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5/27-31)

요한복음 14: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스탈린의 부하들이 명령에 잘 따르자, 처칠이 부러워하여 비결을 물어보니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굴종입니다. 애굽에서 파라오의 권력 밑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그 노예들을 이끌어 내사 자유를 주시고,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셨는데, 그 두 번째는,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내용이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여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부가하셨습니다(출20:6). 40년 뒤 모세는 십계명을 재해설하면서, 이 대목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신5:10).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이유도, 십계명을 주시고, 능력으로 돌보신 하나님의 사랑도,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는 이유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가나안 땅에서 모세율법을 행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이나, 그분에 대한 사랑이 없기에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그들의 순종은 공포나 이익이 동기여서, 가나안 땅(소원 성취)이 주어지자,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 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체포되시기 직전 말씀으로, 출애굽기(20:6)과 신명기(5:10)의 말씀이 그 배경입니다. 제자들은 영적 이스라엘이요, 당신은 새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켜 세상에서 주의 제자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종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마태복음10: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한국의 국가 GDP는 계속 성장하다가 2040년경부터 감소로 돌아서는데, 그 원인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입니다. 저출산이유와 그 해결에 대해 채상욱 작가는 도시기능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피크아웃코리아). 그에 따르면, 지방도시는 일자리, 교육(대학), 의료, 편의시설 등 도시 필수 기능이 결여되어서 20살이 넘으면 수도권으로 이주를 해야만 합니다.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은 계속 상승하여 결혼과 출산률은 낮아지고, 지방은 출산률은 높지만 청년이 되면 탈출하여 고령화가 심화되고 결국 소멸합니다. 작가는 연금개혁과 재택근무의 보편화에서 해법을 모색합니다. 스웨덴 노벨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은 1930년대에 집값과 출생률의 관계를 언급하며 집값 통제를 경고한 바 있지만, 현실은 스웨덴조차 집값은 높아져있고 출생률은 현저히 떨어져 있습니다. 모두 다 인구소멸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다음의 삶이 존재하고 그 삶이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죽음 다음의 영생을 걱정하라’고 경고합니다. 영생은 ‘영원히 살아가는 삶’이나, 영생이 다 축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만이 축복이며, 그렇지 않은 영생은 지옥이라는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이지만, 군나르 뮈르달의 경고를 듣지 않은 스웨덴처럼, 인간은 주님의 경고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그것이 금생과 내생의 열쇠입니다(딤전4:8).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잠언30:9절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8절에서 아굴은 부와 가난을 모두 거부하고 오직 필요한 양식만을 간구하는데, 9절이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의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부와 가난 그 자체는 중립적이나, 그것들이 주님과 자신의 관계에 미치는 결과를 생각해 보자 아굴은 두려웠습니다. ‘배불러서’의 원어는 ‘(질릴 정도로) 실컷 먹다’란 의미로서, ‘육체적 욕구의 만족, 인간적 행복과 번영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때 아굴이 예상하는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을 모른다’로 표현됩니다. ‘모른다’의 히브리어 원어는 ‘거짓으로 부인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알 만한 내적·외적 증거가 있지만 모른체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아굴은 ‘여호와가 누구냐?’란 말로 다시 강조하는데, 하나님을 부인하는 태도는 어리석고 악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시14:1). 또 ‘욕되게 할까’의 원어는 ‘붙잡다, 얻다’는 뜻입니다. 도적질 후, 형벌을 면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하거나,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모범은커녕 그분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동이기에, 아굴은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아굴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싶지만, 자신의 신앙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과 달리 물질적 조건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굴은 기도하는 것이며, 아굴은 응답받아 주어진 삶에 자족하며 경건히 삶을 마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잠언30:10절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아굴의 교훈의 시작은 약자의 대명사인 종에 대한 보호입니다. 이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의 일부여서,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학대받는 종들이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예는 빈번 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런 종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라는 규정을 두어 보호합니다(신23:15). ‘비방하다’란 히브리어는 ‘은밀한 말로 헐뜯다(중상모략)’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본절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특별한 잘못이 없는 종임을 암시합니다. ‘저주하다’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그 저주가 까닭 없다면 아무에게도 미치지 못하므로 웃어넘길 수 있지만(잠26:2), 이유 있는 저주는 그렇지 않음을 아굴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수호자이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늘에서 유죄판결이 나면 하나님의 형벌이 찾아올 수 있음을 두려워 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종도 은밀히 하지만 저주할 권한이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약자들을 보호하지 않고 착취하면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기드온의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이복형제 70명을 죽일 때, 화를 피한 요담은 그리심 산에 서서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을 저주하였습니다. 사사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여 요담의 저주가 응했다고 증언합니다(삿9:57). 그 반면, 전도서는 ‘종이 너를 저주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남의 말에 신경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전7:21-22). 우리는 바르고 균형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마12:36,공동번역)

