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7.22-26)


요한복음4: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5번 이혼하고, 지금은 한 남자와 동거하는 사마리아 여자는 성적 쾌락을 추구한 참담한 결과에 직면합니다. 그녀는 삶의 동반자가 될 남편이 없습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 있는 위치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얻어집니다. 그런데 책임은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의 은밀한 도덕적인 문제를 지적하자, 갑자기 예배 장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바꾸어 버립니다. 종교적 토론은 흔히 개인적인 문제에 깊이 들어가기를 피하는 한 가지 방편이 되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주제의 진부성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과 관련된 ‘어리석은 논쟁..율법에 관한 싸움”과 같은 무익한 일을 피하라고 명령합니다(딛3:9). 복음은 논쟁이 아니라 선한 열매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도덕한 사생활을 숨기려는 그녀를 보시자, 예배의 장소라는 새소재를 갖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제로 들어가셨습니다. 참된 예배는 계명에 따른 삶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삶을 다시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윤리적인 문제가 있으면 이웃 혹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자. 그러면 ‘영원한 생수(생명, 예배의 삶)’를 가질 수 있다.” 이는 부자 청년의 소유의 문제와도 같습니다. 다만, 사마리아 여인은 결단하여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생수를 얻었고, 부자 청년은 거부하고 떠남으로 생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요한복음4:29절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하갈은 술 광야로 도망 중 샘물 곁에서 주님의 사자를 만납니다(창16장). 그분은 이미 하갈의 신분과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간다는 대답에,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분은 하갈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십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약속하신 주님과 같습니다. 하갈은 그분의 신성을 깨닫고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 살아계신 감찰자의 우물’이라 이름 짓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순종하여 돌아가서 아브라함 온 집에 자신의 경험을 전하였습니다. 2100년이 흘러, 하갈과 같이 잘못된 관계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 곁에 왔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듣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시고 영원한 생수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갈의 경우처럼 잘못된 관계를 시정토록 하십니다. 다만 이 경우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통한 온유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 여인은 하갈처럼 돌아가서 자신의 부끄러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털어놓으며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몰려 나왔습니다. 오직 죄인들만 예수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쾌락의 길을 버리고, ‘영원한 샘물’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영생토록 살아계신 분’을 만남으로 의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 이것은 심리학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잠언30:29-31절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29-31절은 자신의 존엄성과 권위를 지켜 당당하게 살아가는 네 가지 표상이 제시됩니다. 초점은 네 번째 제시된 왕입니다. ‘잘 걸으며’란 ‘메티베 차아르’의 번역이며, ‘메티베’는 ‘즐겁다’ ‘잘하다’의 뜻으로 두려움 없이 기쁨을 가지고 힘차게 행진하는 모습입니다. 강조를 위해 ‘위풍 있게 다니다’의 구절을 반복시킵니다. 먼저 사자가 등장하며, 사자는 아굴의 시대에 팔레스틴에 서식하던 동물로서 최강자임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냥개로 번역된 ‘자르지르’인데 문자적으로는 ‘허리에 두른’이란 의미입니다. 빨리 달리도록 준비 된 상태로 보아(왕하4:29) ‘사냥개’ 혹은 ‘얼룩말’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 수탉의 자태라고 보아 ‘수탉’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자와 같이 당당하게 다니는 동물임은 분명합니다. 셋째는 ‘숫염소’로 번역된 ‘타이쉬’로서, ‘타이쉬’는 ‘머리로 받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숫염소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당당하게 전투 태세를 갖추고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당할 수 없는’의 원어는 ‘알르쿰 임모’이며, ‘백성들 앞에 선’ 혹은 ‘군대와 함께 한’을 뜻합니다. 따라서, 왕이 백성이나 군대와 함께 하고 있을 때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아굴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 중 한 면이라 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30:32절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2, 33절은 30장의 결론이며, 교만과 죄악을 버리고 겸손과 경건을 취하라는 교훈입니다. ‘미련하여’의 원어는 ‘나발’이며  사무엘상 25장에 등장하는 갈멜의 어리석은 부자 ‘나발’이란 이름과 같습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에 해당하는 ‘잠모타’는 단순히 ‘계획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계획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 주체가 미련한 자여서 ‘악한 일’로 해석한 것입니다. ‘입을 막으라’는 것은  죄악을 뉘우치고 그 악한 말을 자제하라는 뜻입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은 자신을 위해서는 “왕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였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다윗의 전령들에게는 “다윗은 누구이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라고 다윗의 처지를 비웃고는, “내 떡과 물과 고기를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는가”라는 악한 말과 함께 빈 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동안 나발의 양 떼를 지켜 준 선행에 대한 보답은커녕 오히려 모욕을 당한 다윗은 나발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나발은 부를 일구었으나 인색하고 성공에 도취되어, 다윗을 과소평가했고, ‘다윗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된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신탁도 무시하였습니다. 미련한 자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늘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자이며, 교만과 미련한 짓을 깨달으면 즉시 돌이켜 그리스도의 피로 씻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본절의 제자이며, 교만과 악한 생각을 돌이키지 않는 자는 바보로서 그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잠언30:33절
“(왜냐하면)우유를 저으면 굳은 우유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듯, 화를 돋우면 분쟁이 일어난다.”(새번역)

