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08/26-30)


잠언31:14절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본문은 ‘현숙한 아내’를 무역선에 빗대었습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은 히브리인이 아니라 페니키아 상인들이 주도하였고, 두로와 시돈은 그 때문에 번영하였습니다. 무역을 통한 부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현숙한 아내’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은, 그 만큼 진취적으로 가정 경제를 일구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라는 표현은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돈을 버는 것은 남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고대에 여자가 무역을 통해 필요한 양식을 들여오는 모습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지혜를 가진 모든 여인들의 삶이 그와 비슷하였습니다. 1525년 결혼 후, 마르틴 루터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았고, 경제적으로도 큰 규모의 살림을 유지하였습니다. 선제후(選帝侯) 요한 프리드리히는 방 40개가 딸린 수도원을 루터에게 결혼 선물로 주면서, 교수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고 결혼 축하금으로 140굴덴이 들어 왔지만- 소 한 마리에 2굴덴 – 살림은 빡빡하였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컸고, 루터는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남편이었습니다. 수많은 식솔의 식사 준비와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카타리나의 몫으로, 닭과 돼지를 치고 채소를 심은 것은 물론 수녀원에서 배운 양조 기술로 맥주를 빚어 팔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재(理財)에도 능해 어려운 살림에서도 돈을 모아 부동산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면, 책임감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언31:30)

잠언31:15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4절은 ‘현숙한 아내’가 부족한 물품을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적극적인 노력과 진취적인 자세를 묘사하였지만, 본절과 16절은 가정을 다스리고 경제활동에 주력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14절은 ‘무역선’ 의 이미지로 표현하나, 본절은 ‘먹잇감을 주는 암사자’의 이미지입니다. ‘밤이 새기 전에’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녀는 아직 밤인데 일어난다’입니다. 암사자는 밤에 사냥을 합니다만, ‘현숙한 아내’는 가족을 사랑하고 재산을 불리고자 모두 자는 밤중에 일어나 하루를 대비합니다. 책임감을 실천하는 근면의 화신으로, 자신의 안락보다 가정의 복지를 염려하는 그녀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근면 성실해야 하는데, 가정의 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음식’은 ‘테레프’의 번역으로, ‘테레프’는 ‘먹잇감인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찢어 먹는다’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현숙한 여인’을 포식동물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새끼들에게 ‘먹잇감’을 주듯이, 범접 못하는 위엄을 갖고 전투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맥그리쉬는 말합니다: “최소한 이 단어는 큰 힘과 기량과 독창성을 발휘한 후에만 얻을 수 있는 식량을 나타내며, 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아내의 특별한 능력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법을 심중에 간직하고(30), 또 지혜로워 각 여종들에게 분배할 적합한 일의 종류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생산적이고 질서 있게 돌아갑니다. 잠언을 가르치는 솔로몬과도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를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함이다.”(잠언1:4,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7:50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인격적 성숙의 길은 자아실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벗어나 분명한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투신하는 것인데, 올포트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 자기 객관화(자기분리)의 길 (2) 관심사를 넓히는 길 (3)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으로 나가는 길. 첫째, 자기 객관화로서, “한국 떠나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겠다…부족한 연구비 따내려 밤낮 제안서만 써내고…” 어느 스위스 공대 교수(한국인)의 체험기가 말해 주듯이, 이는 관심사에서 멀어지거나, 타인(멘토 등)의 개입과 같은 계기가 필요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눅7:36-50). 그의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은 기적은 행하나 배움이 없는 사람이고, 죄인인 그 여자는 구제불가능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빚 탕감의 비유를 통해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시몬의 대답을 이끌어 내신 뒤, 시몬의 잘못된 행동을 반추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손님 대접에 관련된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만 죄사함 받아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아니라, 죄인인 그 여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았고, 이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인 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대화 내용은 쉽지만, 인간의 교만한 본성과 관련되어 있어 실천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복음과 함께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자아를 극복하고 타인 존중이 가능합니다. 복음과 함께 성령님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입니다(롬8:4-9).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에베소서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인격성숙은 타인을 고려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이를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관심사를 넓히는 것인데, 관심사가 넓어지면 인격적 성숙, 치유,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을 받은 주님은 “이 여자를 보느냐”(눅7:44)라고 하심으로,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은 시몬에게 그녀를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온전하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여주신 은혜를 선포합니다. 우리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지만(롬3:23), 화목제물로 세워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갈3:28).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 신분, 남녀의 차별은 없고 한 형제 자매로 존중하기에 주님을 닮은 인격적 성숙에 이릅니다. 또한, 관심사를 넓히면 치유도 일어납니다. 노인들이 은퇴하여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 온갖 질병이 찾아 오나, 관심사에 몰두하면 건강한 삶을 영위합니다. 끝으로, 세상은 자아실현에 몰두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라고 합니다. 이때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즉, 사람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삶을 내줄 때 자신과 타인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짐을 져야 하지만, 타인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은 함께 져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해야 합니다(갈6:2). 섬김이 곧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마태복음5: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인격적 성숙에 이르는 세 번째 길은 ‘통합의 원리’입니다. 좀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여러 가치들이 통합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죄 많은 여인’(눅7:36-50)의 기사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자신처럼 종교적 본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 죄인인 한 여인 등-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의 관심분야인 율법규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되어 율법의 목표인 사랑과 온전함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여자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단죄한 것은(눅7:39), 그가 늘 품고 있던 불만, “왜 모세율법을 행하지 않는가?”, 을 드러낸 것이지만, 무엇인가 결여되었습니다. 사랑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사랑을 통합한 주님의 눈에는 시몬의 삶은 율법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에 미달하였습니다. 시몬이 보는 삶의 반경이 그리 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심 분야에서는 책임감을 느끼고 철저하였지만, 그 영역을 벗어난 사람들을 죄인이라 단죄하고 교제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족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한편, 주님은 회개하는 그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셨으나, 그 말씀 속에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을 통합하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본받는 것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목표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매일묵상(2024/08/19-23)

