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9/23-27)

잠언31:22절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현숙한 여인’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불’ ‘세마포와 자색 옷’은고대에  부자들이나 권력자들만 사용하고 입는 고가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숙한 여인’에게는 사치품이라기 보다는 품위 유지를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익힌 훌륭한 직조 기술로 침대용 이불과 아름다운 옷을 짜고 사용합니다. ‘이불’은 복수로서, 침대를 부드럽고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7:16참조). 그녀의 옷은 농업과 축산에서 나온 최고급 직물로 만들어졌습니다. 31:13에서 아마(린넨,삼)로 옷을 짓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본절로 들어오면 ‘세마포(고급 린넨)’로 발전합니다. 고급 린넨은 통상 이집트로부터 수입되었는데,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자 입었던 바로 그 옷입니다(창41:42). 또 ‘양털’(13) 대신 ‘붉은 보라색으로 염색된 양털’을 옷의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역시 전통적으로 수입품이었습니다. 이 붉은 염료는 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조개 껍질에서 추출하였기에 비쌌고, 따라서 부와 사치품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가 이 염료로 염색한 직물을 판매하였습니다. 누가는 또한 그녀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게 하셨고, 그녀와 온 가정이 침례를 받습니다(행16:14).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의 첫 번째 교회였고, 루디아는 신약판 ‘현숙한 여인’입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새번역)

잠언31:23절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당시 성문은 사람들이 모여 공적인 일을 논의하거나 재판하는 장소로 장로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정 이전에는 장로들의 권위 하에 각 공동체의 질서가 세워졌고(룻4:1-12), 또한 장로들은 외부 세계에 대하여 공동체를 대표하였습니다. ‘그 땅’이란 ‘성문’과 병행구절로서, 그들의 영향력이 공동체를 넘어 더 큰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았다”는 말은 그녀의 남편이 공동체 가운데 인정 받아 명성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몇 가지 이유를 들면, ①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가정은 평안하고 번영하였습니다. ‘가화만사성’이지요. ② ‘인정을 받으며’의 원어는 ‘노다’이며, 이는 개인적 접촉을 통해 경험해 안다는 ‘야다’가 어근입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은 그 남편의 명철함을 경험해 알고 있었고, 장로들과 함께 재판석에 앉을 만큼 존경받았습니다. ③ 아내된 ‘현숙한 여인’이 준비하여 입힌 ‘홍색 옷’(21b)과 같은 고귀한 의복도 명성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④ ‘현숙한 여인’은 ‘그 행한 일 때문에 성문에서 칭찬을 받는다’(31)고 한 것 같이, 그녀의 성품과 천재성은 남편의 머리에 씌여진 면류관입니다(잠언12:4). 실로 ‘현숙한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귀합니다(31:10). 한편, 어떤 의미에서 ‘현숙한 여인’은 성도들을 상징하는데,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올바른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마5:16), 주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고린도전서13: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빅터 프랭클의 우울증 환자였던 여교사의 글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실 때까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우울증은 “삶의 의미”를 못 찾고, 이에 따른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 하는 병입니다. 삶의 의미는 창조적 가치, 체험적 가치, 자세적 가치의 실현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프랭클). 인간이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 자체가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자세적 가치). 결국 ‘자세적 가치’는 가치괸, 철학, 혹은 신앙으로 불리워지는 정신적·영적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강제수용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삽질 밖에 없고, 체험할 수 있는 일은 징벌과 굶주림과 추위뿐이었다. 그래도 인간에게 본질적인 자유가 남아 있고 자세적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 앞에서 인간은 자유롭다…이 자유는 어떤 조건도 부인한다. 그것은 ‘모든 상황 아래서’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되는 자유다”. 프랭클은 전문직에 종사하다 죽을 병에 든 어느 청년의 사례를 언급하며 주장을 뒷받침합니다.(청년의 사례는 내일 묵상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 가치와 모범, 그리고 소망을 제시합니다. 복음은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속으로 침례를 받아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으니 이제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종들로 살아가라”는 믿음의 자세, 주님의 훌륭한 모범, 그리고 이를 본받은 사도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갖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요한일서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한 청년이 수술이 불가능한 척추종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신이 점차 마비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직업을 그만 두었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창조적 가치)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중에도 체험적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 예를 들어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읽으며 다른 환자들을 만나 서로 격려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활동까지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신이 마비되었을 때, 그는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를 자세적 가치에서 찾았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동료 환자들을 상담해 주는 역할을 자임하였고 최선을 다해 귀감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용감하게 참아냈다. 죽음을 하루 앞둔 날, – 그는 그것을 예견하였다 – 그는 당직 의사(빅터 프랭클)가 밤중에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 오후 진료시간에 그 의사가 회진 왔을 때 청년은 저녁에 주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의사가 주사 때문에 한밤중에 일어나지 않게 하고 그래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도록 하는 배려였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말씀에 내포된 의미를 훌륭하게 실천한 대목입니다. 물론, 이 청년이 그리스도인인 여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불신자라도 프랭클의 의미요법, 더 나아가 상기 황금률에 감탄하여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이로써 구원받지는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덕으로 칭찬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사례는 주님의 뜻을 실천할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권리를 선포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마가복음1: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자신의 불치의 병을 우연히 알게 된 저명한 한 젊은 수학자의 편지입니다: ‘나는 나의 도전적 정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되었네요. 이 투쟁에서만큼은 애초부터 승리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지요. 차라리 이 투쟁은 남은 기력의 마지막 소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이유 없는 투쟁이라고요? 우리 시대의 철학 서적에서는 이 말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투쟁 그 자체가 중요하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이유도 상실될 수 없습니다…..저녁에 우리는 안톤 부르크너의 교향곡 4번 Romantic Symphony를 감상하였지요.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우주적 장엄함이 나를 감쌌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값싼 감상주의에는 틈을 내주지 않을 겁니다”(「의사와 영혼」빅터 프랭클). 이 수학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세적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창조적 가치나 경험적 가치들도 멘토의 도움이 요청되지만, 자세적 가치의 경우는 필수적입니다. 그 만큼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의 전환이 어렵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는 38년 간 누워 있었다가 고침 받았으나, 후에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는 예수님의 경고를 받자, 오히려 안식일에 자신의 병을 고친 이가 예수임을 고발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기적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세적 가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세를 바꾸는 회개 없이는 죄 사함도 천국도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매일묵상(2024/9/19-20)