33절의 시작은 접속사 ‘키’로서, ‘입을 막으라’는 권면(32절)의 타당성을 말합니다. ‘저으면’ ‘비틀면’ ‘돋우면’으로 각 번역된 원어는 ‘미츠’입니다. ‘미츠’는 ‘누름’ ‘비틀어 짬’ ‘억압’ 등을 뜻하는 낱말로 우유가 가득한 가죽부대를 삼각대에 걸어놓고 비틀어서 버터를 만드는 풍습에서 나왔습니다. 아굴은 ‘미츠’를 세 번 반복하는데 행동이 가져올 필연적 결과를 가르치는 의도입니다. 즉, 우유를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교만한 태도나 악한 말은 사람을 격동시키고, 이어 다툼(분쟁)을 일으킵니다. 이 피할 수 없는 귀결을 차단할 수 있는 비법이 32절에서 언급된 권면입니다. 즉 자신만을 주장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아굴의 권면을 받아들일 것이나  교만한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굴이 교훈을 마치면서 겸손과 절제를 강조한 것은 이 자세가 지혜로운 삶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입을 절제하지 못하면 쓸데 없는 말을 하여 상처를 줍니다. 결과는 미움과 분쟁이며, 물고 뜯고 하여 모두 멸망할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이 악하여 입을 열면 남은 낮추고, 자신은 높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입을 열면 ‘은혜’를 끼쳐야 할 것입니다. 벽돌로 건물을 쌓듯이, 상대방의 삶을 세워주려는 사랑과 지혜(잠언)는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손히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매일묵상(2024/7/15-19)


잠언30: 26절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본문은 지혜로운 두 번째 동물을 소개합니다. ‘사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쉐판님’이며, 팔레스틴이란 배경을 놓고 보면, ‘시리아 바위너구리’ 즉, 작은 토끼 크기이지만 귀와 다리가 짦은 담황갈색의 작은 포유동물을 지칭합니다. ‘바위 사이에’란 험한 바위산, 혹은 낭떠러지를 의미하며, 이는 바위 너구리가 천적이나 인간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높거나 험한 바위틈새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또 바위 너구리는 군집동물로서, 보초가 위험신호를 보내면 재빠르게 바위틈으로 숨어버린다고 합니다. 실로 바위는 이들의 은신처입니다. 그 모습을 본 시편기자는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104:18)고 노래합니다. 아굴이나 시편기자가 바위너구리에 주목을 하는 이유는, 연약한 이 동물은 자신을 지킬 방어수단이 없음을 깨닫고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지혜를 갖춘 점입니다. 인간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환난날에 피할 큰 바위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만한 자들이 배우거나 행할 수 없는 지혜로써, 오직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뜻 즉, 선을 행하려는 신자만이 가능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엔게디 광야로 도망을 갔고, 부하 600명과 함께 바위로 만들어진 동굴에 숨곤 하였습니다. 바위 너구리와 비슷하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사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 동굴에 사울이 용변을 보러 들어왔을 때, 다윗은 옷자락만 베고 살려줍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랑입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다.”(시편94:22,새번역)

