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02/26-29)

누가복움6:29a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누가복음6장27-36절은 원수 사랑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악에 대하여 사랑, 선행, 축복, 기도로 갚으라는 말씀은 언뜻 이해 되지 않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심판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모욕적인 상황을 주님 심판에 맡기고 오히려 선을 베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원수가 되는 4가지 예 중 하나이며, 특히 박해 받을 때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빰을 치는 자입니다. 이것은 모욕의 의미를 갖습니다만, 이때 ‘저 빰도 돌려대라’고 명령하시는 취지는 모욕 당하는 상황에서 맞서 싸우지 말고 온유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취지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마침내 땅을 기업으로 받기 때문입니다(시37:11;마5:5). 그러나 온유는 겁먹은 태도와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이 체포된 주님에게 침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조롱하자, 주님은 그들에게 보복하지는 않았지만, 태도가 건방지다고 손바닥으로 친 자에게는 때린 정당한 이유를 당당히 되물었습니다(요18:23). 위압적인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그를 위해 선한 증거를 주셨고, 로마 군인들의 조롱과 채칙에는 인내하셨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주님을 그대로 본받아 저항하지 않고 온유하게 수용하였으며, 그 모습을 본 많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250년이 흐르자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정복하였습니다(AD325). 이 반면 로마에 무력으로 저항한 유대인들은 AD 70년, AD117년, AD 136년 세번에 걸쳐 철저히 진압됨으로, 유대 땅을 잃고 전 세계로 흩어졌다는 역사 또한, 위 말씀을 뒷받침합니다.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b)

잠언28:26절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26절은 25절의 ‘신뢰’를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까지 확대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는 안전을 확보하려고 이기적인 지혜에 기대지 않습니다.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본 구절은 ‘자기의 마음(or 의견, 생각)을 믿는 자’와 ‘지혜롭게 행하는 자’를 대조하였습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주님 혹은 현자의 교훈에 의해 인도 받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바보들만 모인 낙원에 살고 있어서, 다른 생각을 말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대조적으로, ‘지혜롭게 사는 자’는 자신의 총명을 신뢰하지 않고(3:5,7), 하늘의 계시인 성경을 의지합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성’의 한계로 매사에 공정하고 균형 있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 성경 말씀에 비추어 항상 재검토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잠언은 자신의 꾀를 믿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 배후에 서 계신 주님을 의지하도록 늘 깨우칩니다(22:29). 만약 그런 가르침과 믿음이 결여 되면, 아무리 유능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어리석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좋은 예입니다. 솔로몬이 자기 지혜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자, 미련하게 되어 우상숭배로 나아갔습니다. (8:5;19:8).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지혜롭게 행하는 자’로서 구원을 얻기 때문에, 벌 받을 일 없습니다(1:32-33). 따라서, 반드시 배워 마음에 담아 놓아야만 합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잠언3:5,새번역).

잠언28:27절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모자라는 것이 없지만, 그를 못 본 체하는 사람은 많은 저주를 받는다.”(새번역)

본 잠언의 주제는 ‘자비와 풍부한 삶’ vs ‘인색과 부족한 삶’의 상호성으로, ‘탐욕을 품은 삶과 경건한 신뢰의 삶’의 결과를 다룬 28:25절을 이어 교훈합니다. 27절에서 ‘자비한 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표현되었고, 그들의 부족함 없는 삶의 비결은 25절에서 밝힌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물론, 주님의 뜻을 행하였다고 당장 보상이 주어지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갚아주심을 믿고(마6:4,6), ‘지금 도착되어진 것들에 만족해 합니다. ‘경건에 기초한 자족’은 탐욕스러운 인간에게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입니다. 부호 록펠로도, 조금 더 가졌으면 좋겠다고 토로했을 정도로, 탐욕은 늘 모자르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혜(마음,생각)을 의지하는 인색한 자(26절)가 가난한 자들을 못 본 체하고 창고문을 닫아버림은 당연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가르십니다. 한 쪽은 형제 중 가장 어렵고 미천한 자를 도와 주고, 다른 쪽은 그런 자들을 못 본 체한 신자입니다. 전자는 축복받아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후자는 저주를 받아 영벌에 처해집니다. 모두 놀라니,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25:40,45)고 대답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눅16:19-31)의 가르침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언28:26)