잠언31:12절
“그의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새번역)

12절은 ‘현숙한 여인의 찬가’ 서론의 요약이고, 본론(13-27절)이 이어집니다. 본론은 칭찬의 구체적인 이유들인 선한 행위들을 열거하고, 각 행위에 내포된 지혜, 강인함, 자비와 같은 성품을 보여줍니다. 즉,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행위마다 묻어 나오고 있고, 그녀가 속한 대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유익한 열매들을 맺으며, 간접적으로는 가정 경제를 일으켜 남편을 높이고, 공동체의 지도자 중 하나로 인정(23) 받게 하는 모습을 볼 때, 왜 그녀의 값이 진주 보다 귀한지 알게 됩니다. 한편, 본론의 주제, 구조 그리고 시적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면, 본론은 13-18절과 20-27절로 나뉘어 지고, 19절(부지런히 실을 뽑아내는 모습)에서 두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됩니다. ①주제의 측면에서, 13-18절은 무역과 생산을 통해 가정 경제를 일구는 모습, 20-27절은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그녀의 고귀한 인격이 생산하는 덕을 노래합니다. ②구조의 측면에서, 답관체(acrostic) 형식이 계속되면서, 13-18절, 그리고 결론인 28절은 원문의 각절 마다 동사로 시작하고(13절의 예: 구한다 그녀가 양털과 삼을…), 20-27절은 동사 이외의 품사로 시작하여 흥미를 돋굽니다. ③시적인 측면에서 주요 단어의 반복이나, 교차대구법이 사용되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에 대한 찬가는 내용도 선하고,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 역시 아름답습니다. 이 같이, 우리의 삶도 선한 열매를 맺고, 그것들을 남에게 덕을 세우는 아름다운 말에 담아 내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전12:10).

