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4/22-26)


기도하고 감사하라
빌립보서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며 살아갈 때 종종 ‘염려’가 침입하곤 합니다. 이때 사도가 주는 두 번째 처방은, ‘기도하고 감사하라’입니다. 기도 그것도 감사를 동반한 기도가 염려를 치료합니다. 먼저, 6절의 시작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염려가 들어 왔을 때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 가짐’이 중요한데, 주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쫓는 애굽 군대와 가로막은 홍해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를 몰아세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오늘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보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죠! 다음으로, 본문은 ‘하나님께 아뢰라(기도)’고 권면하는데, 그 기도는 “감사”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신 것을 생각하면 늘 감사하게 되는데, 바로 그 감사의 마음입니다. 또,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아닙니까?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께서 문제를 맡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편, 심리학자는 자신을 잘 아는 동료나 가족에게 염려에 관해 대화를 나누라고 조언하는데, 믿음의 공동체의 필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면, 응답이 오고 있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당도할 때까지 마음의 긴장은 믿음의 형제들과의 대화를 통해 완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표준새번역)

하나님의 초월적 평강
빌립보서4:7절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새번역)

본절은 감사와 함께 아뢴다면, 그 결과 “모든 지각(이해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그 평강(에이레네)”이 군사처럼 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그 평강”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주님의 초자연적 평강으로, 염려를 쫓아내고 강물처럼 우리 마음을 점령합니다. 그 순간은 진짜 “강 같은 평화입니다.” 재수시절 모의고사 성적이 계속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염려되어 기도하자 초월적 평강이 주어졌고 충만한 기쁨으로 버스 타고 집에 가는 중 마귀는 온갖 가정, 염려, 근심을 다 집어 넣었습니다. 저는 그것들과 투쟁으로 받았던 평강이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당면 문제 해결이 중요하나, 하나님의 뜻은 좀 더 높습니다. 하나님은 기도 전에 그 해법을 다 준비하셨습니다(마6:8-9).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인격을 갖추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된 세상에 고난과 선한 투쟁 없이 어떻게 그분의 아들의 믿음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응답을 자꾸 받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한 두번 경험한 뒤는 믿음의 추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손의 부친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후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는다’는 공포에 떨었으나, 그 아내는 그렇지 않음을 믿음의 추론 3가지를 들고 안심시켰습니다.(삿13:2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9장19절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19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합당한 조치(통제)는, 자녀, 백성 그리고 자신은 물론, 종에게도 필요함을 밝힙니다. 전단은 “종은 말로는 결코 교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치지 아니한다’의 원문은 가장 강한 부정어와 미완료 동사를 결합시켜, ‘절대로 아니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더구나, 일반어순과 달리, 솔로몬은 ‘말로만 하면’(전치사구)을 문장 서두에 두어, 부정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즉, ‘말만 가지고서’는 종들은 절대로 교정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솔로몬은 경험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잠언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아는 것은 곧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 묘사된 종은 어리석어 알지만 행하지 않기에, 물리적 징계를 초래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고대 지혜문학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로 ‘회초리가 주인에게서 멀면 종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파피루스인싱거)는 격언도 그 하나입니다. 물리적인 징계를 가해야만 순종하는 종들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바로 순종하라는 교훈을 내포합니다(신10:16,마음의 할례). 다락방 강화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로 여기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벗으로 여기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들으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열매를 맺고 그 맺은 열매가 항상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15:16). 주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잠언22:15,표준새번역)

잠언29장20절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본절은 22절과 함께 ‘자기통제력’을 위한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충동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걱정하는데, 그보다 미련한 자를 더 높게 평가할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말이 조급한 사람’은 자신의 언어가 초래하는 도덕적 사회적 파장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바보이지요! ‘말’의 원어는 ‘따바르’이며, ‘말’ ‘사건, 일, 행적’ 등을 나타냅니다. 또, ‘조급한’에 해당하는 ‘아츠’는 ‘경솔하고 성급한 행동이나 말’을 지칭합니다. ‘조급함’의 원인은 자제심의 결여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제자는 세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그분의 뜻에 언행심사 일체를 맞추는 것이 으뜸가는 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바보의 말은 이런 생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 천하에 드러내게 되고, 그것도 성급히 또 경솔하게 쏟아냅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 (28:20)나, ‘발이 급하여 잘못 가는 사람’(19:2)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원할 때 원하는 것을, 그 방법까지 합리적으로 계산한 뒤, 비로서 말과 행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후단은, 그가 바보보다 교정받기 힘들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바보는 자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다루기 힘들지만, 불경건한 자는 탐욕에 지배당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도덕조차 백안시 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는 그런 자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와 함께 “가장 최악의 바보”로 분류됩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언26:12).

