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6/24-28)


시편75:6,7절
“동녘에서도, 서녘에서도 아니요 사막에서도, 산악지대에서도 아니며  판결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 이 사람은 낮추시고, 저 사람은 높이신다.”(공동번역)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될 때도 귀는 살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망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다 듣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 이즈음에 친인척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그분은 80 후반의 권사님으로 혈압이 ‘0’ 으로 떨어졌다가, 요양병원 목사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다시 소생하여 기도를 받고 돌아가셨다고 유족들은 간증하였습니다. 그 권사님이 두 달 동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계실 때 병원비가 5천만원이 넘었다고 합니다만, 기적과도 같은 이 은혜의 경험은 유족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만 입니다. 그분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편, 장례식을 치루고 나면, 망자에 대한 평가만 남습니다. 우리 각자도 결국 죽고, 사람들의 잠정적인 평가(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재판장으로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명받으셨음을 선포합니다(행10:42). 그러나, 현실의 삶 역시 유혹과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느헤미야의 삶은 훌륭한 모범입니다. 이방 땅 페르샤에서 믿음을 지키고, 황제의 인정을 받는 삶이란 쉽지 않지만 느헤미야는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은 느헤미야가 합법적 지위를 갖고 그 직분에 충실하게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제의 배후에는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주님이 계심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임금의 마음도 야훼의 손에는 흐르는 물줄기 같아 당신 마음대로 이끄신다.”(잠언21:1,공동번역)

느헤미야 1:11절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제임스 홀이 평양으로 선교를 나갔을 때인 1890년 중반만 해도 조선민족은 땅이란 배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만약 땅을 깊이 파면 구멍이 뚫어지고 땅은 배가 가라앉듯이 바다속으로 침몰한다는 생각에 우물을 깊이 파지 못하였습니다. 제임스 홀은 간신히 설득하여 깨끗한 물을 얻고, 전염병 확산과 예방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싸움은 세계관의 싸움입니다. 느헤미야의 성서적 세계관은 철저히 신명기의 가르침에 그 기반을 두고 자신의 현재를 파악합니다(레위기26:3-13(축복)/14-39(저주)/40-46(회복)과 신명기28:1-14(축복)/15-68(저주)/30:1-10(회복)). 1천년 전에 기록된 회복에 관한 언약은, 사로잡혀 끌려간 곳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 다시 돌아오게 하여주신다는 내용이고, 비시 450년 경에는 이미 상당부분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그 회복의 와중에 자신이 페르샤 제국의 권력자의 신뢰를 얻어 왕의 술관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페르샤 제국은 자신의 조상의 영토를 지배하지만, 성서적 세계관 하에서는 결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이기에 그 지배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행동양식이 도출됩니다. 그 증거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에스더 황후였고, 재상이었던 모르드개였습니다. 이제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들은 합법적 지위를 갖추려고 하고 그 중 하나가 느헤미야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29:26, 새번역)

잠언30:17절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언30:10 – 17절은 사회에 만연한 어리석고도 악한 행위 유형들이 열거되고, 본절에서 불효에 대한 형벌로 결론을 맺습니다. 동양 사회의 근본이념이 충효입니다. 충((忠)이란 자신의 진심을 다해 남을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데, 사람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부모이기에 ‘충’가운데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을 ‘효(孝)’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효’는 백행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은 “자녀가 효도하면 부모님이 즐거워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고 가르칩니다. 예외도 있지만,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간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단순히 인간들의 차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봅니다.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부모란 말씀과 지혜의 교사요, 가정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불효는 주님의 진노를 받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아굴은 11절의 내용을 반복하면서, 불효자에게 무서운 벌을 선포합니다. ‘눈’은 부모를 멸시하고 불순종하는 자녀의 모습을 상징하며, ‘쪼이고’와 ‘먹히리라’는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으로 까마귀들에게 쪼이고, 이어 독수리 새끼들이 파먹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불효자가 객사한다는 의미로써 그 당시 사회의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삼하21:10). 벌을 떠나 부모님을 명예롭게 여기는 삶이 마땅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잠언30:18,19절
“기이한 일이 셋,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넷이 있으니, 곧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와, 뱀이 바위 위로 지나간 자취와,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하였던 자취이다.”