잠언30:11절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1절은 ‘부모님’이라는 통상의 문구 대신 ‘그들의 아버지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축복을 빌지 않는(저주하는) 저주받은 불효자식들이 부각됩니다. 모세율법은 그들에게 사형을 규정하였습니다(출21:17). 누군가 그리스 현자 솔론에게 왜 존속살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자신은 그렇게 불경건하고 잔인한 자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경학자 브리짓의 말대로, “율법수여자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의 마음의 사악함은 상상초월이란 사실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렘17:9). 이 어리석은 반역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빚진 부모님들의 건강과 평강의 삶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오직 탕자처럼 유산을 좀 더 빨리 받거나, 부양책임을 회피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합니다(마15:3-6).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장자 암논을 죽이고 장자가 되었음에도 하루빨리 왕이 되려고 반역을 일으켰으나, 첩자인 아렉사람 후세의 말을 듣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버려 파멸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음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섭리적 통치는 이처럼 은밀합니다. 비록 그들의 부모는 지혜로울 수 있을지라도, 이 바보들은 낳고 기른 부모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정의의 주님께서 그냥 놓아두실리가 없습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과 똑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20:20;30:17). 그러나 자식의 행동은 부모의 책임에 귀착되는 경우가 많다는 현대적 연구결과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잠3:7,새번역)

매일묵상(2024/5/20-24)

고린도후서4:7절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새번역)

수사법 중 역설법(逆說法)이란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을 말합니다. 좋은 예가 사도 바울이 자신을 고린도후서에서 7개의 역설을 통해 변호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사도의 글은 매우 힘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죽었으나 살아났다”는 표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역설법이지만, 우리 믿음은 그 역설에 기초합니다. 또한, 복음을 살아내는 힘도 자신이 아니라 바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세상의 냉혹한 평가나 많은 역경에도 사도가 늘 기뻐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비밀이지만, 세상은 이 능력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겸손히  살아가면서 종종 받는 이유 없는 비난, 박해, 오해에 온유해야 합니다. 만약 화를 내면 상대방은 걸려넘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전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좋은 길잡이로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힘 주시며, 좀 더 자신 있고 고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28:20).“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5).

디모데후서2:6절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러우 전쟁(2022/2)의 발발로, 폴란드는 독일제 무기 구입을 고려하다가 돌연, 가성비와 납기가 확실한 한국 무기를 도입하였습니다(30조원). 독일은 당황하였지만 당연한 결과입니다. 1990년 통일과 냉전 종식으로 독일은 무기 개발을 등한 시 하였으나, 한국은 북한의 위협 하에 70년 간 무기개발에 노력해 왔습니다. 위협적인 남북대치 상황이 플러스로 작동한 순간입니다. 더구나, 사계절을 두루 갖춘 한국은 어떤 기후에도 적합한 전차나 자주포 등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한국민이 상황에 불평하지 않고 적응하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레오파르트 전차 보다 한국의 K-2전차의 우수성이 입증되었으나, 노르웨이는 정치적 이유로 독일을 선택한 사례처럼, 노력이 곧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한편, K-2 전차 생산에는 우연한 기회에 러시아 최신기술이 적용되었는데, 불곰사업을 통해 컵라면, 쵸코파이를 주고 러시아산 전차 T80 등을 도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의 명품 무기인 K-9자주포, K-2 전차, 천궁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노력은 인간의 몫이고 성공의 기회는 주님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노력하지 않으면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바라고 뛰지만, 오직 소수만 정상에 섭니다. 신자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때 낙담하거나 기복신앙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기에, 실패도 유익한 것입니다(빌1:21). 주님은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잠언30:5절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순결하며, 그분은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방패가 되신다.”
(새번역)