잠언31:13절
“양털과 삼을 구해다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기를 즐거워한다.”(새번역)

13절부터, 현숙한 아내의 유능하고 성실한 삶, 복된 결과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가정 경제 구축을 위해 힘을 쏟는 모습을 보여줍니다(13-19). 이는 가정을 위해서는, 다른 무엇 보다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는 매우 실용적입니다. ‘양털’은 겨울 옷을 위한 재료이고, 삼은 ‘삼베’를 의미하는 여름 옷의 재료입니다. ‘구해다가’는 교역을 통해 재료를 구입하거나 혹은 직접 아마를 재배하고 양의 털을 깍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여인은 가정에게 닥쳐오는 겨울과 여름의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하되, 부지런함과 치밀함 그리고 계획성 있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가족들의 옷을 만드는 수준을 넘어 그녀는 자신이 생산한 옷들을 팔아 수입을 얻고 가정 경제를 일구어 냅니다(24). 그래서 그녀는 열정을 갖고 부지런히 일합니다. 또한, 그녀는 하녀들을 거느리며 일을 나누어 주지만(15), 자신의 손으로 일하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옷 만드는 기쁨과 그 옷을 가족에게 입히고, 또 그것을 판매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즐거움은 현숙한 아내가 부지런히 일하는 원동력입니다. 공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논어 옹야편).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한다면, 자연히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요 축복의 사람입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시편40:8,새번역).

창세기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새번역)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 한 뒤,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3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①창조적 가치의 실현 ② 체험적 가치의 실현, ③ 자세적 가치의 실현. 먼저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란,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여 무엇인가를 삶에 기여하고자 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어진 책무가 완성되면, 그에 따른 만족감과 안도감이 찾아오나, 반대로 해야 할 일이나 수행해야 할 책무 또는 자신의 잠재 능력을 발휘하게 할 임무가 없을 때 사람은 깊은 절망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조적 가치의 실현’은 인간 실존의 근저에 있다는 말은 타당합니다. 프랭클은 강제수용소에 갇혀 지내던 몇 해 동안, 로고테라피의 기본 이론을 정리하여 출간하겠다는 목표가 삶의 의미를 느끼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증언합니다. 또 “빈의 정신병리학 교수이자 90살의 노인인 베르제는 읽어야 할 책들이 책상 위로 꽉 들어 차 있었다. 베르제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었다!”는 그의 말과 같이, 우울증은 흔히 수행해야 할 창조적 임무를 발견하지 못해서 오는 병입니다. 어느 화가가 가스를 틀고 죽으려 하다가, 자신의 그림의 불완전성이 눈에 띠자, 죽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작업에 뛰어들었다는 일화 역시 창조적 가치 실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란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일이 필요하나, 그 일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마4:4)

사무엘상10: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탁구 신동 신유빈 선수는 5살 이전에 탁구 재능을 발견하였으나, 처음부터 자기에게 맡겨진 창조적 임무를 발견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별 의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한 안이한 생활 양식에 빠져,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모험을 거부하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창조적 임무, 삶의 의미 등을 발견하기 위해 매개자(멘토, 선생, 친구 등)의 도움이 꼭 필요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왕 사울 혹은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울은 범죄하여 가장 찌그러진 베냐민 지파 후손임을 자각하고 겸손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선택받자,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용감하게 싸워 이스라엘을 그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왕의 임무를 다한 것이지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백성들을 의식하여 불순종 하자, 그의 왕직은 버림 받았습니다. 백성을 두려워 한 사울은, 하나님이 금지한 아말렉의 우양을 전리품으로 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선택되나, 시글락을 불태운 아말렉 족속을 멸하고 회군할 때 군사들의 말을 듣지 않고, 피곤하여 브솔 시내에 머무른 2백명을, 끝까지 전투한 4백명과 동일한 전리품을 받도록 합니다. 다윗이 세운 공평의 도는 이스라엘 군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b-23a)

누가복음22:62절
“그리하여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비통하게 울었다.”(새번역)