18절은, “나에게 세 가지가 경이롭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네 가지가 있다”로 직역되고, 19절은 그 네 가지 대상을, 20절에서 교훈의 목적인 성범죄를 경고합니다. 19절에 언급된 경이로운, 그리고 깨닫지 못하는 네 가지 대상은 하늘에서 시작하여 땅으로, 이어 바다로 그리고 남녀간의 관계로 초점이 옮겨 갑니다. ‘자취’의 원어는 ‘페레크’이며, 19절에서 네 번, 20절에 한 번 사용되어 서로를 연결시킵니다. ‘페레크’의 통상의 뜻은 ‘길’(창3:24)이며, 그 밖에 ‘생의 여정’이나 ‘행동 양식’ 혹은 ‘방법’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만약 ‘방법’으로 번역하면, 독수리가 어떻게 공중에 머무르고, 뱀이 다리도 없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배가 어떻게 물에 떠서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고, 만약 ‘길’로 번역하면 독수리나 뱀, 혹은 배가 진행한 경로를 복원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글성경은 후자의 의미로 판단하여 ‘자취’라고 의역하였으나, 어떤 의미로 취하든, 도저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지칭합니다. 이어 남녀의 성적관계가 적시되는데, 남녀 관계의 미묘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나, 성적 관계의 흔적이 남지 않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는 20절의 간음한 여자(음녀)의 뻔뻔함의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신자는 성적 부도덕에 물들지 않도록 세심히 경계해야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5:3).   

잠언30:20절
“간음한 여자의 자취도 그러하니, 먹고도 안 먹었다고 입을 씻듯이 “나는 아무런 악행도 한 일이 없다” 한다.”(새번역)

 ‘그러하니’의 원어는 ‘켄’이며, 원문은 서두에 위치시켜, 19절에 열거된 대상들을 ‘간음한 여자’의행태와 연관시켰습니다. 개정개역이 ‘음녀’로 번역한 ‘잇솨 메나아페트’의 문자적 의미는 ‘간음한 여자’이며, ‘간음’이란 결혼이나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 율법은 사형을 규정하고(신22:23,24) 제사로써 속죄할 수 없습니다(시51:16-19). 후단은 간음한 여자의 말을 직접 인용합니다: “나는 아무런 악행도 한 일이 없다.” 용의주도하게 간음을 행한 후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시치미 떼는 모습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더욱 명료합니다: “그녀는 먹고서 그녀의 입을 씻는다. 그리고 “나는 잘못을 한 바가 없다”고 말한다.’ ‘먹다’란 성행위의 완곡어법입니다(9:16,17). ‘씻다’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간음한 여자의 노력을 묘사하며, 이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되고 뻔뻔스런 모습입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숨기려 할 바에는 처음부터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한 행동이 좋은 예입니다. 그녀는 요셉의 용모가 잘 생겼음을 보고 날마다 동침하기를 요구하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아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합니다. 거절하고 도망친 요셉의 옷을 간직하고 거짓말을 위한 증거로 남편 보디발에게 보여줍니다. 분노한 보디발의 손에 잡혀 옥에 갇힌 요셉은 수년 후 출감하여 총리의 지위에 올랐으나 보디발의 아내를 벌하거나, 보디발에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긴 행동은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하며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매일묵상(2024/6/17-21)


(언약궤와 블레셋 사람들)
사무엘상5:1절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서,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 갔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아스돗으로 가져온 순간부터 블레셋의 성읍들에 독종의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 독종은 아마도 농작물을 먹고, 질병을 퍼뜨리고, 심장을 멈추게 하는 쥐의 전염병으로 판단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이리저리 옮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사태만 악화시켰습니다.  7달 동안 고통을 겪은 뒤에야, 이스라엘 신을 잡아두었다는 모든 교만은 사라지고 문제해결에 집중합니다. 제사장과 복술자들은,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치유한다’ 는 마법적이자 원시적인 생각에 따라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속건제를 삼습니다. 그들은 값진 예물을 드리고 자발적으로 언약궤를 돌려보냄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나, 그 이외에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갖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헌금, 기도, 구제, 예배와 같은 종교 행위로 하나님의 호의를 조작해 내려는 욕망은 아담 만큼 오래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들은 야훼를 경외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질병을 막기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만 입니다. 더 나아가,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나 그들이 바라는 바는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분이 떠나는 것입니다. 마치 거라사의 광인으로부터 쫓겨 나간 귀신들 때문에 2천 마리의 돼지들이 죽자 그 지역 주민들이 와서 예수님께서 떠나 가시기를 구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것이 징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막12:30,새번역)