잠언29장21절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곱게 양육하다’는 말은 ‘파나크’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오직 한 번만 등장하기에 그 의미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학자들은 ‘지나친 사랑으로 애지중지 키운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한편, ‘자식’이란 말의 원어 ‘마논’도 그와 같아, ‘풍족하게 자라 버릇없이 구는 자식’을 의미한다고 추측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종이 어리다고 응석을 받아 주면 자라서 버릇없이 군다’고 한 공동번역처럼, 귀엽다고 종을 지나친 사랑으로 키우면 결국 예의도 모르는 종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사랑이나 호의를 받는다면 좋은 일이나, 그가 겸손하고 성실함을 유지할 때만 축복입니다. 만약 주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서 분수를 모르고 자식처럼 행세하면, 주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땅을 뒤흔들고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사건으로, ‘종이 임금이 되고 바보가 부자 되고 꺼림칙한 여자가 시집가고 계집종이 안주인 자리를 빼앗는 것’을 언급합니다(30:21-23,공동번역). 그러나 이런 일들은 종종 일어나는데,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죄의 속성’(원죄)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성공, 축복, 은혜를 위해서는 밤을 새워 부르짖으나, 겸손을 위해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징계로 바로잡지 않으면 은혜와 사랑이 오히려 심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극히 큰 계시와 능력을 부여한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둔 이유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매일묵상(2024/4/15-19)

빌립보서1: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진지 약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초대 목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의원 누가가 유력합니다. 누가는 빌립보까지는 바울의 전도여행의 일원(2차)이어서,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썼고(행16:10-40),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행17:1)부터 ‘그들’로 적고 있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교에 입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전합니다(행16:14). 이때 전도는 바울이 하나, 마음을 여신 분은 주님임을 밝혀, 복음 전도와 관련한 많은 함의를 던져줍니다. 이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하고, 옥터가 흔들리는 기적과 함께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합니다. 그 후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 세워졌고, 누가는 목회를 위해 남겨졌다가, 6년 후 사도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의 끝무렵 다시 합류합니다(행20:4).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가이샤라 마르티나로 압송되어 가택 연금(2년)을 당합니다. 이때 빌립보 교회가 보낸 헌금이 도착하였고, 빌립보서는 그 답신입니다(AD60년경). 편지에서 기약 없는 구금과 많은 적대자들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사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체포 당하기 직전에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신 주님을 배운 그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한 삶
빌립보서4:4,5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립보서4:4-7절은 우리의 가정, 직장, 교회 등 모든 삶에서 존재하는 염려스러운 상황을 이길 비결을 다룹니다. 우리는 환난, 곤고함,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혹은 칼이라고 표현될 정도의 상황을 직면할 경우도 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평화스럽고 정상적인 삶을 적군처럼 뚫고 들어오기에 기쁨도 사라지고, 평화와 감사도 없어져, 마치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역시 외부의 위협(1:27), 교회 내의 불화(4:1-2), 궁핍에 대한 두려움(4:19)을 가졌고, 몇몇은 겸손한 태도도 결여되었습니다(2:3,4). 교인들의 삶을 잘 아는 바울은 2가지 대처법을 말합니다. 먼저, 사도는 항상 기뻐하며 관용(사랑)을 베풀라- 4절은 ‘기뻐하라’-는 명령을 반복합니다. 기쁨은 언제나 그리스도인 삶의 특징이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죄의 문제를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해결하시고, 부활하여 사망을 이기신 이래,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의 역사’(살전1:3)를 경험하는 삶입니다. 이는 주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5). 따라서, 곤란에 닥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갑자기 평안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계명에 주목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여 관용을 베풀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사도는 얼마 후, 데살로니가로 가서 전도 시 박해를 받아 아덴으로 피신하였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항상 기뻐하라”(살전5:16)고 명령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잠언29장16절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이 잠언의 전단의 직역은, “악인이 많아지면 반역도 많아진다”입니다. 악인이 전면에 나서게 될 때, 사회에는 광범위한 도덕적 부패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많아진다’는 말은 수적인 증가를 뜻하지만, 악인의 세력도 점점 강해짐을 내포합니다. 후단은 바른 길을 걷는 사람들, 즉 의인은 악인들의 멸망을 본다고 말함으로써, 악인의 권세는 항상 일시적임을 지적합니다. 