세번 째 예수님을 부인 하자, 닭은 곧 울었고 심문 중의 주님과 눈이 마주친 베드로는 실패를 자각하고 대제사장 뜰 바깥으로 나가서 통곡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고전15:5). 이것이 자주 실패하는 신자들의 마음에 각인된 우리 주님의 모범이자 부활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킴으로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주님의 유훈을 지켰던 것입니다. 실패를 통하여 삶을 배운다는 것은 성숙의 표지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실패로 좌절하는 대신 그 실패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실패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언제나 성공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한 학생이 심리치료를 위한 하계 수련회에 참석한 뒤, “나는 감히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 말도 그런 의미입니다. 이제 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에 뛰어 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빅터 프랭클의 강의는 의미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잘못의 결과를 없앨 수는 없지만, 참회를 통해 자신을 그 행위에서,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 놓을 수 있다. 그는 이미 일어난 일을 변경시킬 수는 없지만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성경의 놀라운 점은 우리와 같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실패, 용서, 회복과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꽉 들어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배움과 위로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딤전3:16,새번역)

매일묵상(2024/08/12-16)


잠언31:10절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10-31절까지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찬가입니다. 형식은 답관체(acrostic)로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의 첫머리가 시작됩니다. 이는 흥미를 유발하고 쉽게 암기하도록 사용된 문학적 장치입니다. 내용은 세 부분입니다. ① 현숙한 여인과 그 남편의 복(10-12) ② 현숙한 아내의 노력과 복된 열매(13-29) ③ 현숙한 아내의 핵심 덕목- 주님을 경외하는 삶(30-31). 본문의 ‘현숙한’의 원어 ‘하일’은 ‘강하다’라는 의미의 어원 ‘훌’에서 유래하여 ‘능력있는’ ‘힘있는’을 뜻합니다. 문맥을 감안하여, ‘현숙한’(개정개역), ‘유능한’(새번역), ‘어진’(공동번역), ‘고상한 성품의-noble character’(NIV) 등으로 번역되지만 ‘유능함-capable’이란 뜻이 핵심이나, 입으로 지혜를 말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남편을 세우는 고매한 인격도 증거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현모양처로서 ‘현명하고 정숙한’ 아내로 이해되고, 개정개역의 ‘현숙한 여인’이란 번역이 제일 좋습니다. 남편에게는 이런 아내는 귀한 보석인 ‘진주 보다’ 값이 더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은 이런 여인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여자도 이런 아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교훈입니다. 이 현숙한 여인의 삶의 원동력은 주님에 대한 경외이며, 그것이 이웃(남편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낳고, 그 책임감은 재물, 지혜로운 말, 홍색 옷 등 구체적인 삶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추상적이지 않고 행위와 열매로 입증되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언19:14).

잠언31:11절
“남편은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며 가난을 모르고 산다.”
(새번역)

11절은 답관체 시의 형식에 따라 히브리어 두번째 알파벹인 ‘베트’로 시작됩니다. ‘믿으며’는 ‘빠다흐’의 번역이며,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인한 행복감·안도감을 나타내고, 마음을 뜻하는 ‘레브’와 함께 사용되어 ‘진심으로 신뢰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로 직역됩니다. 남편의 신뢰의 구체적인 내용은 먼저 후단의 ‘가난을 모르고 산다’에서처럼 아내가 벌어들이는 경제적인 풍요함과 관련되어 있지만, 잠언은 인격과 자녀 교육, 그리고 결혼 관계에 대한 정절 등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신뢰, 그것도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아내를 둔 남편은 행복하며, 그 아내 역시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기에 복되다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입니다. 후단의 ‘가난을 모르고 산다’는 개정 개역에서는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로 번역하였는데, 직역은 ‘그리고 그는 결코 수입이 부족하지 않다’입니다. 잠언을 보면, 아내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수입을 벌어들이고, 남편의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견고하게 일구어 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르틴 루터(1483-1546)의 부인 카타리나(1499-1552)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루터가 수도원에서 탈출하도록 도운 수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결혼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1525년 결혼 후, 카타리나는 루터의 경제생활과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실제 표상으로, 그분의 이야기를 간간이 적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잠언31:12,새번역)