아굴은 2-4절에서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그 존재의 미미함을 수사학적 표현을 통하여 진술하였다면, 본절과 6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야금술과 군사적 은유를 동원하여 교훈합니다. ‘순결하다’로 번역된 ‘차라프’는 금속을 정련시켜 찌끼를 제거하는 것을 뜻하는데, 정련된 금이나 은에는 불순물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나 오염된 사상이 섞여 있지 않고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다윗의 신앙고백과 궤를 같이 합니다: “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시편12:6,새번역). 따라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본 사람은 순금이나 순은을 볼 때처럼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그 말씀을 통해 빛나는 진리를 삶의 등불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시119:105). 어느 칸트 철학자는 매일 아침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칸트의 저서를 읽으면 머리가 맑아져 하루를 시작하는데 힘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를 맑게 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까지 기쁘게 하며, 그 교훈을 들으면 용기가 나고, 그 깨끗함에 우리의 눈이 밝게 빛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세상에서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를 수 있는 진리는 오직 하나, ‘주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의를 행하고, 또 경고를 받아 허물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지킴으로 주님의 상을 받게 됩니다(시편19:7-11). 끝으로, 주님은 이들의 방패가 되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편119:104).

잠언30:6절
“그의 말씀에 아무것도 더 보태지 마라. 거짓말쟁이라고 꾸지람을 들으리라.”
(공동번역)

본문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덧붙이는 행위는 물론, 자의적으로 빼는 행위도 금지하고 있습니다(계22:18,19). 그 기준은 말씀의 본래 취지를 존중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른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거짓되었다는 책망을 받게 됩니다. 거짓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사망이 선고된 것입니다(계21:8). 의의 열매는 오직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하여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금과 은과 같이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만 맺어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의 뜻이 듣는 자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해석·선포되어야 하는데, 말씀하신 환경과 말씀을 전할 때의 환경이 다르기에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다가 마침내 요단 강 동쪽 모압평지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은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 내가 받들어 너희에게 전하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계명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4:2,공동번역)고 경계한 뒤,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상황에 맞게 해설합니다(5장).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이며, 이웃 사랑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신명기 6장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이유입니다(6:4-5). 하나님을 사랑해야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고, 제대로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시편19:7,새번역).

잠언30:7-8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전의 구절에서 아굴은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한계(2-4),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한 신앙고백(5,6)을 하였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오직 주님의 말씀과 그 원천인 주님을 절저히 붙잡고 신뢰해야 온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계명을 따라 살아 가는 믿음과 지혜를 가질 때”부터, 온전하고 성숙한 제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것은 마치 칠흙 같은 악천후에 눈이 아니라, 계기만을 보고 목적지를 향해 바르게 비행하는 노련한 조종사와 같습니다. 만유의 주님을 알면 우리는 진실해지고,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합니다. 그것들이 내게 해가 됨을 직시하게 되어서 온갖 인간적 잔꾀는 사라지고, 우리 눈 앞에 ‘십계명의 대로’가 나타납니다. 주님 경외, 부모공경, 살인·간음·도둑질의 금지, 거짓과 탐심의 금지를 명하는 계명만 지켜도 삶은 경건으로 넘쳐납니다. 공자는 70세에 “종심소욕불유구”- 마음의 소욕대로 행하였지만, 법도를 넘지 않았다-라고 자평하였는데, 15세에 시작된 자신의 배움이 70에 성숙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갈5:24). 아굴은 본문에서 십계명 중 두 가지를 구합니다: 거짓됨과 탐욕의 금지. 이 두 계명은 물질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으므로, 연약한 자신은 주님이 정하신 몫의 양식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경건의 향기가 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매일묵상(2024/5/13-17)

