉, 생산과 사업의 성과를 알려줍니다. ‘베로 옷을 지어’는 ‘세마포’ 혹은 ‘베로 만든 겉옷’으로 번역되나, ‘고급 속옷’으로 보입니다. ‘띠를 만들며’는 ‘허리띠’를 의미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으로 짜여진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옷을 고정시키거나 옷맵시를 위해 허리띠가 필수품이었습니다. 통상 가죽으로 만들었으나 보석이나 금으로 장식된 값비싼 것들도 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 물건들은 일차적으로 가족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나, 이 여인은 더 많이 생산하여 상인들에게 판매하였습니다. 조선중기(16세기)는 양잠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이황(퇴계, 1501-1570)의 어머니 박씨는 여덟 남매를 혼자서 농사와 양잠으로 키웠습니다. 누에 사육은 여인들의 농가부업이었고, 세심한 주의와 관리를 요하였습니다. 그러나 퇴계가 아들에게 쓴 편지에는 양잠에 관한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 만큼 퇴계는 양잠산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8세기가 되면 사대부들도 참여하였다고 하니, 퇴계의 관심은 2백년이나 앞섰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퇴계는 성리학에 전념하였지만, 가정 경제도 소홀하지 않고 균형 잡았습니다. 아담(사람)은 동산관리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손이 주께서 주신 일을 발견하면, 무엇이든지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합니다(전9:10).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잠언31:25절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현숙한 여인은 눈이 와도 염려하지 않았는데(21a), 본절에서는 닥칠 수 있는 어떤 역경도 비웃고있습니다. 본문의 ‘옷을 삼고’에 해당하는 ‘레부솨흐’는 ‘의복’이라는 의미의 ‘레부쉬’와 3인칭 여성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따라서 ‘능력과 존귀는 그녀의 옷이다’로 직역됩니다. 구약에서는 옷을 매개로 사람의 특성과 성품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추위를 대비하여 가족들을 홍색 옷으로 입혔지만(21a), 그녀 자신의 옷은 ‘능력과 존귀’입니다. ‘능력’에 해당하는 ‘오즈’는 ‘힘’ 즉,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에너지를 뜻합니다. ‘존귀’란 ‘아름다움, 화려함, 위엄’ 등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그녀를 동료들 위에 놓게 하는 위엄을 보여줍니다. 그녀에 대한 칭찬은 이 이상 높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년과 노인 세대가 갖는 장점(예: 20:29절의 ‘능력과 존귀’)을 모두 그녀에게 귀속시켰기 때문입니다. 후단의 ‘후일을 웃는다’는, 적을 조롱하는 승리자와 같이 그녀는 미래에 닥쳐올 역경들을 비웃습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새번역)로 해석되지만, 70인역이나 라틴역과 같이 “마지막 날에 기뻐한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숙한 여인은 생존 시에는 모든 과정을 힘차고 고결하게 살아갔고(전단), 죽음이 임박할 때 결코 두려워 하지 않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후단)의 묘사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31:30). 본문은 믿음의 여인의 아름다운 일생을 단지 6개 단어(히브리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누가복음1:10절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새번역)

본문은 BC 5년 경, 제사장 사가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중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단 우편에 천사장 가브리엘이 나타나 늙도록 자녀가 없던 사가랴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집니다. 이 ‘좋은 소식’(복음)을 믿고 집으로 돌아간 사가랴는 늙은 아내 엘리사벳을 통해 침례 요한을 낳게 됩니다. 사가랴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난 사건을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영적 경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돌보셨다는 은혜를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은혜의 체험을 갖게 되면,  놀라운 황홀경, 기쁨, 평강 등을 또 경험하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를 간직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책임을 다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등장하는 거라사 광인도 같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 자신을 괴롭히던 군대 귀신들로부터 자유함을 받습니다(1-20절). 이 은혜를 받자 그는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섬기고자 함께 머무르도록 요청합니다. 주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를 주신 이유는, 그를 온전하게 하사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이전의 이웃들과 함께 살면서 일상의 임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생활 방식, 삶의 자세는 완전히 바뀌게 되며, 삶이 변화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합니다. 그를 보고 들은 주 변 사람들은 모두 놀랄 것입니다. 이것이 간증이요 복음의 전도입니다.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리하니 사람들이 다 놀랐다”(막5:20,새번역)

누가복음 22:24절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오늘 본문은 최후의 만찬 중 일어난 제자들 사이의 다툼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요13장). 주님의 혁명적인 가르침 중 하나는 ‘위대함은 섬김에서 나온다’는 교훈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을 받으실 때 “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선포하시고, 공생애에 임하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항상 주는 삶이요,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의 시가 떠오릅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편37:21). 체포당하기 직전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십자가 상에서는 회개하는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하셨습니다. 많은 삶의 방식이 있으나, 섬김이란 삶의 방식”이 단연 최고입니다. 섬기면 낮아지고, 손해도 보겠지만, 주님이 높이실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주님을 높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막10:30).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만, 섬김의 분야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섬기고자 하는 일에 적합한 은사, 기술 혹은 경험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롬12:3). 겸손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지혜롭게 되어 있습니다만,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마태복음5: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새번역)

‘기우(杞憂)-기나라 사람의 근심’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행태를 가리키는 고사성어입니다. 기우가 지나치면, 신경증으로 발전합니다. 따라서, 신경증의 고통은 대부분 잘못된 견해에서 나오지만, 그들은 제멋대로 설정해 버린 그릇된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반되는 요구들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기차만 타고 다니거나(고소공포증), 아예 집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이란, 안전이 보장된 높은 장소에서도 발작을 일으키는 정신병으로, 직접 창문너머로 밖을 보지 않아도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광장공포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쉽게 탈출할 수 없거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를 두려워하여 넓게 탁 트인 공간을 무서워합니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특히 과학시대의 교육을 받은 신경증 환자들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결정론의 오류에 쉽게 희생당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부적절하다고 깨달아도, 더 이상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운명이나 환경에 내맡긴 채 살아갑니다. 이들의 세계관·인생관은 분명히 교정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들고 오셨을  때 행하신 일이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니다. 부자 청년, 사마리아 여인, 마르다, 바리새인 시몬, 그리고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주님은 이를 분명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자기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삶의 혁명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16:2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