잠언30:27절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약한 개미와 사반(바위너구리)과 달리, 메뚜기의 약점은 ‘임금(지도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가 없으므로, 구성원들 각자의 생각대로 살기 마련이고 혼란과 무질서가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굴이 본 메뚜기 떼는 놀라운 질서를 유지합니다. ‘나아간다’는 동사의 원어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나아가다, 행진하다”(민1:20)를 뜻합니다. ‘떼를 지어’는 여러 무리로 나뉘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함으로, 이를 정확히 번역하면,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분대별로 행진해 나아간다”입니다. 메뚜기 떼들이 각 부대별로 행진하는 군대와 같이 단 한 마리의 예외나 이탈 없이 무리를 이루어 질서 정연하게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메뚜기들에게는 ‘임금’이 없습니다. 메뚜기 떼가 지도자 없이도 공동 목표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살아가는데, 하물며 지도자가 있어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 공동체에 큰 피해를 주는 자는 미물만도 못한 자입니다. 사사기의 사건입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은 열두 지파는 왕이 없어서 자신의 소견대로 살아갔습니다(삿21:25). 그 시대 초기에 기브아 땅을 지나가던 레위 사람은 그의 첩이 집단으로 능욕받아 죽었습니다. 회개를 모르는 베냐민 지파는 정의를 수호하려는 11지파와 전쟁을 벌여 처참하게 몰락합니다(삿19-21장). 사회에는 현명한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저출산 문제와, 이에 따른 교육개혁, 노동개혁, 연금개혁, 그리고 외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딤전2:2,새번역)

잠언30:28절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마지막으로 아굴은 도마뱀을 작지만 지혜로운 동물로 손꼽습니다. 도마뱀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강한 이빨이나 독과 같은 무기 없이, 왕궁에서 버젓이 살아갑니다. 작고 약하나 지혜로운 도마뱀이 왕궁에 거처를 둔 것처럼, 신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존엄한 삶이란, 그들의 동기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요, 수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며, 구체적인 행동양식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성결하며, 화평하며, 관용하며, 이성에 열려 있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차 있고, 거짓과 편견이 없습니다(약3:17). 그들의 자원은 모든 것의 주님과, 그분의 거듭된 약속 – “내 안에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다 행하겠다”- 입니다(요14:13,14). 다만, 제자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대사이기에 세상은 그들의 메시지를 두려워 하나,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칼은 없습니다. 박해는 필연입니다! 따라서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힌 그 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고마워 찬송을 부릅니다. 이른바 ‘밤의 노래’를 드리자 옥터가 흔들리고 간수와 그 가족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아침에 관리들은 그들을 방면하려고 하나, 바울은 로마 시민임을 밝혀 관리들이 친히 와서 배웅토록 합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를 아무도 경시하지 못하도록 의도한 조치입니다. 마치 왕궁에 사는 도마뱀의 지혜를 보는 것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요한복음 4: 16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이란 나찌의 강제수용소의 경험이 근간이 됩니다. 사람은 삶의 의미를 확고히 파악하고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어 낸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데, 극한의 상황에서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삶에서도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연로한 의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서 두 해 동안 깊은 절망에 빠져 살았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그분의 아내가 지금 그가 겪는 이 지독한 고통을 모면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자, 그 의사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프랭클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의 비탄은 희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절망은 사라졌다.” 실로 수명은 삶의 의미를 강렬하게 느낄 때에 연장됩니다. 어느 영문학과 교수로 은퇴하셨던 분은 90 고령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삶의 의미를 잃고 곡기를 끊셨으며, 얼마 안되어 돌아가신 사례가 있습니다. 의미 추구를 포기하면 삶의 공허가 생겨나고, 이 공허는 식욕, 성욕, 지위나 권력에 대한 욕구 충족 등과 같은 이차적 목표가 전면에 나서도록 합니다. 즉, 마음의 빈 자리를 채우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에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목표들이 우선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다면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로버트 레슬리 목사는 빅터 프랭클이 주장하는 ‘실존적 공허 existential vacuum’의 관점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풀어가나, 복음은 진리이며 영원을 포함하기에 더 적절합니다. 내일 살펴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편4:7)