사무엘상6: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닥친 큰 재앙이 언약궤 때문인지 여부를 시험합니다. 그들은 멍에 멘 적 없는 젖 나는 두 암소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놓고, 벧세메스로 곧장 가는 여부를 확인합니다. 경험칙상, 훈련받지 않은 암소들이 젖 먹는 송아지들을 떠나 알지 못하는 벧세메스로 곧장 올라 갈 수는 없기 때문입 니다. 두 암소는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가는 길을 정확히 걸어 갔고, 블레셋 방백들은 야훼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본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암소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은, 그분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것이지 의무 때문은 아니며, 하나님은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이 스스로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언약궤에 무슨 마법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고 진영에 갔다 놓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거룩한 언약궤를 적군의 손에 넘기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궤를 빼앗기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쓰라린 경험과 함께 언약궤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돌아온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우리가 기복신앙, 마술적 신앙, 징크스 등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주권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임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받습니다.. 두려움을 가졌던 욥은 시험을 통해 이 진리를 배우고, 자유와 축복을 함께 받았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신 분입니다(약5:11).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4:17)

신명기24:20절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소렉 골짜기의 남서쪽에는 에그론에서 벧세메스로 올라오는 큰길이 있습니다. 언약궤가 올라온 그 길입니다. 김상목 작가가 이스라엘 유학생 시절, 소렉 골짜기 현장 답사를 마치고 팀원들과 함께 돌아오다가 수확을 막 끝낸 오렌지 과수원을 만났습니다. 그 과수원 오렌지 나무들은 이곳 저곳에 아직도 탐스러운 오렌지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에, “저 나무에 있는 탐스런 오렌지는 하나님이 3,500년 전 특별히 우리가 이곳을 지날 것을 아시고 모세에게 명하여 율법으로 정해놓은 것이니 마음껏 즐기라”라고 교수가 대답하였습니다. 헌데, 학생 김상목은 오렌지로 갈증을 풀자 집에서 먹으려고 배낭에 주워 담아 벧세메스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렀을 때 오후 늦은 시각이 되었습니다. 온 종일 걸었고 거기에 오렌지까지 한 짐 등에 짊어진 몸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그는 회개합니다: “은혜를 족한 줄로 여겼어야 했건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지나는 또 다른 나그네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음을 생각해야 했는데…나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구나!” 그리고 한참을 더 걸은 경험은 모세 율법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하게된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네 이웃의 포도원의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그릇에는 담지 말라”(신23:24)고 규정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욕망은 좋은 것이나 율법의 범위를 넘어가는 순간 죄(탐심)로 정죄되고, 이 탐심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롬7장). 따라서 성령께서 도와 주셔야만 하며(롬8:13),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 중 하나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베드로전서2:9a절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어제 라오스 방비엔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들려준 한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 아프리카 선교사가 선교사역 중 구겨지고 지저분한 와이샤스 칼러를 기도하여 깨끗하게 되는 기적을 몇 번 경험하였습니다. 이분이 선교대회 연설 차 미국에 가서 문제가 된 와이샤스 칼러를 위해 기도드렸으나 아무 변화도 없었습니다. 연설 후 주님께 그 이유를 묻자 “미국에는 월풀(세탁기)이 있지 않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의 선교대회였으면 “엘지나 삼성이 있지 않느냐?”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유사한 사례가 문익환 목사님이 7-80년 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장기간 수감생활 중 병든 사람들에게 파스를 붙이면 낫는 ‘파스요법’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분이 출감 후에도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대답하셨겠지요! 우주는 주님이 만드신 창조물이며, 삶의 주된 도구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상식’내지 ‘이성’은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살아계신 주님을 무시하며, 인간의 ‘이성’ 내지 ‘상식’을 우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이성’이나 ‘상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건들도 아주 많습니다. 만유의 주님을 섬기는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으며, 각 신자들은 교회에 소속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공동체나 혹은 소속된 구성원의 자격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벧전2:9b).