잠언31:20절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곤고(가난)하고 궁핍한’(9) 이란 문구는, 그 당시 힘 없고 불리한 처지에 있는 가난한 자를 지칭하는 일상적 언어로 보여집니다. 왕은 법정에서 입을 열어 그들의 이익을 옹호해 주지만, ‘용맹한’ 이 여인은 그들의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려고 손을 폅니다. ‘현숙한 여인’을 용맹하다고 일컫는 것은 몸은 연약하지만, ‘도덕과 자비의 용사’이기 때문입니다. ‘손을 펴며’그리고 ‘손을 내밀며’ 그녀는 도움을 주려고 손짓합니다. 이 여인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하여 번 것을, 움켜쥐지 않고, 궁핍한 자에게까지 도움을 줌으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의 실천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목적은 단순히 가족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제하려는 마음도 갖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사회보장이 어느 정도 정비되었지만, 흉년이 빈번히 찾아 들었던 고대에는, 가난한 자가 살아갈 수 있는 방도는 친척이나 부자의 자비에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고엘 – 친족구속자’를 통한 구제 제도를 확립하였고, 룻기는 이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룻기에서 보아스는 고엘이 되어, 가난한 나오미와 룻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족 구속자인 ‘고엘’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도입니다. 죄악과 마귀의 수탈에 허덕이던 인류를 고엘이신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숙한 여인’은 지혜의 화신이고, 이는 주님을 표상한다 하겠습니다. 주님을 통해 아버지께 영원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9:9)

잠언31:21절
“온 식구를 홍색 옷으로 따스하게 입히니, 눈이 와도 식구들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다.”(새번역)