민족 사랑 이야기와 복음
이사야42: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위국헌신군인본분”을 쓴 안중근 의사처럼, 최진립(1566-1636)은 병자호란 때 순국하여 군인의 본분을 다하며(69세), 300년 간 경주 부자 최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한 귀양살이를 겪어서, “사람이 왕후장상의 씨가 아니면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는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기에 위험하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는 유훈을 남깁니다. 상민으로는 부나 가문을 세우기 어렵기에 진사까지는 허락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3대 최국선에 이르자 부자가 되었지만, 큰 흉년이 들자 부자의 책임을 절감합니다. 그는 창고를 열고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면서 빚문서를 불에 태웠습니다(1671). 그리고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정립합니다. 최씨 가문의 부의 끝은 일제 때 백산상회를 운영하면서 독립자금을 상해로 보내고, 전 재산을 팔아 육영사업에 힘쓴 최준 선생입니다. 경주 부자 최씨의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안중근과 최준의 이야기는 일본인이, 최진립의 이야기는 중국인이, 최국선의 이야기는 소작인들이 거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와 민족을 포괄하는 정의와 사랑의 이야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즉 복음입니다. 복음은 듣고 회개하여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롬1:16,17).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2:2).

시편84: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자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란 카피로 유명한 前제일기획 부사장 최인아 씨(1961)에게 28년 간 조직에서 살아남은 비결을 묻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분별력”이 그 비결임을 밝힙니다. 2006년 자신을 냉철히 평가하고자 산티아고의 순례자의 길(35일, 800킬로)을 걸었고, 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복귀한지 6년 후 부사장직에서 사직합니다. 디지털 물결이라는 변화의 시대에 역량 부족을 자인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최인아 책방’을 운영하면서 작가로 변신하였습니다. 최인아 씨는 재능을 기반으로 소신껏 살아왔습니다. 신자의 삶은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첫째, 만족의 삶입니다: 84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직무(성전과 제사업무)에 만족하여, 성전의 하루가 다른 날보다 천 배나 값짐을 고백합니다. 둘째 주님을 배워가는 삶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선하심을 여러 번 경험하기에, 시인은 ‘복이 있다’고 3번 말합니다: (1-4절) 주님을 갈망하여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 받는 축복/ (5-8절)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를 따라 순례의 길에 오른 자들이 받는 축복/(9-12절) 주님을 신뢰하여 그분 안에서 쉬는 자들의 축복입니다. 셋째, 주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1). 신앙의 길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인 갈망 때문에 시작되며, ‘눈물 골짜기’ 같이 메마른 곳을 통과할 때의 경우에는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등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입니다(6). 이것이 영생의 본질로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84:7).

잠언30:1,2절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잠언은 솔로몬이 젊은이를 위하여 말한 강화집(1-9장),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단편 경구 선집(10-29장), 그리고 아굴과 르무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주는 훈계(30,31장)의 3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를 꿰뚫는 주제어는 ‘주님(야훼)을 경외하라’입니다. 30장은 아굴의 잠언입니다. 아굴(의미: ’수집하는 자’)과 그의 아버지 야게의 정체는 모르나, 솔로몬 시대의 현인 중 한 분으로 추정되며, 대상은 이디엘과 우갈 두 아들이고, 타락한 인간의 부정적 모습에 초점을 두어 훈계합니다. 30장의 구조입니다: 전반부(1-9)는 아굴 자신의 신앙고백과, 경건한 지혜자로 살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조건을 다룹니다. 중반부(10-23)는 비방, 불효, 위선, 교만, 압제, 탐욕, 불순종 등 어리석고 악한 행동의 기본 유형을 제시합니다. 끝으로 후반부(24-33)는 인생이 귀감으로 삼을 표상들(개미,사반, 메뚜기, 도마뱀. 사자 등)을 제시하며 권면을 마칩니다. 한편, 2절에서 아굴은 이성 없는 ‘짐승’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는데, ‘참으로 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자다’라고 의역되고, 후단에서 재차 강조됩니다. 그 당시는 물론 후세에도 지혜자로 알려졌을 아굴 자신의 겸손을 읽을 수 있고, 본잠언의 독자들은 참된 자아성찰을 행하여 주님을 경외하도록 이끕니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하나뿐인 지혜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이 생각납니다. “미련한 사람은 명철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의견만을 내세운다.”(잠언18:2,새번역).