결국 의인이 승리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클리포드의 말입니다: “악인이 많아지면 타인에 대한 범죄가 증가할 것이고, 이는 그들의 멸망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악한 세력의 증가 그 자체는 그들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범죄는 사회 불안과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옳은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잠언은 악인에게, “네가 지금은 강할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며 경고하는 일면, 불법자가 판을 치는 시기에 의인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좋은 예는, 노아의 홍수입니다. 아담의 타락 후, 메시야를 기다리라는 약속이 아담에게 주어졌고(창3:15), 아담은 그 믿음으로 천년을 살아가는 동안, 의인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땅에는 폭력이 충만하였으며, 심지어 네피림(타락한 자)까지 살았다고 증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홍수로 심판하셨으며, 의인 노아는 그들의 멸망을 목격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한 바벨론 제국의 죄악을 신속히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를 묻자, 주님은“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하신 답변을 유의해야 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잠언29장17절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이 잠언은 15절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훈육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징계하라’의 원어 ‘얏쎄르’는 ‘훈계하라, 가르치라, 징벌하라’는 의미이며, 물리적인 수단이 포함된 적극적인 훈계를 행하여 자녀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첫째, ‘너를 펑안하게 한다.’ 잘 양육된 자녀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모의 삶에 평안을 가져옵니다. 부모공경 계명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이 계명을 배우지 못한 자녀는 그 축복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둘째,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기쁨’의 원어는 ‘진미, 진수성찬’을 의미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기쁘듯이 효를 행하는 자녀가 주는 기쁨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자녀의 성공적인 삶은 물론, 그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필요시 징계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회초리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잘못이나 실수를 보면서도 ‘뭐 이깟 일로’ 혹은 ‘아직 어리니까 좀더 큰 다음에’라는 등의 이유로 징계를 꺼리곤 합니다. 그러나 아이라도 그 안에는 이기심과 질투라는 죄의 씨가 심겨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원죄). 훈육의 의무를 게을리 하자,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과 왕 다윗의 세 아들은 모두 비명횡사하였고,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시고, 또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편126:5)

잠언29장18절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이 잠언은 국운의 성쇠 여부를 율법과 연관하여 파악함으로, 국가와 공동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교육의 중요성을 깨우칩니다. ‘묵시’의 원어 ‘하존’은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계시(말씀)를 지혜의 측면에서 보면,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11:14a)는 교훈이 나옵니다. 개인, 공동체, 기업, 그리고 국가는 모두 달성해야 할 ‘목적-goal’이 지도자에 의해 제시되고, 그에 합당한 정책과 계획이 수립되고 집행되어야 복된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 반대의 사회는 혼란 그 자체이며,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로 묘사되었습니다. ‘방자히 행하다’의 원어 ‘파라’는 ‘굴레를 벗겨내고 느슨하게 한다’는 뜻으로, 전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도자가 없을 때, 백성들은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지도자 모세가 두 돌판을 받으러 올라가자, 산 밑의 백성들은 아론을 협박하여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추며 우상숭배로 나갔습니다(출32:25). 이에 반하여, 후단은 율법을 지켜 행하면 질서와 번영이 찾아온다고 교훈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잠언은 지혜의 측면에서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잠11:14b)고 선포합니다.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이나 세종대왕 시대의 조선이 그렇습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의 대한민국도 같기 때문에, 국가가 바른 정책, 법률, 정치, 경제, 그리고 외교적 역량을 갖추도록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매일묵상(2024/4/8-1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어거스틴이 보기에 어머니 모니카는 온유한 마음을 바탕으로 서로 생각이 다르거나 불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목을 일구어 내는 큰 은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원수는 없고 친구만 있는 자리에서는, 그 원수에 대한 증오심으로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동원해서 독설을 퍼붓고 악담을 쏟아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악담을 듣게 될 때, 그들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말이외에는 어떤 말도 당사자에게 절대 옳기지 않았다는데, 사실 이런 분은 매우 드물다 할 수 있습니다. 1700년 전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원수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하여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내뱉은 말들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옮길 뿐더러 심지어 하지도 않은 말들을 덧붙이는 사람들을 부지기수로 많이 보았기에 어머니의 이런 행동은 지금의 나에게는 결코 결코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악담을 삼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선한 말을 해서 사람들의 증오심을 없애려고 애를 쓰는 것이 마땅한데 어머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면서, 어거스틴은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주님은 어머니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학교에서 어머니를 붙들고 가르치신 선생이셨습니다” 중생의 결과 성령께서 모니카의 마음에 오셔서 가르치심으로 주님을 본받아 행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이 심으신 의의 나무’입니다(사61:3)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8)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모니카는 말이 아니라 행실을 통해 일생 남편을 전도하고, 마침내 삶의 끝자락에 선 그를 주님께인도하였습니다. 