베드로전서2:4절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새번역)

사도 베드로는 부활 때문에 예수님을 ‘살아 있는 돌’이라 지칭합니다. 사도는 6-8절에서 구약성경(사28:26;시편118:22;사8:14)을 계속 인용하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성전 모퉁잇돌이 되셨고, 신자에게는 보배로운 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같은 메시지를 선포한 바 있습니다(행4:11). 또한 베드로의 이 가르침은 시편118:22절을 인용하여 유대지도자들의 심판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마21:33-46). 이떼 자신을 모퉁잇돌로 지칭하신 것은 역시 부활을 의미합니다. 한편, 본절에서 사도는 예수님을 버린 건축자들을 유대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 확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과 같다는 점입니다. 베드로 당시 신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택함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5절). 부활하신 그들의 주님과 같이, 고난을 견디어 낸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약1:12).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성전과 나라를 세우는 살아 있는 돌들이며, 그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거룩한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자들 입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며, 우리 삶의 영적 본분을 확연히 알게 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매일묵상(2024/6/10- 14)

(마법적 신앙과 하나님)
사무엘상4장22절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구약성경이 ‘갑돌’(신2:23)이라 부르는 ‘크레타’ 섬은 해양민족 블레셋의 기원입니다. 주전1400년 경 그리스 본토의 침략 시 크레타 주민들의 일부가 이스라엘 해변에 정착하여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가드라는 다섯 도시를 형성하였고(BC1200경), 부침을 거듭하다 주전 586년 경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모든 주민은 포로로 잡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주전 1120년 경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아벡에서 충돌합니다. 아벡은 고대 해변의 길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요, 그곳을 경계로 북은 샤론평야, 남은 블레셋평야로 구분되는 전략적 도시였습니다. 첫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주의 언약궤와 제사장들을 모셔왔으나, 오히려 대패 당하고 언약궤는 빼앗깁니다(삼상4장). 이로써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법적 신앙, 즉 ‘언약궤’와 관련된 잘못된 ‘강력한(?) 믿음’내지 ‘논리’를 산산히 부수셨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기자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영영 떠났다는 충격에, 제사장 엘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두 돌판이 보관된 ‘언약궤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요 계명을 행하라는 의미이지, 인간의 뜻(승리, 번영 등)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힘쓴다면 주님의 돌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징계를 받거나 아니면 버려질 것입니다(히12:7-13). 신앙은 하나님을 부리는 마법이 아님에도, 역사는 이스라엘의 다수가 육신적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상숭배와 하나님)
사무엘상5:4절
“ …다곤이 또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서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다곤의 머리와 두 팔목이 부러져서 문지방 위에 나뒹굴었고,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었다.”(새번역)

아벡의 전쟁에서 이긴 블레셋은 아벡에 가장 가까운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주님의 궤를 안치합니다. 그러나 이틀 후, 바닥에 있는 언약궤에 의해 다곤 신상이 부수어진 것을 알자, 누구도 아스돗의 다곤에게 가지 않았습니다.(삼상5:3-5). 우리의 우상과 싸우시는 주님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는 ‘우상숭배하지 말라’인데, 고대인의 세계관에 맞게 풀어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섬기지 말라”(출20:4,5). 그리고 경고와 축복의 약속을 덧붙입니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5,경고).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6,축복). 즉,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면, 주님에게 벌을 받고, 우상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면 자신은 물론 수천 대 자손까지 은혜를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역설’이 존재합니다 : “버려야 산다!” 우상숭배의 시작은 언제이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탐내어 하나님처럼 다룰 때입니다(골3:5). 만약 우리가 탐심이란 우상을 치우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오셔서 그 우상을 부수어뜨릴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자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8:36,새번역)