잠언30:3절
“나는 지혜를 배우지도 못하였고,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아는 지식도 깨우치지 못하였다.”(새번역)

아굴은 또 한 번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하는데, 지혜롭게 되려고 하는 자들은 먼저 자신의 무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잠언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최악의 바보로 평가합니다(29:12). 그러므로 아굴은 어리석은 자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는 특히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여서, 누구든지 참된 지혜를 얻으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 무지와 죄악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2절에서 아무런 이성의 빛도 없는 짐승에 자신을 비유한 아굴은, 3절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분’ 즉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혜와 지식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아굴은 잠언의 가장 큰 주제인 ‘야훼를 경외(두려움)’하는 것이야말로 지식과 지혜의 시작’(1:7)임을 또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굴의 겸손어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에게 주는 통찰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 분야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찾아낼 때까지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야 위험까지 대비하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바울은 베드로, 바울, 아볼로 등이 고린도 교회에서 놀라운 역사를 행하였더라도 그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의 원천되시는 주님만을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고전3:18-23). 따라서, 사람이나 직업 등을 고려할 때도, 강점은 물론 약점이나 위험성까지 반드시 찾아내어 저울질한 뒤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3:18).

잠언30:4절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4절의 다섯 개의 질문은 인간 지혜의 무지와 도달불가능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우치려는 수사법입니다. 질문의 의도는 두 아들이 무지를 깨닫고, 자신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을 신뢰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마지막 질문을 제외하고는 즉각적으로 ‘그분은 하나님이다’는 답이 떠오르게 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하신 연속적인 하나님의 질문들이 생각납니다(욥38-39장):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욥38:2-4새번역).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그때까지, 무죄하나 고난 중의 욥은, 자신의 사건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강력히 호소하고 있었으나,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사 말씀하시자, 욥은 자신이 당한 일들을 하나도 진술하지 못합니다. 대신 하나님이 쏟아내시는 엄청난 질문들을 숨죽여 듣다가 하나님의 광대한 지혜를 깨닫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욥의 무지를 깨닫게 하사 당신을 경외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욥기의 끝은 “하나님은 욥을 기쁘시게 받으셨고 그의 곤경을 돌이키셔서 배나 축복하셨다”이지만, 결국 믿음의 이야기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특권은 믿음의 이야기, 주님을 경외하는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특권은 그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

매일묵상(2024/5/6-10)


시련과 기쁨
야고보서1:2절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새번역)