말씀을 실천한 반석 위에선 믿음의 여인입니다(벧전3:1-6). 또한, 모니카는 교회와 주교들을 잘 섬겼습니다. 어거스틴의 증언입니다: “어머니는 주님의 종들을 섬기는 여종이셨습니다. 어머니를 알게 된 주님의 종들은 한결같이, 어머니의 거룩한 삶의 열매라는 증거를 통해서, 주님이 어머니의 마음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어머니로 말미암아 주님을 크게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며 사랑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니카는 “한 남편의 아내”였고,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를 공경하였으며, 자신의 집안을 경건하게 이끌었으며, “선한 행실의 증거를”를 보였으며, 자녀들이 주님을 떠나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실 때마다 다시 산고를 겪는 것처럼 괴로워하며 양육하였음을 어거스틴은 고백하고, 그녀의 마지막을 기록합니다. “어머니가 주님 안에서 잠드시기 전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세례를 받게 하시고,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를 자식처럼 돌보아 주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종들’이라 불릴 수 있게 된 우리 모두를, 자녀가 부모를 섬기듯 그렇게 섬기셨습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과 함께 로마에서 귀국하던 중 세상을 떠납니다(54세). 모니카의 삶은 주님의 뜻을 행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열매들은 그 아들 어거스틴에 의해 세상에 밝히 드러나 우리의 귀감이 됩니다.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편37:6)

잠언29:13절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표면적으로 보면, 부자-특히 재물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그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삶의 격차는 매우 커서, 부자는 안락하고 사치스럽게 살지만, 가난한 자들은 더럽고 궁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 잠언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선포합니다. 잠언의 제자들이 지혜를 얻는 대목입니다. 만약, 주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자연히 상호존중, 배려의 태도를 갖게 되어 그에 합당한 질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는 세상 지혜와의 차이입니다. 13절은 22:2절에 주어진 교훈의 변형입니다. 다만, ‘부자와 가난한 자”(22:2) 대신 “가난한 자와 포악한 자”로 바꾸어 공의를 근거한 통치질서를 다루는 문맥(12-14)에 적합하도록 맞추었습니다. ‘눈에 빛을 주신다’는 말은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제유법)입니다. 그러나 ‘포악한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부자는 포악한 자로 변하여 법률과 제도를 통해 가난한 자를 수탈하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포악한 자는 결국 정당한 심판을 받게 되지만, 그 전에는 ‘압제하는 자와 압제 당하는 자’ 모두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수혜자입니다(마5:44-45). 만약 포악한 자가 자신의 좋은 삶은 오직 하나님의 관용에 기인함을 안다면, 그는 압제를 버리고, 가난한 자와 가치와 몫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로써, 세리장 삭개오가 회개한 예가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는 포악한 자를 경멸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그들조차 심판이 임하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받고 있음을 깨닫고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잠언29:14절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12-14절의 주제는 공의에 근거한 통치 질서의 필요성이며, 솔로몬은 ‘가난한 자를 성실하게 판단하는’ 통치자의 긍정적 이미지(14)를,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통치자’(12절)의 부정적 모습과 병치함으로 교훈의 효과를 극대화시켰습니다. ‘신원(伸寃)’에 해당하는 원문은 재판한다는 의미를 갖는 ‘쇼페트’입니다. 이 잠언이 왕의 직무로서 재판이나 판결을 예로 든 것은, 고대에 왕의 주요직무 중 하나가 백성들에 대한 공의로운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본 구절을 통해 사회의 모든 약자를 돌보라고 임명받은 왕에게, 그 임무를 부지런히 수행한다면 강력한 통치질서를 확립하게 됨을 약속합니다. 거짓 증거를 듣는 왕과 대조적으로, 이 현명한 왕은 증인들의 성품을 주의깊게 살펴 정의와 진리를 확립하는 지혜자입니다. 또한, 14절은 ‘포악한 자에게도 빛을 주신다’(13절)는 말이 초래할 수 있는 오해를 없애고, 왕이 힘없는 자들이 압제당하는 현실에 관심을 쏟아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도록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솔로몬 통치 초기에 한 아들을 갖고 서로 다투는 두 창녀의 소송을 성실하게 재판하자 솔로몬의 왕위는 일생 견고하였지만, 통치 말년은 우상숭배라는 거짓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많은 건축과 사치를 위해 무거운 조세와 부역을 백성에게 부과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큰 불만을 갖게 되었고 왕국은 그의 사후 분열되어, 솔로몬은 자신의 잠언을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같이 세상 권세는 일시적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에 좌정하시어 공평과 정의로 영원히 보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편45:6).