잠언28:28절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잠언28:12-28절은 “‘부’의 지배와 획득 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단락으로, 28절은 결론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인 율법의 준행 여부입니다. 창조와 섭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으뜸 가는 지혜이며, 그분의 뜻이 율법(십계명)으로 계시되었기에, 잠언은 율법을 행하는 자를 의인과 지혜자로 규정짓습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준행하지만,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율법을 버리고 자신의 뜻(생각)대로 살아 갑니다. 이같이 ‘의로움’과 ‘악함’은 각각 지혜와 미련함의 윤리적 측면입니다. 전단은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돌려 듣지 않는’ 어리석은 악인이 권력을 잡아 학정을 하는 시대를 말하며, 므낫세의 55년 통치가 그 예입니다. 우상숭배는 물론, 선지자 이사야를 포함하여 무죄한 자를 또한 많이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 숨게 되는데, 수탈과 권력의 남용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그 반면 그들이 멸망하면 숨어 있던 의인들이 나타나고,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인들을 통해 사회는 발전되고 평화는 정착되며 공공의 이익은 크게 증진될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악인의 패망을 보고 기뻐 외치고, 새롭게 권력을 잡은 의로운 통치자의 개혁을 생각하고 즐거워하기 마련입니다(잠11:10). 지혜는 지혜자 개인은 물론 공동체에도 큰 혜택을 끼칩니다. 공동체의 번영 없이 개인의 번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와 정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1,2)

매일묵상(2024/02/19-23)

아브라함의 시험과 믿음

‘땅, 민족, 복의 근원’의 약속(창12:1-4)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테스트 당했습니다.(1)’땅’에 관한 시험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하자 척박한 남방 땅만 남았고, 곧이어 백년만의 대 기근이 찾아 왔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수모를 당한 뒤 올라와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이방인의 땅에서 100년을 살 동안 감사로 단들을 쌓았습니다. 왜일까요? (2)’민족’에 관한 시험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99세에 늙은 사라가 낳을 이삭과 언약을 맺겠다고 하셨을 때, 그들은 웃었지만 순종하였습니다. 왜일까요? (3) ‘복의 근원’에 관한 시험입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내렸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령 받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향하였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친구로 불릴 정도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약속의 영적 성격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약속의 본질은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지으실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요8:56-58). 이 소망을 갖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200년 동안 가나안 땅에서 땅 한 평 사지 않고, 장막을 치면서 살아갔습니다(히11:9,10). 가나안 땅, 이스라엘 민족 이 모든 것은 그 영원한 기업의 모형임을 안 것이죠! 그러므로, 척박한 땅, 위협적인 원주민들, 기근 등에도 불구하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이 지으실 영원한 도성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살아갔습니다 (히11:16).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30)

잠언28:23절
“아첨하는 사람보다는 바르게 꾸짖는 사람이, 나중에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새번역)

23절은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는 부모나, 잘못가는 친구에게 충언하는 경우를 말하지만, 그 문맥은 재물을 다루는 내용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당한 과정을 생략하고 성급하게 재물을 벌려고 하면 잘못되어, 형벌을 받는다는 교훈인 20절과 함께 생각해 보면, 두 종류의 친구가 떠오릅니다: 그릇 행동하는 친구에게 미움을 받을 각오로 충고하는 사람과 아첨하여 그 행동을 더욱 강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인색하고 재물 얻기에 급급한 부자에게 빈궁이 찾아온다는 경고인 22절과 함께 생각해 보면, 그런 부자를 바르게 꾸짖어 행동을 고치게 하는 경우나, 혹은 듣기 좋은 말만 하여 미움받지 않으려는 경우입니다. 비록 삭개오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인색한 부자가 쓴 소리를 듣고,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기대할 수 없습니다(마19:22-26). 이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눅16:19-31)의 핵심적 가르침입니다. 그 부자는 문 앞의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고 죽었습니다. 죽은 뒤 음부에서 고통 당해 보니 형제들이 생각났고, 나사로를 보내 이들을 깨우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권함을 받지 못한다고 거절당합니다(16:19-31). 실로, 상대방이 싫어하지만, 그를 위해 충고하는 사람은 좋은 친구입니다. 그러나, 이런 친구는 희귀합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고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만들어 놓으신 이유 중 하나이며, 성경 만큼 좋은 친구는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1:7) 