야고보서는 신앙의 박해로 각 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크리스찬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참조 행8:1-3). 사도는 그런 어려움을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인내 없는 믿음은 불량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합격된 믿음을 보면 항상 인내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인내를 만들어 내려면 시험이라는 원재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련 중 믿음이 없다면, 염려라는 독소만 생겨 삶을 뒤흔들고야 맙니다. 인내를 온전히 갖춘 신앙 인격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될 것입니다(12). 따라서, 시험이 강도처럼 들이 닥칠 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지혜입니다. 한편,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막상 여러 가지 시험이 들이닥치면 걱정 근심에 휩싸이는 것이 연약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때 야고보서는 ‘시험을 이길 지혜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는데(5), 이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능력입니다. 구할 때 풍성히 주실 것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6-8) 왜냐하면 반드시 응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고 있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사역). 사도 바울 역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감사가 여기서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평강의 하나님
빌립보서4: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으로 염려를 극복하게 되면(빌4:6-7), 하나님의 평강이 늘 우리 마음과 삶 가운데 머물도록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환경을 구축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사도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4:8,9). 첫째, 주님 앞에서 가치있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8). 사도가 “형제 여러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참되고, 고상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4:8,쉬운성경)라고 가르친 이유입니다. 둘째, 그 생각을 행하여야 합니다(9). 사도는 빌립보에 머물러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면하는데, 바울의 그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기 때문입니다(고전11:1).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어려움에 처하여 기도하고 응답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평강을 맛 보면, 이웃과 다툴 이유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능력의 근원이 우리 안에 와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약4:2,3). 그래서 전에는 타인을 이용하여 나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다면, 이제는 남을 배려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연습합니다. 그 와중에 사람의 칭찬을 받을 만한 탁월함(기림)을 보여주었더라도, 겸손하게 되는 것은 “만약 주님께서 그런 기회와 재주를 타인에게 주셨다면, 나보다 훨씬 나은 성과가 나왔을 것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8). 자연히 다툼은 사라지는데, 이것이 성령 충만한 개인·가정·교회·직장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새번역)


잠언29장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새번역)

이 잠언은 피조물 인간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한다’를 직역하면 ‘사람의 공포’이며, ‘의지한다’의 원어의 뜻은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이고, ‘안전하다’는 문자적으로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놓여지다’는 의미입니다. 25절 전단의 좋은 예가 24절에 나온 진실치 못한 증인입니다. 24절 은 재물을 탐하여 도둑과 한 패거리가 된 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맹세에도 진실된 증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25절은 그 이유와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의 위증 이유는 함께 한 도둑 패거리의 보복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나, 그 두려움 때문에 침묵한 결과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됩니다. 이는 그 도둑 패거리들이 증거를 없애고자 해를 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 영화의 흔한 소재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주님을 두려워 하여 진실된 증언을 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한다면, 주님은 섭리 가운데 혹은 국가의 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증인을 보호함으로 안전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25절 후단의 예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노함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고 풀무와 사자굴에 던져져 죽기를 선택하였지만, 모두 주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안전히 구출 받았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지켜주심으로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함에 감사드려야 합니다(요일5:18) 다만,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요구한 바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잠언3:5,새번역)

잠언29장26절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26절은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일의 결정권자 되심을 밝힙니다(잠언21:1). 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고 선언한 25절의 좋은 예시이자 확실한 근거입니다. 물론 26절이 법적 수단을 통한 구제를 금하라는 취지는 아닙니다. 다만, 주님에 대한 순종 없이 통치자의 환심만을 사려는 세태를 경고합니다. 전단을 직역하면, “많은 사람들이 통치자의 얼굴을 구한다’입니다.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존경과 동시에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을 지적하는데, 사람의 일과 재판의 결정이 권세자에게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에 직면하면 통상 취하는 행동양식이지만, 후단을 보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후단을 직역하면 “각 사람에 대한 재판(판결)은 주님께로부터 온다”입니다. 사람의 일이 외형상 통치자나 재판관들의 결정으로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의인에게는 주님의 변호하심이 있고, 또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분이 정의 실현의 최종 책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 아하수에로 왕의 얼굴을 구하다가,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게 된 사건은 그 예입니다. 하만이 밤에 왕궁으로 가는 그시각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의 일기를 듣다가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선행을 알게 되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편37:11).