누가복음7:48절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얼마 전 하마스의 지도자 하니예가 테헤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란은 책임감과 모욕감을 동시에 느껴 즉각적인 보복을 선포하였지만,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찾아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여 대접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시몬은 그 동네 죄인인 한 여자가 울며,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주님의 신분을 시험하는 시몬에게 주님은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르시기를,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맞춤도 없었고, 흔한 감람유조차 머리에 붓지 않았지만, 그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내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 그는 너보다 나를 사랑함이 많아서, 그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다.’ 하셨습니다. 여타 손님들은 귀빈으로 영접하여 주인으로서 책임을 다한 시몬이였지만, 오직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예수께 대한 존중과 책임감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크게 모욕감을 느끼셨으나, 내색도 않으시고 온유하게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는 메시야로서의 책임감, 즉 당신의 백성의 죄와 연약을 담당하고 바로 잡으셔야 하는 그 책임감 때문입니다(눅4:17-22). 여인의 향유 사건이 일어나자 대화를 통해 시몬의 마음속 질문에 답하시면서, 메시야의 능력과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을 본받아 인내하며 주님께서 행동하실 구원의 때를 온유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이는 구원의 사건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눅7:49)

에스더 3: 2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본문의 사건은 페르샤 제국 아하수에로 왕 초기(BC 480년 경)입니다. 질녀 에스더는 이미 황후였고, 모르드개는 수산 성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 대한 암살 모의를 듣고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알려 참극을 막았습니다. 그는 상도 칭찬도 받지 못하였으나, 온유하게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런 중 제국의 2인자 하만의 행차 시 모르드개는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고, 하만은 분노하여 유대 민족까지 몰살시키려고 획책합니다. 적당히 타협하면 행복하게 살 모르드개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다가 화를 당하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오히려 페르샤 제국의 2인자가 되는 과정을 에스더서는 증거합니다. 오늘은 79번째 광복절입니다. 안창호 선생은 수양 동우회 사건(1937년)으로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의 검사의 심문을 받습니다.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길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덕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 선생의 강직한 태도는 투옥과 고문, 출옥 후 순국으로 이어집니다(1938). 그분의 신념 대로 사후 7년 만에 한국은 독립되나 한국민의 힘이 아닌 미국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요한복음 5:40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영어의 must, can, ought to를 심리학적(or 사회학적) 관점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 Must : 강한 의무나 필요성을 나타내며, 상대방은 “강제적 의무감= I must”을 갖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동의 여부를 떠나 행위를 강요당하므로, 인간의 실존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공산주의가 그렇습니다. 공산당에서 사람은 목표 달성의 수단일 뿐입니다. ② Can : 능력 or 가능성을 나타내어, “성취 능력 =I can”의 관점을 갖게 합니다. 자아실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고, 인생의 의미, 가치, 이웃 등은 차 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자아실현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빌 게이츠의 결혼생활은 깨졌습니다. ③ Ought to : 상대방은 권고를 듣자 책무를 깨닫고 책임감(책임의식)을 갖게 됨을 의미입니다. 인간의 삶은 “책임 의식 = I ought to”이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책임 의식’을 통해 외적인 가치 세계와 연관을 맺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그 순간, 인간 존재의 주관적인 면이 보충됩니다. 이는 ‘의미, 가치’와 같은 객관적인 요소를 발견 혹은 수용하기 때문입니다”(프랭클, 의역함). 복음의 전파 방식이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나, 그들에게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생명의 회개를 얻게 하고,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킵니다(책임감).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살았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매일묵상(2024/8/5-9)


잠언31: 6,7 절
“ 독주는 죽을 사람에게나 주어라. 포도주는 상심한 사람에게나 주어라. 그것을 마시면 가난을 잊고 괴로움을 생각지 아니하리라.”(공동번역)

6,7절의 진의는 술로 상징되는 향락이 왕에게 부적절하다는 교훈입니다. ‘죽을 사람’이란 ‘죽음을 방불하는 극한 상황에 이른 자’이며, ‘상심한(=마르) 사람’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말합니다. 극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은 술로 위로를 삼지만, 경건한 자는 그들의 반석이신 주님께 달려갑니다. 한나를 질투한 브닌나가 아들 없는 한나의 약점을 찔러 격동시키자, 한나는 너무나 마음이 ‘쓰라려’(마르)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삼상1:10).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사무엘을 주십니다. 한편, 왕은 정의를 확립하여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통치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요구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모세 율법’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왕의 직무를 상기시켜 ‘모세 율법’을 잊지 말라는 어머니의 통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을 위해 논어를 애독하였는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과 삶을 기록한 성경은 인간 본성과 구원의 방법에 대한 지혜로 가득차 있습니다. 승리의 입성 시, 수 많은 사람의 환호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찬양 소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5일 후 그 백성들은 주님의 원수로 바뀝니다. 형통할 때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을 생각하고 늘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시편37:30,새번역).