잠언29: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5-23절은 하나님의 말씀(모세율법)을 통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대상으로 자녀, 백성, 종을 들면서, 중점은 인간의 죄성 억제입니다. 교육이 죄성을 제거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반복적인 교육은 죄성 억제에 큰 효과가 있습니다. 15절은 본능대로 살아가게 내버려둔 자녀는 하나님이 세우신 도덕질서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그 결과 부모에게 닥쳐오는 불행(욕과 수치)을 지적합니다. 어리석음을 벗어나서 지혜롭게 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교정이 요구되는 이유이며, 종종 ‘채찍과 꾸지람’이 수반되야 합니다. 잠언이 체벌의 필요성을 반복하여 언급한 근거입니다. 만약, 부모가 교정이 힘들어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자녀는 제멋대로 자라나서 가정에 욕을 끼칠 것입니다. 잠언 29장은 3절에서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지혜로운 아들을, 15절에서는 ‘어머니’를 부끄럽게 하는 어리석은 아들을 대조시켜, 훈육이란 수고의 열매의 아름다움을 보게 합니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자녀들을 한 번도 꾸짖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도록 하여, 첫째, 둘째, 셋째가 모두 비명횡사하였습니다. 야곱도 12 아들을 낳고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여 그 가정에 근친상간, 집단학살, 질투, 인신매매(요셉), 불효, 속임이란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징계하여 순종을 배우게 하셨고, 결국 희생할 줄 아는 유다와 용서할 줄 아는 요셉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양육은 쉽지 않으니,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십시오.”(엡6:4,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4/4/1 – 5)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5)- 결혼 생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1700년 전 북아프리카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는 못했습니다. 고백록의 한 대목입니다: “어머니의 경우보다 더 온유하고 점잖은 남편과 같이 살면서도, 남편에게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붓고 멍이 들어 다니는 부인들도 많았는데…” 모니카는 그런 부인들과 사적으로 대화 시, 남편들의 흉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경우, “혼인 서약을 하고 성혼이 선포된 후에는, 부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종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면서 농담을 섞어 진지하게 훈계한 뒤, 그들의 혀를 꾸짖고, 그렇기 때문에 늘 자신의 처지를 명심하여, 교만해져서 주인에게 대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니카가 충동적으로 충고한 것은 아닙니다. 그 부인들은 모니카의 남편이 성질 사납고 화를 잘 내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 파트리키우스가 자기 아내를 때렸다거나, 가정불화가 단 하루라도 있었다는 소문이 나돈 적도 없었고, 그런 일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어떤 증거도 자신들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놀라워 하면서, 그 비결이 무엇인지 넌지시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니카의 비결을 따라 살아간 부인들은 그녀의 말이 맞았음을 확인하고서 감사하였고, 그 비결을 따라 살지 않았던 부인들은 계속해서 남편에게 눌려서 고생하며 괴로운 삶을 살았다고 어거스틴은 기록합니다. 모니카의 비결은 사도들의 가르침(엡5:22-24;벧전3:1-6)을 그대로 실천한 열매로서, 인간 관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주님의 가르침이 해결의 비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6)- 결혼 생활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고백록에서 새삼 느낀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남에 대한 호기심과 수군거림이 존재하며, 특히 여자가 시집 가면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하다고 보여집니다. 인간의 타락을 웅변하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면서 온유한 심령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일하시고 이윽고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약3:18). 모니카의 시어머니 역시 악의적인 하녀들의 수군거리는 말을 듣자, 처음에는 며느리를 좋지 않게 보시고 화를 내었지만, 그녀가 인내와 온유함으로 잘 참아내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자 화가 누그러지셔서, 자기 아들을 불러, 하녀들이 자기와 며느리를 이간질시켜, 가정의 화평을 어지럽혔으니 벌을 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남편 파트리키우스는, 모친의 당부도 있고, 이후 집안 사람들끼지 화목하게 지내게 하려면 적절한 징계를 통해서 가정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뒤, 모친이 지목하였던 하녀들에게 매질을 하였고, 또한 시어머니는 앞으로 자기에게 잘 보이려고 며느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험담을 하면, 이 같은 벌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자 험담이 사라지고 눈에 띄게 사이가 좋아져서, 서로를 위하며 화목하게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니, 모니카의 지혜로운 행실은 우리의 가정 생활, 결혼 생활,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귀감이 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잠언29:10절