잠언29장27절
“의인은 불의한 사람을 싫어하고, 악인은 정직한 사람을 싫어한다.”(새번역)

28:1 – 29:27절은 ‘의인과 악인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결과’를 고찰하면서, 27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의인과 악인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싫어한다.’ 전단의 ‘불의한 사람’이란 범죄하고 사법제도를 남용하는 자들이며, 후단의 ‘정직한 사람’이란 타인의 사회적, 법률적, 경제적 권리를 보호하려고 확립하신 하나님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동쪽으로 이동할 때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신2장). 에돔 땅 와디 푸논을 통하면(15킬로) 쉽게 ‘왕의 대로’에 이르고, 요단 동쪽 모압평지에 집결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남동쪽으로 3백킬로미터를 돌아갑니다. “이 지역은 에서 자손에게 주었으니 전쟁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두 번에 걸친 모세의 간청에도 에돔 왕은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먼 길에 지친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자 불뱀들이 나타나고, 회개하는 자들을 위해 놋뱀이 만들어집니다(민21:4-9). 광야는 이 세상을,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요3:14),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간직한 신자의 삶을 각각 상징합니다. 의인과 악인이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는, 의인은 하나님과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나, 악인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갈등은 근본적인 문제요, 열정의 문제이다. 따라서 타협될 수 없고 서로 싫어하는 마음을 완화시킬 수 없다”(말빔). 잠언은 의인의 이런 비관용적 자세를 칭찬하면서, 그들의 보호자는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주의 이름은 견고한 성루이므로, 의인이 그 곳으로 달려가면, 아무도 뒤쫓지 못한다.”(잠언18:10,새번역)

매일묵상(2024/4/29 – 5/3)

말씀과 믿음 그리고 평안
마태복음6: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주기도문의 이 대목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들을 그날 그날 공급해 주실 것을 요청하라는 내용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신자들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걱정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광야로 인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 그 날 먹을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40년 뒤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길갈에 이르러 그 땅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 만나는 그쳤습니다(수5:12). 범죄한 아담에게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선고하신 뒤, 아담의 모든 후손(남자)은 일하여 가정을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나’는 광야라는 예외적 상황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에 대해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합니다. 첫째, 무관심한 태도 – 자신의 재력과 능력으로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지만, ‘양식 bread’은 병, 근심, 고난 등 모든 필요를 함축하기에, 결핍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마법적 신앙- 요술 주문처럼 보는 태도로, 복권을 사고는 왜 당첨을 시켜주지 않느냐고 소리치는 사람들이죠! 본문이 위치한 문맥과 취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 보물과 같이 간직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며, 이는 하나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성취의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같지만, 온갖 풍파가 닥쳐도 기도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마음에 늘 평안이 있는 것이 다릅니다. 경건의 훈련은 여기서 나옵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믿음의 추론
마태복음6장24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6:24-34절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으니(24),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25). 그 근거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주인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염려해야 합니다. 주기도문 순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6:24-34)은 주기도문의 해설판이며, 주님은 믿음에 근거한 이성적 추론을 전개합니다. “하찮은 미물인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그처럼 먹을 것을 주시고, 입혀주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나라와 의를 염려하고 먼저 구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을 어떻게 돌보시지 않겠는가?” 누가복음은 한 발 더나아가,  “그런 것들을 구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아라”(눅12:29)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세상 백성이 구하려고 달려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입니다(눅12:30).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차이는 노력이 아니라, 삶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비행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따라 비행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좌표를 따라 비행하는 연습을 합니다. 평시에는 별 차이 없어도, 인생의 밤이 오면, 하나님을 주인 삼은 제자들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말씀을 따라 안전히 비행합니다. 조종사가 계기판만 보고 비행하는 법을 배우듯이(계기비행), 제자들은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믿음의 지혜).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전7:12,새번역).

잠언29장22절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기를 잘하는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새번역)