(현대의 우상과 하나님)
로마서1:26절
“사람들은..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새번역)

‘우상숭배’란 참되신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다양하나 근원은 인간의 ‘탐욕’과 ‘두려움’입니다. 탐욕은 인간에게 좋은 것과 연결되기에 분별을 위한 ‘진리’가 요청됩니다. 야곱이 도망나올 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신(神), 즉 ‘드라빔’이라는 작은 우상을 훔칩니다. 만약 라헬이 ‘드라빔’은 단지 조각된 나무임을 알았다면 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위엄으로 충만합니다(롬1:20). 문제는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시각입니다. 태양을 숭배한 고대인들이 모두 면에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모든 생물을 살리는 열과 빛의 근원되는 복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과 태양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태양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인간은 그것의 관리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양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고대인은 이 진리를 몰라 태양을 숭배하였지만, 지식을 우상삼은 현대인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들이 이성을 통해 세상은 충분히 운영할 수 있음을 주장하나, 러·우 전쟁에서처럼 땅, 돈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실제적인 결정은 탐욕이 강하게 작용하기에, 절대로 합리적·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현대인에게도 복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과 세대를 위한 진리이고, 그 핵심은 ‘나, 너, 우리, 너희’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님되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통해 세상을 섬김으로써, 그분의 통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잠언30:15절
“거머리에게는 ‘달라, 달라’ 하며 보채는 딸이 둘이 있다. 전혀 배부른 줄 모르는 것이 셋, 만족할 줄 모르는 것 넷이 있으니,”(새번역)

11-14절에서 인간의 대표적인 범죄 4가지-불효, 교만, 위선,탐욕-를 제시한 아굴은, 15,16절을 통해 탐욕의 죄에 특히 초점을 맞춥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골3:5)이기 때문입니다. ‘거머리’의 양쪽 끝의 빨판은 ‘달라, 달라 하며 보채는’ 두 딸로 표현됩니다. 거머리는 온 몸이 부풀어 올라도 만족을 모르고 두 빨판으로 계속 피를 빨아댑니다. 이는 결코 만족을 모르고 더 가지려는 ‘탐욕자’를 은유합니다. 특히, 성경에서 ‘피’가 생명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전단의 묘사는 타인의 희생을 개의치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냉혹한 행태를 생생히 느끼게 합니다. 본절의 경고는 16절에 열거된 네 가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들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도착되어진 것에 언제나 만족해 하고 마음도 든든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고백을 하는데, 이것이 신자의 자랑이고, 지혜이며 세속의 현인들이 부러워 하는 경지입니다: “만족하며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자족의 삶을 넘는 것이 섬기는 삶이며, 주님의 모범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하셨는데, 모든 것을 소유하신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은혜를 베푸셨고, 바울은 수고하여 일하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계22:12,새번역)

잠언30:16절
“곧 스올과 아기 못 낳는 태와 물로 갈증을 없앨 수 없는 땅과 만족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불이다.”(새번역)

15절 후단의 만족할 줄 모르는 네 가지가 교차대구법을 사용하여 열거됩니다: 멸망(죽음)-생명(자녀)-생명(곡식)-멸망(불). ‘스올’은 ‘무덤, 지옥’ 등으로 번역되지만, 선악을 불문하고 죽은 자가 거처하는 곳을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스올’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아기 못 낳는 태’란 아이를 얻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진 여인의 모습을 말합니다(창30:1), 세번 째는 메마른 중동지역을 배경으로 이슬, 비, 눈 등이 내려도 곧 흔적 없이 대지에 흡수되어 버리는 자연현상을 언급합니다. 네번 째는, 불로서, 불은 수없이 많은 물건을 태우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삼키는 특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아굴이 만족할 줄 모르는 대상으로 상기 네 가지를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숫자] 잠언은… 결코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독자가 숙고하고 삶에 적용할 여지를 남겨둔다”(아이트켄)는 말을 염두에 두고, ‘멸망과 생명’이 교차적으로 등장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마도, 아굴은 아들들이 상기 네 가지를 비교하고, 땅이 존속하는 한 계속되는 생명과 죽음, 선과 악의 영원한 전쟁을 깨닫게 의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실 때까지(2:20-22), 탐욕스런 자들은(11-15a)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의인은 생명과 선을 만들어 내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싸우며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0,31)