요한복음4:13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존재감 상실, 즉 「실존적 공허」는 병리학적 의미에서 병(곧 비정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질병과는 다른 ‘삶의 조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때 종교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는 경우가 많습니다(전3:11).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영적차원을 본능에서 파생되는 부산물로 여겨 심리요법에만  치중한다면, 근원적인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프랭클의 어떤 환자는 정신과 의사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갈망을 이해 못하고 은근히 비웃는 태도에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프랭클의 ‘의미요법’에서 의미를 주는 대상에는 종교가 포함됩니다. 종교는 인간 존재에 큰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을 보고 마을 아낙네들과 대인 관계가 심히 결렬되어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여인의 삶을 결정한 원인을 어린 시절의 환경이나 힘든 경제적·사회적 요인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개인의 책임감 있는 반응이 중요합니다. “자유는 조건들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한 자유이지, 조건들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빅터 프랭클) 말 같이 인간은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는 성적 부도덕이었습니다. 그녀는 성적 쾌락을 통하여 행복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이제 여기서 돌아서서 올바른 삶과 참된 관계로 나아가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온유하게 지적하시면서 참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참된 관계를 맺으라고 가르치십니다.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14:23).

매일묵상(2024/7/8-12)


잠언30: 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가정 질서의 혼란이 야기되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가서, 가정이 그녀의 통제에 놓일 때입니다. ‘미움 받는 여자’란 ‘혐오스럽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사랑스럽지 않은 여성’이어서 사람들은 꺼려합니다. ‘사려깊은 여인’(31:10)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혀와 입 그리고 교만을 절제하지 못하여, 상식밖의 행동을 하게 되고 당연히 사회로부터 외면당합니다. 그런 그녀가 결혼을 통하여 지위가 높아지면 사회는 보복 당하게 됩니다.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 등 역사상 이런 경우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시돈의 왕과 제사장 옛바알의 딸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북왕국의 왕비가 되자, 바알 신앙을 도입하고 여호와 신앙을 박해하면서 남편 아합을 조종하였고, 결국, 의롭고 착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그 악한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여호사밧 왕의 아들 여호람의 부인이 되어 왕자 아하시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시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이 이어 죽자, 반란을 일으켜 다윗 가문에 속한 왕의 씨를 모두 죽이고 7년간 유다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물론, 잠언이 칭찬하는 ‘현숙하고 사려깊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이 크게 일어선 경우도 많습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그렇습니다. 한나는 경건하고 깊은 기도의 여인이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불임을 극복하고 사무엘을 낳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배우자 선택 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지 여부를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잠언30: 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가정질서를 어지럽히는 두번 째 유형은 여종이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여종’에 해당하는 ‘쉬프하’는 ‘여자 노예’로서, 주로 결혼한 여자를 시중드는 가정의 하녀를 지칭하며, ‘이은’의 원어 ‘야라쉬’는 ‘차지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자신이 섬기던 여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여종을 말합니다. 좋은 예가, 아브라함의 아들을 잉태한 여종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한 사건입니다. 그 발단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입니다. 아직 아들이 없는 두 분이,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이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와야 후손이 된다”(창15장)하심으로, 사라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74세된 사라는 해석합니다: “나는 아니구나!” 그리고, 당시 관습대로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자, 하갈은 잉태하였고 여주인을 멸시하게 됩니다.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였고, 하갈은 도망치는 중 광야 샘물 곁에서 야훼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분은 여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자손번성의 약속을 주십니다(창16장). 아브라함의 가정은 질서를 되찾았고 약속을 받은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를 섬겼습니다. 그 후 16년 간 사라는 남편의 사랑으로 그 고독한 순간들을 견디어 가나, 드디어 주님은 89세된 사라를 권고하사 이삭을 낳게 하십니다(창18장). 주님은 공평하시고 가장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그녀는 믿음의 영웅 중 한 분이 되었습니다(히11:10).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마가복음10:21절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들 하나를 갑자기 잃고, 다른 하나는 전신마비에 지체장애로 태어난 아들을 둔 부인이 삶의 의미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보자 모임에 참석시킨 뒤, 거기에 임종을 기다리는 부와 명예를 얻은 80세의 부인도 초대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나는 백만장자와 결혼했지요. 재산이 넉넉해서 평탄한 삶이었어요. 사내들과 놀아나기도 하면서 한껏 살았지요. 하지만 이제 내 나이 여든인데 슬하에 자식 하나 없네요. 결국 내 인생은 실패로 끝난 것 같아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다음 지체장애를 둔 그 부인에게 삶을 돌아보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제 인생을 돌아보니 평화롭네요. 난 아이들을 갖고 싶었는데 소망을 이루었어요. 비록 대책 없는 지체장애인 아들을 두었지만 난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해 그 아들을 돌보았어요. 내 인생은 실패한 게 아닙니다. 한 아들은 죽고 나머지 아들은 내가 돌보아야만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대로 난 내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온 셈입니다” 프랭클이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그녀의 삶에서 그녀만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부자 청년에게 그만이 성취할 수 있는 고유한 책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많은 재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심리학자가 발견 못한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내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딤전6:17,18)