본절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자기 절제의 중요성을 교훈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의 원어 ‘이쉬 아프’의 직역은 ‘분노의 사람’으로, 상습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화를 절제하지 못하면 다툼을 일으키고 죄를 많이 짓는다고 선포합니다. ‘다툼’이란 인간 관계에서 야기되는 분쟁을, ‘죄를 짓는다’는 표현은 그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실패까지 내포합니다. 이는 범죄란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율법)을 넘는 모든 행위를 일컫기 때문입니다. 왜 분노하게 될까요? 원인은 다양하지만, 상대방의 도를 넘는 행동, 급한 성격, 교만한 마음 등이 주요 동인이라 보여집니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입니다. 이분이 무예와 힘이 뛰어나서, 직선적으로 사건을 보고 사람들을 대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자로가 벼슬하는 위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공자는 자로의 급한 성격과 의기를 알기 때문에 비명횡사할 것을 예견합니다(논어). 따라서 공자는 평소에 “정직함을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급하게 되는 것이다.”며 자로를 훈계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김지현 씨의 조언입니다. “일단 멈추자. 화가 났을 때는 일단 멈추어야 한다. 분노의 감정은 파도가 한번 밀려왔다 가는 정도의 시간 안에 절정에 달했다가 내려오게 된다. 그 고비만 넘기면 힘들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쥐어짤 수 있고 해결이 가능해진다. 화장실이든 욕실이든 차고든, 5분 정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옮기는 게 좋다”(오마이뉴스, 자녀양육칼럼). “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잠언29장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23절은 ‘교만’과 ‘겸손’의 마음 및 각 결과를 비교하여 교훈합니다. ‘절제와 양육’이란 문맥을 감안하면, 교만하더라도 정당한 꾸지람, 징계 등을 겸허히 받아들일 경우, 높아져 영예롭게 될 수 있음을 함축합니다. ‘교만, pride’의 원어는 ‘높다, 솟아오르다’란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며, 겸손은 ‘낮음’을 뜻합니다. 교만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 재능, 힘, 지혜를 믿고 상대를 내려다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 스미스와 해밀톤은 ‘교만은 스스로 충분함을 느끼고, 겸손을 버린 뒤 마음을 높여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립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할 당위성을 거부하며, 이익추구의 사회적 한계인 도덕과 공동체 규범을 무시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 혹은 공동체에 의해 낮아지게 됩니다(사회적 불명예, 재산의 상실, 범죄에 대한 형벌 등). 반면, ‘마음이 겸손하면’ 타인과 잘 지내고, 좋은 사회관계를 형성함으로 좀 더 많은 성공 기회를 잡게 됩니다. 또한 겸손한 자의 마음은 화평한데,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에게 충실함으로, 맡겨진 일에 능숙하게 되어, 천한 자가 아니라 왕 앞에 서는 영예를 얻습니다. 예외는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세상의 법칙입니다. 전단의 예는 ‘자식인체 하는 종’(29:21)이며, 후단의 예는 ‘징계를 받아 행동을 고친 자식’(29:17)입니다. 신자는 축복을 받았을 때 본문을 마음에 새기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19).

잠언29장24절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

본절은 재물보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는 자의 말로를 보여줍니다. 그는 재물을 탐하다가 도둑의 재물에 이르고, 마침내 위증죄까지 범하게 되어 불안 속에 떨며 살아갑니다. 전단에서 ‘도둑과 짝하는 자’의 직역은 ‘도둑과 함께 나누는 자’로서, 도둑의 행동에 동참하고 재물을 나누는 모습이고,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란  ‘자기의 목숨 혹은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후단은 증인 선서 후 증인이 된 자의 책임과 벌칙을 규정한 레위기(5:1)가 그 배경인데, 그는 도둑과 한 패여서 진실된 증언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재물을 중하게 여기는 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재물에 접근하고자 하나, 이는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감찰하고 계셔서 그 죄가 폭로되든지 늦어도 죽은 후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후자는 더 나쁜 경우인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도둑’이란 단순히 절도죄 등을 범한 자가 아니라 악행을 일삼는 죄인들을 총칭한다고 본다면, 본 잠언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넘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관철하려는 인간의 본질적 죄에도 적용됩니다. 이 경우, ‘재물이냐 하나님이냐’에서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로 범위를 넓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들리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세상의 악한 정체를 폭로하심으로, 속고 있던 인간들이 마음의 주인을 세상(사탄)에서 하나님으로 바꾸게 하는 계시의 사건이요(요12:30), 회개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길을 여신 은혜의 사건입니다(요14:6).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