잠언의 ‘현숙한 여인’의 행장에는 그녀가 만든 화려한 옷이 언급됩니다. 다만, 옷을 팔아 돈을 벌고 식탁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눈 내리는 추위에서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걱정하는 일이 없다’는 예상되는 위험을 충분히 대비하였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우기는 겨울이고(11월∼3월), 가장 큰비는 1월, 2월에 내립니다. 이때는 폭우가 쏟아지며, 예루살렘과 같은 높은 산지에는 때때로 눈이 내리고, 비는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따라서, ‘눈’은 식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혹독한 추위에 대한 환유입니다. ‘홍색’은 붉게 물들인 실로서, 아마가 아니라 값비싼 양털을 뜻합니다. 아마는 염색이 쉽지 않습니다. 염료기술이 일천했던 당시에는 물감을 들인 채색 옷은 부자나 귀족만이 입는 비싼 옷이었습니다(창37:3). 따라서 ‘현숙한 여인’이 모든 식구들을 위해 값비싼 양털로 짠 ‘홍색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녀의 재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다만 과시를 위함이 아니라 겨울의 추위 속에서 건강을 배려 한 것입니다. 그녀는 지출의 때와 대상을 알고 있으며, ‘마음도 따뜻합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과 경제생활의 상관관계를 모범적으로 보여줍니다. ‘현숙한 여인’은 주님이 맡기신 가정에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며, 지혜롭고, 마음은 사랑으로 따뜻합니다. 열심히 일만 하면 돈은 벌겠지만, ‘현숙한 여인’처럼 모든 이웃, 특히 가족을 돌보며,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을 경외하기에 터득한 ‘사랑의 기술’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매일묵상(2024/9/9-13)


잠언31:18절
“사업이 잘 되어가는 것을 알고,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새번역)

18절은 “현숙한 여인”이 부지런함의 이유를 알려줍니다: “사업이 잘 되어가는 것을 알았다.” 즉, “현숙한 여인”은 자신이 벌어들인 경제적 이익에 고무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잠언은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음식물을 나누어 주고, 여종들에게 할 일을 맡긴다”는 15절을 고려하면, 도대체 이 여인은 언제 잠을 자고 휴식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는 해석들이 많으나, 부지런한 사업가들의 삶이 실제로 그러합니다. 사업가들은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면, 통상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책임감을 갖고 일합니다. 독일의 아우토반을 본받아,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하였습니다(1968.2.1). 난 공사를 앞두자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호출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지도를 보면서 걱정하는 사이 작업복 차림의 정회장은 졸고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현장에서 밤을 새다시피 하며 작업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언짢은 표정 대신, 잠이 깨기를 기다렸다가 죄송해 하는 정회장의 손을 잡고 “정 사장, 내가 미안하구만” 하였다고 합니다. 가난한 대한민국의 발전이란 공동 목표를 놓고 힘을 합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사업가의 덕목은 이익이 되는 분야를 누구보다 빨리 간파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이와 같이 ‘현숙한 여인’은 밤새 직물을 짜서 팔아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녀의 번영을 단적으로 알려줍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잠언14:24).

잠언31:19절
“한 손으로는 물레질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탄다.”(새번역)

19절은 “현숙한 여인”의 실 뽑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묘사합니다. 그녀가 하는 가사일의 수행은 가정의 복지와, 소득 증대까지 고려한 생산활동입니다. 그녀는 옷감을 위해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고”(13) 물레질과 실을 만드는 작업으로 발전시킵니다(19). 부지런하고 유익한 그녀의 두 손은 궁핍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손으로 변모합니다(20). 실로 가정, 공동체, 그리고 주님께도 보배와 같은 존재입니다. “현숙한 여인”의 중심에는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놓여 있고(30),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가정과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즐깁니다(시37:3). 따라서, 밤 늦도록 부지런히 옷을 만들고, 열심히 포도원을 가꾸는 동시에, 일찍 일어나 각 여종들에게 가정의 일을 나누어 주고, 그 날 할 일들을 위해 준비시키는 행동은 그녀의 즐거움입니다. 가히 가정의 CEO라 하겠습니다. 그 옛날 대갓집(큰 권세와 부를 가진 큰 집) 맏며느리는 약 100명의 식솔을 섬겼으며, 하루 쌀 한 가마니로 밥을 짓고, 계절을 따라 많은 필수품들을 빈틈 없이 준비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많은 지혜와 경험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거래하는 시장의 큰 손으로 존중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갓집 맏며느리와 잠언의 “현숙한 여인”는 모두 ‘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으며’(25), 그들의 가정은 다 번영하였지만, 특히 “현숙한 여인”은 인애의 법을 논하며 겸손의 덕을 갖추었습니다(26). 그 비결은 “주님에 대한 경외”이며, 모든 덕행의 근본입니다.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잠언31:29)