마가복음10:21절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신자 A가 죽어 하늘나라로 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반갑게 맞아주신 뒤, A를 위해 만든 처소로 안내하셨습니다. 기쁘게 따라 간 A는 멋진 맨션을 지나 조그마한 오두막 집으로 인도되는 것을 보고 실망스러워서 집을 잘못 배정하신 것은 아닌지 따졌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계산기를 두드리신 후, 지금까지 네가 지상에 있으면서 하늘나라에 저축한 것들 갖고 그 집을 건축한 것이라 네 것이 틀림없다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교훈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천국을 잘못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궁금합니다. 도대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과 하늘에 보화가 쌓이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으며, 하늘의 보화란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천국은 모든 것이 충만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샬롬의 세상이며, 거기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에서 대궐 같은 집에 살며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두막 집이지만 주님의 구원으로 인한 감사를 마음에 담고 영원히 즐거워 하는 삶입니다(사25:10).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보화”란 신자가 얻는 구원이며, 생명의 부활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구원 얻은 신자의 가장 큰 보물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아버지와 아들을 배워 가는 삶으로 ‘나를 따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난도 있고, 기쁨도 있으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제자도로서, 심리학자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잠언30: 24,25절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30:24-28절은 작지만 현명하게 생존해 가는 네 가지 동물(개미,사반,메뚜기,도마뱀)을 관찰한 결과입니다. ‘작고도’의 원어는 ‘작은’이란 의미와 ‘하찮은’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작고 하찮은 미물들이 가장 큰 생존의 지혜를 갖고 있음은 경이로운 신비이며, 앞선 10-23절에서 묘사된 인간의 어리석음 및 악행과 대조됩니다. 첫 번째 열거된 지혜로운 미물은 개미이며, 일찍이 솔로몬도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지혜를 얻으라”(6:6)할 정도로 개미는 매우 작고 하잘것없지만 앞날을 예견하고 준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즉, 여름에 겨울 양식을 준비하여 겨울을 지내는 곤충입니다. 또, 개미는 군락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함께 모여사는 인간과 유사합니다. 다만, 인간은 통치자가 없으면 질서가 무너지지만, 개미는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열심히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기 때문에 그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잠6:7,8). 아굴이 개미를 언급한 것은 자기 힘을 믿고 앞날을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 때문입니다. 이 잠언을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장차 도래할 영원한 심판을 준비하는 지혜를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함께 산 부자는 가진 재물로 호화롭게 살았지, 선행을 베풀지 못해 죽은 뒤 영원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눈을 들면, 세상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필요한 수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플랫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매일묵상(2024/7/1-5)

시편37:11절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바른 성서적 세계관을 통해, 페르샤 제국이 이스라엘 징계의 도구임을 깨달은 느헤미야는 제국의 수도 수산에서 왕의 신뢰를 받는 술관원이 됩니다. 비록 페르샤의 정책이 이방인에게 관대하였지만, 수산 궁에서 왕의 측근이 된 사실은 그의 성품, 실력 등을 짐작하고 남게 합니다. 성경에는 술관원에 대한 언급이 서너 군데서 나옵니다. “당시 왕의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을 비롯 왕의 음식을 맛보는 일과 왕의 침실을 맡아 보는 일, 그리고 경호하는 일까지 하기도 했다. 그들은 술을 선별하고 술잔을 올리고 독이 들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먼저 맛보았던 것은 물론, 유쾌하고 재치있는 왕의 친구였다. 따라서 직분상 왕의 최측근이며, 왕의 행정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래서 술 관원이 군사지휘관인 총사령관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동생 하나니로부터 우연히 예루살렘의 사정을 알게 되자, 자신이 가서 그 성과 거기 유하는 동포들을 위해 성벽을 중건하려는 생각을 갖고 기도하였습니다. 왕과 좋은 친구로 지내는 당대의 권력자 느헤미야가 1,400km 떨어진 변방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가려는 생각 자체가 소명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이웃 사랑’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소명을 갖고 있기에,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나 하나님의 뜻을 행한 자들은 영원히 남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벽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성벽 중건을 단행하였다는, 주님을 사랑한 느헤미야의 이야기는 남아 있습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일:2:17,공동번역)