잠언31:8,9절
“너는 할 말 못하는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의 송사를 위해 입을 열어라.
입을 열어 바른 판결을 내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세워 주어라.”(공동번역)

본문에서 어머니는, 왕 르무엘이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처지를 변호할 수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라고 가르칩니다. 재판은 공정해야만 합니다. 가난하다고 두둔하고 세력 있는 자라고 하여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됩니다(레19:15). 그러므로 ‘바른 판결’이란 대목이 중요합니다. 좋은 예가, 솔로몬 왕이 어린 아이에 대한 두 창녀의 상반된 주장을 듣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별하여 바른 판결을 내린 사건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판단과 집행이 쉽지 않습니다. 세력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법의 헛점을 파고 들고, 소송 시에는 많은 돈을 주고 유능한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합법적 이익을 최대한 관철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역사를 살펴 보면, 권력자들은 힘 있는 계층의 지지를 위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억울한 사정을 알았지만 유대 지도층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에 의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등극하셨습니다. 모든 통치권력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절차를 넘어 구제받지 못한 억울한 일은 더 이상 원수 갚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진노에 맡기시기 바랍니다(롬12:.19).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시편37:9,새번역)

누가복음 5: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 베드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 극적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는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라는 침례 요한의 거듭된 증언을 듣자 예수께 가서 대화를 갖습니다. 그리고 형 베드로를 찾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그의 인생을 요약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나흘 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을 경험하고서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요2:11). 얼마 후 유월절이 이르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수 많은 이적 행하심과 존귀한 공회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등을 목격하였지만, 갈릴리로 내려 왔을 때는 다시 어부라는 생업에 종사하러 갔습니다. 이 즈음 주님은 수 많은 사람과 함께 갈릴리 호수 가에 이르자 시몬의 배에 오르사 군중들을 가르치신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밤새 빈손이었던 어부 베드로는 많은 고기를 잡자, 거룩하신 분이 자신의 앞에 있음을 깨닫고 두려워 합니다.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심으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눅5:10). 그 사명은 사람의 영혼을 낚아 예수 중심의 인간성으로 변화시키는 일이죠! 이 기사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거친 빅터 프랭클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내었습니다. 내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5:11).

요한복음 1: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예수께 부름 받자,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나섭니다(요1:45).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삶은 수행할 가치가 있는 사명을 발견하였을 때 변화될 수 있다” 하고, 나아가 그는 누구나 그러한 사명이 있고, 그런 임무가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정신분열증 직전의 어느 젊은 여류 화가에게 준 조언입니다. “당신은 삶에서 당신에게 부딪쳐 오고 도전해 오는 어떤 목표 없이 당신의 삶을 재건할 수 없습니다. 목표가 없을까요? 화가로서 당신이 해야할 일이 없단 말인가요? 당신 안에서 숙성 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예술 작품들, 창조 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의 그림들 등 당신이 착수해 주기를 기다리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은 힐데가드라는 화가이고 힐데가르를 기다리는 일들, 아직 태어나지 못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들은 당신이 창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창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인간이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수께 기대하였으나, 부활의 주님은 그것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행1:1-9).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성령님에 의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인간들의 탄생입니다(딛3:5). 빌립은 사도가 됩니다. 그러나 다 사도이겠습니까? 삶 혹은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기대할까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25:15)