매일묵상(2024/6/3-7)

여호수아10:12절
“여호수아가 주님께 아뢰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가 외쳤다.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러라!”
(새번역)

‘아얄론 골짜기’는 기브온과 해안평야를 연결해 주는 쉐펠라(=’겸손’or’낮음’), 즉 낮은 지역의 5개 골짜기 중 가장 북쪽이며 가장 넓은 지역(평지)를 말합니다. ‘쉐펠라’는 동서 15㎞, 남북으로 60㎞에 이르며 100-400m에 이르는 산들과 골짜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지중해를 따라 뻗어있습니다. 말이 골짜기이지 낮은 산들을 가진 넓은 평야로서, 벧호론 비탈길로 연결되어 예루살렘의 북쪽 기브온에 이르는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입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아얄론 골짜기와 벧호론 비탈길은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 거민들과 격렬한 전쟁을 벌여야만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전쟁이 여호수아 9-10장입니다. 야간 행군까지 감행하면서 길갈(-250m)에서 기브온(900m)까지 가파른 산길을 단숨에 올라와야만 했던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 인천 상륙작전보다 더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펼쳐졌던 이 전쟁의 하이라이트는 여호수아가 기도하고 외치는 본문이며, 우박을 쏟으시고 태양과 달의 운행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자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신자들이 가나안이란 세상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전쟁입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사령관은 부활하신 예수(=여호수아)이고, 승리의 비결은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8:13,새번역).

사사기16:4절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평지’로 번역된 ‘쉐펠라’ 지역은 블레셋 평야와 이스라엘 산지 사이에 있습니다. 제일 북쪽은 아얄론 골짜기, 그 남쪽으로 소렉, 엘라,  벧 구브린, 라기스 골짜기가 차례로 동서로 달리며 각각 유명한 성경 사건의 현장들이 된 것도 이 지리적 특성 때문입니다. ‘쉐펠라’는  두 민족의 최전선이자 완충지역이었습니다. 소렉 골짜기 역시 그 중 하나로 삼손과 블레셋 여인들(들릴라)이 함께 자라고 만난 장소였습니다. 인간이 만나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내용은 언제나 사랑과 배신입니다. 삼손 사후의 ‘아벡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기고, 그 언약궤는 블레셋의 도시를 돌다가 소렉 골짜기를 통해 벧세메스로 돌아갑니다. 벧세메스는 소렉 골짜기 상단에 위치한 언덕(‘텔’이라 부름)으로 블레셋을 막는 이스라엘의 주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삼손이 살았던 소라는 텔 벧세메스의 오른쪽 널찍한 골짜기 건너편의 나지막한 산기슭에 위치하였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 들릴라의 집이고(삿16:4), 좀 더 걸어가면 삼손의 첫 번째 부인 블레셋 여인의 고향 딤나(삿14:1)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사사기 13-16장의 현장입니다. 4월에 소렉 골짜기를 여행한 김상목 목사/작가는 “드넓은 소렉 골짜기는 온통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황금물결의 장관이었다… 삼손이 요염한 들릴라와의 데이트 장소가 보리밭이었다니!” 삼손은 사랑에 들떠서 달려갔던 이 길이 죽음과 파멸의 길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어쩌면 이 순간 삼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편128:1)

잠언30:12절
“더러운 것을 씻지도 않고 깨끗한 체하는 무리가 있다.”(
새번역)