마가복음 10:15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공관복음서에서 전부 언급하는 관리이자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이어갈 만큼 가치가 있는 삶을 모색하던 중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 온 것입니다. 지금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장을 얻었고, 가정도 꽤나 안정되게 꾸려나가고 있으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신망을 받는 지위에 올라 섰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자신의 삶이 도대체 무엇이며 삶은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를 묻는 것이 장년층 젊은이들의 두드러진 특성입니다. 칼 융은 일찍이 그러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옴짝달싹도 못하겠다’라는 말로 표현된 느낌을 갖는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진정한 사명감을 상실하게 되면 부와 권력을 갖더라도 삶은 공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예수님의 하신 첫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청년은 회당에 나가고 십일조를 바치며 성경을 읽는 것과 같은 예배 행위들이나,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윤리 행위들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그 대답으로 찾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십계명 역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청년은 계명에 초점이 있었지 그 계명을 주신 분과의 관계가 미흡하였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10:19)

마가복음10:20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청년에게 주님은 윤리 행위의 기준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사취 등의 금지와 부모 공경”(막10:19)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긍극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본질에 놓여 있는 것이지 단순히 개개 규범의 준수여부가 그 핵심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이웃에게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청년은 십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나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의식은 결여되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막10:21a). ‘사랑’은 도움을 주는 자가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자체나 인간관계에서의 변화는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젊은 부인의 말입니다. ”남편은 내게 자기를 사랑한다면 가정을 잘 돌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정을 잘 돌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집안이 깔끔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나에게 생길 때에 비로서 가능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남편에게 알려 줄 수 있을까요?” 영생은 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 사랑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계명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어진 말씀은 재물을 사랑하는 그의 존재를 흔들고 그를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10:21b)

잠언30:21-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21-23절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네 가지 행태(범죄)를 , 지진과 같은 물리적 격변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공통점은 무자격자가 합당하지 않은 지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먼저, ‘종이 임금된 것”에서, ‘종’이란 노비라기 보다는 자율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권세 있는 신하로서, 그는 기회를 엿보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당연히 국가와 사회의 질서가 격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예가 200년을 존속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군대장관들입니다. 이들에 의해 9번이나 정변이 일어났고, 9개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습니다. BC722년 앗시리아 제국은 북 왕국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유브라데 강 너머로 흩었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사에는 이런 반역이나 혁명 사건이 빈번하였는데, 평화적인 권력 교체 제도가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는 국민 투표를 통한 통치권력의 교체를 제도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대한민국도 그중 하나입니다. 또, 중국 공산당 독재가 보여주듯이, 가격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는 사상, 정보 그리고 물건의 흐름이 자유로운 민주주의 체제에 잘 어울리는 경제질서입니다. 한국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습니다. 이는 2차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들 중 유일한 경우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딤전2:2,새번역)

잠언30:21-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두번 째 유형은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입니다. ‘미련한 자’란, ‘어리석은’ ‘무감각한’ ‘분별 없는’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발’의 번역이며, 단순한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신32:6). ‘배부른’의 원어 ‘이세바으 라헴’을 직역하면 ‘떡으로 만족하다’이며, 여기서는 ‘재물의 풍성’을 나타냅니다.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가 부를 얻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어야 사회는 안정되고 번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분별 없는 악한 자가 많은 재물을 얻어 풍족하게 되면 사회 질서는 크게 흔들립니다. 사회 질서가 흔들리면, 게으르고 악한 자들은 더욱 교만· 방탕하게 되고, 지혜롭고 정직한 방법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려는 많은 이들은 낙담하여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도덕이 결여된 사회는 범죄로 들끓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다윗이 피신하던 시절 갈멜의 거부 ‘나발’은 다윗이 양떼를 지켜주었지만 오히려 멸시하였습니다. 분노한 다윗이 그를 죽이려고 올라갈 때 아비가일의 영접을 받고 뜻을 돌이켰습니다. 나발 한 명을 제거한다고 악한 인간 본성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과 주님의 모범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계명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1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