사도행전 2: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의 정점은 ‘자아실현’이나,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 발견’이 훨씬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아 실현에 있지 않고, 오히려 가치를 실현하고 의미의 가능성을 완성시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단어는 ‘가치’ ‘의미’ 등과 같은 주관적 개념들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키에르케고가 도입한 실존주의 철학은 현대 인간을 합리주의 세계관에 가두어 버리고 의미·가치·하나님· 아름다움· 책임감 등 형이상학적 가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제거했다고 개탄합니다. 쉐퍼의 진단은 옳습니다. 현대인들은 생산성, 합리주의, 물질주의 등에는 탁월하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랭클은 ‘의미 요법’을 통해 사라진 사닥다리를 찾아왔습니다. 이제 현대인은 일층(합리주의, 기계적인 세상)에서 이층(의미, 하나님, 종교 등 가치의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고, 무의미라는 정신병을 치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해야 할 I ought’ 것을 하려는 그 순간, 우리는 의미라는 객관적인 것을 통해 인간 실존, 곧 존재(being)의 주관적인 면을 보충하게 된다.’ 한편, ‘삶의 의미’는 종교로 가는 길입니다. 프랭클은 종교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하나님으로 가는 길인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일한 의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새번역)

매일묵상(2024/0729-8/2)

시편8:5절
“그를 하나님(엘로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동물은 환경을 갖지만 인간은 세계를 갖는다”고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그는 인간이란 양심을 갖고 자유로운 결정과 이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이기에, 마땅히 이런 인간상이 전제된 후 심리 치료에 임하도록 주장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정신요법은 보이는 세계만을 대상으로 삼지만,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증거합니다. 두 세계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며, 보이는 세계의 통치를 위해 창조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본 시편은 광대한 우주와 수 많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연약한 인간에게 맡기신 경이를 노래합니다. 엄청난 영화요 존귀입니다만, 병들고 죽는 현실과 인간의 말을 듣는 피조물이 없음을 볼 때, 성취자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황제라도 바람과 바다를 복종시킬 수 없지만, 주 예수께서는 복종시키셨고(막4:41), 부활·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받아 성취하고 계십니다(히2:6-9). 한편, 5절의 ‘하나님’이란 문구는 때때로 ‘천사들’로 번역되는데,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부활 이전의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기에 천사들보다 조금 못합니다(시82:6,7), 그럼에도 우주만물의 관리자로 세워진 인간의 영화로운 지위는 존중되어야만 합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상관 없으나, 인간이 늙고 병들어 육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 관리자로서의 존엄성을 빼앗긴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로고테라피적 ‘의미 요법’의 강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는데, 로고테라피가 미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마가복음5:9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사람이 병들면 존엄성을 빼앗긴다” 이는 개인의 중요성을 생산적 유용성과 동일시하는 문화 때문입니다. 은퇴하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결국 자기 존중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또한, 범죄자들은 사회로부터 손상된 그의 존엄성을 반사회적 방식으로 인정 받으려 하고, 정신질환자는 스스로 인격적 존엄성을 가질 수 없어 자신을 향해 분노합니다. 사실상, 정신질환자는 인격의 통일성을 상실하여 내부에는 ‘군대’가 주둔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심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한편, 성경이 말하는 거라사 광인은 악령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한 인격 억압이나, 정신질환은 병이나 죄 등 환자 내부의 요인에 기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존엄성의 상실로 정신질환에 이른다면, 그 대처 방법은 환자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며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치유를 가져옵니다. 좋은 예가 정신과 의사 설리반의 태도입니다. 담당 의사와 대화조차 완강히 거부하는 환자를 향해 의자를 좀 더 가까이 갖다 놓고 아주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랍게도 환자는 마음을 열고 30분이 넘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설리반의 친근한 행동이 환자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피하는 악령들린 거라사의 광인을 주님은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심으로 그의 존엄성을 인정하셨다”(브루더)는 설명은 옳습니다. ‘존엄성을 가진 정상적인 인간’은 정신의학이 추구하는 목표이나, 이 이후는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인들도 인생을 비출 가르침을 갈망하는데, 그것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마가복음5:19절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막5:19,새번역)