누가복음10:38절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마르다는 분주하였지만, 마리아는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의 열정은 불만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자신의 일에 성취를 내려고 몰두하는 분들의 공통적 특징이 책임감과 열정입니다.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임무만을 주요 목표로 내세울 때 관여된 사람들의 가치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남이나 인격적 대화 존중 등 체험적 가치의 실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마리아는 전통적 관습을 따라 언니를 도와 대접하는 일, 즉 여인의 창조적 가치의 실현을 소홀히 한 면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두 섬김은 꼭 필요하며, 모두 주님을 사랑해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한 것이지만, 서로 다른 가치의 통합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를 가볍게 꾸짖으신 것은 언니부터 이런 부분을 사랑 가운데 통합하기를 원하신 면이 있습니다. 본문의 일화는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기에’(요11:5), 창조적 가치와 체험적 가치가 사랑 안에서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통합을 위해서는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야 하고, 이어 더 높은 가치 안에서 각각의 위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은 진보와 보수가 격돌하고 국민의 심판을 통해 사회가 발전해 나갑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은 사랑 안에서 통합에 이르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의 자기 희생의 사랑 가운데 가치를 통합하는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마태복음9:27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삶의 의미”의 발견을 위한 3번째 방법은 “자세적 가치의 실현”입니다. A는 공동 도서관에서 자발적 연구 작업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는 길을 건너는 공포가 있어 다른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주변의 노력들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삶의 의미는 창조적 활동(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나 사람 또는 사물을 체험함으로써(체험적 가치의 실현) 발견되나, 만약 이런 길들이 막히면,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자세적 가치의 실현”의 중요성은 바로 고통에 대한 대처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의미는 창조적 가치나 체험적 가치들을 실현함으로써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자세적 가치들의 실현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고, 자세적 가치의 실현은 고통 속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 가운데서도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는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행동이나 인내를 통해서 보석으로 만들 수 없는 곤경은 없다”는 괴테의 말을 되새기게 합니다. 프랭클은 괴테의 이 말을 즐겨 인용하면서 환자들에게 “직접적으로는 정신 분석의 방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마음 자세를 바꾸게 하여 모든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심리학, 정신의학 등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입니다. 기독교는 중생(거듭남)의 종교로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할 능력을 줍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9:29,30a)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빅터 프랭클에게 박테리아 공포증에 사로잡힌 어느 어머니가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여러 명의 어린 자녀를 두었는데, 많은 염려 끝에 병에 걸리지 않도록 외출을 삼가하였고, 어떤 방문자도 집 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손을 씻었고, 남편이 어떤 아이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이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남편과 이혼하려고 하다가 자살을 기도하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그녀의 공포를 과장하여 시연하고 그녀의 염려의 문제점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 환자를 불러 임상 치료의 청중 앞에서 내가 한 행동을 따라도록 했습니다. 강의실 마룻바닥을 손으로 쓸며 “박테리아가 이보다 더 많아질 수 없습니다”라고 한 뒤, 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습니다. 물론 환자도 따라 하였습니다.” 그런 역설적 의도를 깨닫자 환자는 충격과 함께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와 함께 마음 자세도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닷새 동안 같은 치료를 받자, 3년이나 병들게 했던 강박 관념과 피해망상증이 90%이상 사라져 버렸습니다. 징크스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만유의 주님은 그 징크스에서 우리를 자유토록 하시기 위해, 그런 징크스를 통과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징크스가 생기면 그런 우스꽝스러운 현상에 대하여 웃어넘기고,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믿고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매일묵상(2024/9/2-6)

잠언31:16절
“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16절은 ‘현숙한 여인’의 적극적인 경제 활동을 묘사합니다. ‘살펴 보고’에 해당하는 ‘자메마’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계획하다’는 의미로써, ‘현숙한 여인’이 구입하려고 밭의 상태와 경제성 등을 신중하게 따져보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모든 각도에서 생각해 본 뒤, 대담하게 자금을 집행하여 구입합니다. 자금의 출처는 어디이겠습니까? ‘자기의 손으로 번 것’입니다. 원어는 ‘그녀의 손바닥의 열매’로서, 열심히 손으로 일하여 직물을 생산하고 팔아 얻은 소득을 말합니다(31:13,24). “포도원을 일구며”는 먼저 땅을 갈아 엎고, 돌을 전부 골라내어 울타리와 쓸만한 밭을 만든 후에, 최상의 포도나무를 심고, 원두막과 포도주 틀을 세우는 과정을 지칭합니다. 10년은 노력해야 좋은 포도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한 우물을 10년은 파야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표 판매원 등과 같이 노력해도 기술이 늘지 않는 일은 청년들이 택할 직업이 못 됩니다(버트란트 러셀). 노력해서 도달할 장래가 없는 것이죠! 현숙한 여인은 그 반대입니다. 한편, ‘산다’의 주어는 ‘현숙한 여인’입니다(여성 대명사). 일반적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땅의 구매와 같은 일은 가정의 중대사이기에 가장이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는 문서상으로는 가장이 밭의 소유주로 등재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에 여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회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현숙한 여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 하겠으며, 이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의 경제적 측면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잠언31:30,새번역)