“남을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을 미워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의 생명을 보살펴 준다.”(새번역)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자라도 해치는 자를, ‘흠 없는 사람’이란 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자를 말합니다. ‘흠 없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려고 매우 노력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 전형이 욥입니다. ‘미워하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상대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증오심을 갖는 감정상태로, 실제 공격하여 해를 끼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벨을 질투하여 살해한 가인의 모습입니다(창4:1-8). 이들이 왜 의인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의인의 책망과 비판은 가시 같아 불의한 이익이 침해받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잡아 죽인 이유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무슨 짓이든지 행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의인의 고난은 불가피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의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살핌과, 자신의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믿고,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행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고난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난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0년의 도망자 생활에서 오히려 원수 사울을 두 번 살려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고의 귀를 붙여주셨고,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신 뒤, 그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냥 거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주님의 의’를 빛 같이 드러내셨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29:11절
“어리석은 사람은 쌓인 분노를 다 터뜨려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 분노를 억제한다.”(새번역)

‘분노’의 원어는 ‘루아’입니다. ‘루아’는 ‘호흡, 바람, 영, 생각’을 뜻하며, ‘분노’는 통상 ’아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다스리며 때와 상황에 맞추어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분노의 때가 가장 마음을 통제하기 어려워 바보와 현자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구약학자 롱맨 3세의 말입니다: “바보들은 잘 들으려고 하지 않기도 하지만, 확실히 말이 많다. 그들의 말은 문제를 일으키고 듣는 자들은 동요한다. 그들의 감정은 지성이 결여되어 있고, 그들의 감정은 종종 부적절하게 표현됨으로,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이에 반해, 지혜자는 냉철하기에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만 입을 연다. 그들은 또한 바보들의 말로 야기된 어지러운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 사실 어리석은 자는 환경이 조금만 어렵고 위험해져도 안절부절못합니다. 가나안 접경에 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떠오릅니다(민14:1). 그러나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깊은 호수나 바다 같아, 쉽게 동요되지 않고, 매사에 신중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과 대적하는 고라의 무리에 직면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후 행동하는 모세가 좋은 본보기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지혜롭다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준비하신 해결책을 찾아 나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인정 받은 이유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29:12절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12-14절의 주제는 공의에 근거한 통치 질서의 필요성입니다. 12절은 통치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14절은 긍정적 이미지를 각 다루며, 13절은 중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 구절은 ‘관원’으로 묘사된 통치자가 거짓말에 귀를 기울일 경우 나타날 사회적 혼란을 보여주고, 선악을 분별할 지도자의 통치 능력을 요청합니다. ‘관원’이란 ‘다스리다’는 의미를 내포하여 ‘통치자’로 번역 가능하고, ‘들으면’은 ‘듣고 따르다’는 의미입니다. ‘하인들’은 ‘섬기다’를 뜻하는 분사 형태를 번역한 것이나, 노예가 아니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관직에 있는 자들, 즉 ‘신하’를 지칭합니다. 이를 통해 솔로몬은 국가의 통치자가 거짓말을 분별하지 못하면 신하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며 오직 악인들만 남게 된다는 경고를 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적합합니다. 잘못된 통치의 출발점은 통치자의 느슨한 윤리적 사고와 행동임이 새삼 강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에서 통치자 다윗은 자신의 왕국에서 속임과 사기를 허용하지 않을 것을 결단하고, 신실한 자를 살펴 함께 통치하려는 의사를 시로 피력합니다: “흠 없이 정직한 자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속이는 자는 내 집에 살지 못할 것이며 거짓말하는 자도 내 앞에 서지 못하리라. 내가 이 땅에서 매일 악인들을 제거할 것이니 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여호와의 성에서 추방될 것이다.”(시편101:6b-8 현대인의성경). 책임 있는 자리에 앉게 되면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의 성취를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언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