혹독한 나치 치하에서 2년 반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풀려난 한 유다 청년(17세)은 탈무드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프랭클은 그에게 “그 체험이 당신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는지 누가 압니까? 그 체험 때문에 당신은 보다 정직하고 사려 깊은 인간이 되었소 2년 반 동안 갇혀 지내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적합한 임무를 주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아마 당신의 수감 생활은 그 시기의 당신 인생에 꼭 알맞은 직무였을 것이오….탈무드에 대한 당신의 연구는 깊이 나아 가서 그 지혜의 깊숙한 곳까지 이를 것이오….사실 지금 당신은 마치 순도 높은 금은처럼 정련되어 있소…” 그 청년은 결정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프랭클은 청년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여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에 비추어 자신의 곤경을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 “나는 그 젊은이의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환자의 서글픈 현재의 상태를 지적함이 아니라 그가 지금은 정신질환에 시달려도 그가 성취해야 할 의미를 섬광처럼 볼 수 있게 함으로 그렇게 하였다.” 귀신들이 쫓겨나가자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사 광인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주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가장 적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2년 후 주님께서 데가볼리 지역으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의 관점에서 오늘의 나와 현실을 보게 합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5:20)

잠언31:1-3절
“ 마싸 왕 르무엘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   아들아, 들어라. 내 속에서 나온 아들아, 들어라. 서원을 세우고 얻은 아들아, 들어라. 네 기력을 여자에게 쏟지 말아라. 임금도 그리 되면 망한다”(공동번역)

잠언은 3부로 편집되었는데, 제1부 1-9장은 강화와 설교 형식을, 제2부 10-29장은 경구와 속담 형식을, 제3부 30,31장은 부자 혹은 모자 간의 훈계 형식을 취하나 내용과 주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1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9절은  왕에게 여자와 술을 경계하고 공의로운 통치를 권면합니다; 10-31절은 현숙한 아내에 대한 찬가이며, 각 절의 첫문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른 답관체(踏冠體)- “머리를 밟아 가는 문체”- 입니다. 31장의 편집 의도는 분명합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왕도, 어머니를 공경하고 그 바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며, 현숙한 여인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은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며, 삶과 행복의 안전망이고, 생명을 출산하고 태어난 생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이기에, 현숙한 여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뜻인 ‘르므엘’ 왕은 솔로몬의 아명이거나 아니면 북아라비아의 지혜로 유명한 마싸의 왕이라 추정됩니다. 공동번역은 후자를 취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만약 전자로 취한다면, 1-3절의 여인에 대한 교훈은 솔로몬 왕의 삶을 반추하게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으나, 힘을 여자에게 쏟았고 현숙한 여인 대신 이방 여인들을 얻은 결과 우상숭배를 이스라엘에 도입합니다. 그의 사후 이스라엘은 분열과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잠언31:4,5절
“ 르무엘아, 임금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이 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임금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독주를 좋아하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 법을 잊어버리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판결을 불리하게 내릴까 두렵다.”(공동번역)

4∼7절은 술에 대한 경계로서, 이는 술이 왕의 공정한 직무 수행을 막는 측면과(4,5), 고통하는 사람이 먹고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는 용도(6,7) 때문입니다. “임금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문자적으로 ‘왕들에게는 아니다’는 의미이며, 강조를 위해 이 표현을 두 번 반복합니다. 더 나아가 왕을 ‘통치자’로 지칭하면서 또 다시 ‘적합한 일이 아니다’라고 세 번째 반복함으로 어머니의 권면을 마음에 간직하게 합니다. 5절은 그 당시 왕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재판을 르무엘에게 상기시킵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어야 하나, 술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지면 오히려 그들의 생존권마저 빼앗아 버릴 우려 때문입니다. ‘법’이란 문자적으로 ‘제정된 것’이며, 국가를 다스리는 법규에 대한 표현입니다. 신명기17:18-19에는 왕이 모세 율법을 등사하여 평생 옆에 두고 읽으라고 규정합니다. 왕이 술을 가까이 하면, 이처럼 중요한 율법, 곧 신정 왕국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를 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가진 신자도 같습니다(벧전2:9). 신자가 술로 상징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두면,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범죄한 이스라엘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는 포도나무 가지가 될 것입니다(요15:6).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