잠언31:17절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토마스 모어의 책「유토피아」(1516년)에서는 모든 주민이 하루 6시간만 일하고, 생산물은 다 공동체에 귀속되며 개인은 공정한 분배를 받기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모두 부유하다고 합니다. 꿈 같은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가 없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공정한 분배를 행할 수 있는지 토마스 모어는 적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공정한 분배는 오직 정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31장 10절이하에 현숙한 여인을 등장시켜, “사랑의 모범”이 작동하는 가정을 꿈꾸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연하게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또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에서 ‘팔’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현숙한 여인이 가정을 위해 강한 의지를 갖고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표현 합니다. 사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종들에게 일을 나누어 주고, 밭과 포도원에서 일한 뒤, 밤에도 물레질을 합니다. 그런 불굴의 동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가정 즉,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남녀 하인들을 맡겨주셨음을 알고 책임감을 갖습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단순히 자신을 치장하고 안일하게 사는 길이 아니라, 맡겨진 가정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 삶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어머니, 며느리, 여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지혜를 갖춘 것입니다. 그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고, 경외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그 비결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마태복음26: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인간 관계는 개방적이고 정직해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본문은 당신의 임박한 체포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와 보니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주님이 안타까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반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려 도움을 요청하는 가나안 여인의 부르짖음에, 제자들은 감정을 감추지 않고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예수께 불만을 토로합니다. 솔직함은 상담에서도 중요합니다. ‘터니어’는 대인 관계에서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나는 진찰실에서뿐 아니라 길거리의 가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타인에게 보다 개인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따뜻한 인간성을 갖도록 도와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마치 신선한 미풍처럼 우리 가운데에서 불어나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의사는 자신이 심하게 화를 낸 다음에 생겼던 변화를 말합니다: “전에는 내 직무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호메로스의 시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분노 때문에 한 인간이 되었고 호메로스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 그리고 그분이 친밀하게 만나셨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솔직한 대화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어떤 행동에도 주님은 언제나 현재의 모습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시는 장면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포용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갖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롬8:14,사역)

누가복음10:41,42절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체험적 가치의 실현은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또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이 방문하자 잘 대접하려는 마음에 마르다는 분주하였지만, 동생 마리아는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주님께 불평하였으나, 주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본문은 선한 사라미아 사람의 비유 다음에 위치합니다. 거기서 제사장, 레위인은 도움이 필요한 동포를 지나치는데, 거룩을 요구하는 제사 직분을 핑계 삼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당장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향합니다. 늘 하는 제사 직분(창조적 가치 실현)과 강도당한 이웃의 간호(체험적 가치 실현) 사이에 바른 선택, 즉, ‘삶의 의미의 실현’은 무엇이겠습니까? 후자입니다. 물론 주님은 창조적 가치의 실현- 제사장의 역할, 음식 대접 등-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가치’만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유일한 영역은 아닙니다. 어느 가정주부는 세 자녀를 거느린 진부한 가사일을 불평하는데, 바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와 비슷합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올바른 자아실현의 방향을 잡고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같이 “체험적 가치의 발견”은 경험이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후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어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주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로마서 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새번역)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보편적 방법은 자신의 일 – 가사, 공부, 근로, 사업, 학문, 예술 등 -을 통해 ‘창조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만남, 배움, 경험(황혼의 아름다움 등) 따위를 통해 체험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어느 실내장식 화가(61살)와 상담한 내용입니다. 그 화가는 신경질환이 악화되어 자신이 사랑해왔던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체험적인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가 더 이상 창조적인 가치들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지난 날 자신의 직업을 통해 거둔 성공, 현재도 활발한 예술적 감수성, 그리고 행복한 부부 생활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현재 추구하는 지적인 탐구- 강의, 읽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 -에 집중하면서 상담하였다.” 그 결과 손작업으로 더 이상의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삶에도 여전히 의미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자 그 화가는 강인해 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체험하는 일보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마르다에게 마리아가 택하였던 “좋은 편”(눅10:42)이란, 마리아가 추구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주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원기회복을 위한 음식이 필요하셨지만, 그분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필요하였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롬14:19절,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