이 잠언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더러운 죄악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만족해 하는 사람을 정죄합니다. ‘더러운 것’이란 ‘배설물’이나 ‘토한 것’을 의미하며, ‘씻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씻겨지다’, ‘깨끗하게 되다’라는 수동적인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의 눈에는 깨끗하고, 그의 더러움으로부터 씻겨지지 아니하였다”가 되어, 상반절과 하반절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즉, 자신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그 결과 온갖 더러움(=불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아굴은, 오물이 감지되면 곧 씻어내지만 보다 중요한 영적· 도덕적 더러움은 깨닫지 못하여 불의에 그대로 머무르는 사람의 행태를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위선과 자기 의에 대한 경고, 그리고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범죄의 우려를 함께 전달하는 메시지라 하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 ‘참회록’ 속의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자신을 성찰한 뒤 마땅히 회개하여 주님의 피로 죄를 씻어야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인 뒤, 1년이나 위선을 행하였습니다만, 선지자 나단이 그 죄를 폭로하자, 다윗은 즉각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다윗을 용서하셨으나, 다윗의 집안은 그 죄의 값으로 풍비박산 되었습니다. 또, 어리석어 계속 죄를 범한 대표적 인물은 삼손입니다. 결국 들릴라의 배신으로 맹인이 되었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손 역시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원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잠언30:13절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교만을 경계하는 본절은 “그의 눈이 얼마나 높으며, 그의 눈꺼풀이 얼마나 높은지!”로 직역됩니다. ‘눈’과 ‘눈꺼풀’이 들린 모습을 통해 교만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영적인 어리석음과 교만에 관한 교훈(12절)의 취지를 확대하였다고 보입니다. 즉, 영적으로  의롭다고 뽑내며(12절), 재산이나 미모, 학식, 권세, 지위, 명예, 가문, 친분관계 등 남보다  좀 낫다고 하여 으시대는 자들(13절) 말입니다. 이 교만한 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견해는 모두 옳고 지혜로우며 자신의 번영은 영원하다는 ‘확증편향’입니다. 그래서 공작새와 같이 자신의 것들을 드러내며 이웃을 업신여기고, 상석에 앉지 못하면 견디지 못합니다. 이들이 잠시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 같아도 실상 가장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란 본시 하나님 앞에 동등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 재물 얻을 능력, 시기와 우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많은 재물을 벌거나 큰 학식 등을 갖게된 것 뿐입니다. 이를 깨닫고 겸손히 자신에게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자에게 지혜가 있다 하겠습니다. 주님은 만유의 창조자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사시고(고후8:9), 심지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겸손히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사53:12). 그 의를 보신 정의의 하나님은 주님을 다시 살리사 지극히 높이셨습니다(빌2:5-11). 따라서,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직한 삶을 보시고 높이시도록, 주어진 은사를 갖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십계명과 산상수훈은 훌륭한 안내자입니다.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잠16:18,새번역)

잠언30:14절
“사람들의 이빨이 칼 같고 턱이 작두 같은 세상이구나. 불쌍한 사람을 지상에 하나 남기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세상에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공동번역)

본절에서 아굴은 약자를 착취하여 치부하는 자들의 탐욕을 밝힙니다. 13절이 ‘눈’과 ‘눈꺼풀’이란 소재를 통해 인간의 교만함을 표현한 반면, 14절은 ‘치아’라는 소재로 인간의 탐욕과 잔인한 압제를 묘사합니다. 원문을 살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의 이들은 검들이며 그의 어금니들은 도살용 칼들이다”가 되어, 개정개역보다는 공동번역의 문구가 좀 더 매끄럽습니다. 이 악인들은 마치 야수가 강한 이로 먹잇감을 부스러뜨리고 찢어 삼키는 것처럼 가난한 자들을 희생물로 삼고 있습니다.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라고 보면 맞습니다. 춘향전의 저자는 변사또의 학정을 심판할 자로 이몽령을 상정하고, 장원급제시킨 후 당해 지역 암행어사로 내려보냅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는 그때, 이몽령은 잔치에 나가 시를 짓습니다. “금준미주천인혈 옥반가효만성고 촉루락시민누락 가성고처원성고- 금잔의 좋은 술은 천 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요, 촛물이 떨어질 때 만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드높더라” 그리고 곧 출도하여 변학도의 악행을 바로잡습니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조선시대 소설이라고 치부될 수 있지만, 성경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유의 주재되심을 선포합니다. 때가 왔을 때, 공정하신 주님은 악한 자를 벌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5: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