잠언28:24절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십계명을 반포하셨습니다(출20장). 그 5번째가 부모 공경 계명으로, 지키는 자에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렇면, 부모 공경 계명의 함의는 무엇이겠습니까? 잠언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며(19:26; 20:20; 28:24; 30:11, 17), 그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제 8계명이며, 이로써 보호하려는 대상은 부모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입니다. 문제는, 타인도 아니고, 부모의 것을 도둑질할 경우입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먼저, 부모의 재물에 피해를 입히고, 다음으로, 부모자식 관계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가 파괴됩니다. 더구나, 본문은 도둑질한 자가 ‘죄가 아니라’는 말을 적었는데, 그런 자녀들은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조차 없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들은 가족의 일원으로 자신들에게 속한 것을 단순히 가져간 것뿐임을 강변하여도, 그들이 타인-비록 부모라 하더라도-에게 속한 것을 훔쳐간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자녀들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물론, 부모공경의 계명도 어긴 것이며, 또한, 탐욕을 내서 부모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므로, ‘탐내지 말라’는 계명과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도 어긴 것이 됩니다. ‘탐하는 자는 곧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입니다. 형법은 자식이 부모의 재물을 절취할 경우 형을 면제시키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5).

잠언28:25절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부와 관련하여 ‘주님을 의지하는 관대한 자’와 ‘자기를 의지하는 인색한 자’의 차이를 다루는 25-27절은 주님과의 바른 관계라는 주제로 되돌아가서, 경건 대 불경건” 즉, 주님과의 관계가 행위의 원천임을 교훈합니다. 25절은 ‘욕심이 많은 자’와 ‘주님(야훼)을 의지하는 자’를 대조합니다. 욕심이 많은 자는 불경건하며, 타인과 늘 다투는데, 탐욕으로 사회적 경계선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자는 선을 지켜 다툼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립니다. 그 비결은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이란 정직한 노동, 만족, 섬김, 베품 등을 포함하며, 그는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이 정하신 도덕적 경계를 견고히 하고, 자신과 타인을 정직하게 평가하여 도착된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웁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일생이 좋은 예이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알려면 이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읽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았는데, 주님을 의지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 모두는 풍족한 삶을 누렸고, 성경은 그 원천이 언약의 주님임을 밝힙니다(창24:1;26:29;39:5). 그러나 ‘경건과 복’의 순서가 바뀌면 안됩니다. 사탄은 재앙을 염려하는 욥의 불완전한 믿음을 보고 주님과 욥을 싸잡아 비판하였습니다. 욥이 극한 시험을 이겨내자, 주님은 욥의 노년에 배나 축복하셨고, 욥은 장수하고 부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만, 욥은 친지들이 ‘케쉬타와 금고리 하나씩’을 각각 준 것을 미천 삼아, 갑절의 부를 일구어내는 근면과 기술의 소유자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사무엘 마펫 선교사
로마서12:17절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사무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1864-1936)는 26세에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았습니다(1890). 1893년 복음의 불모지 평양을 선교지로 삼고, 평양에 도착하자 곧 “여러분 예수 믿고 천국에 가야만 합니다”라는, 서투른 한국말로 복음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유교 전통과 미신에 젖은 조선인들은 거부하고 대신 박해를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후에 목사가 된 건달 청년 이기풍이 벌인 폭행 및 상해사건 이었습니다. 그는 마펫 선교사를 못마땅하게 여겨 발로 옆구리를 차서 고꾸라지게 한 것은 물론, 짓고 있던 예배당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펫 선교사의 턱에 돌을 던져 피투성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겁이 나자 원산으로 도주하였으나, 마펫 선교사는 참고 이기풍을 관가에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이기풍이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용서를 빌자, 마펫 선교사는 용서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마펫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세우자 이기풍을 1기생으로 입학시켜. 한국인 최초 일곱 명의 목사 중 한 분이 되는 명예를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나, 1934년 70세에 은퇴 후에도 조선에 남아 일본의 통치에 항거하다가 미국으로 추방되었지만(1936년), 거처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때, 지인의 배려로 남가주 몰로비아 시에 있는 집차고를 개조한 방을 얻어 조선을 기리며 선교사의 삶을 마쳤습니다(1939년). 주님과 조선민족을 사랑하여 일생을 드린 분으로 본이 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6:32)

매일묵상(2024/2/13-16)

세상의 길과 믿음의 길(1)
어느 인류학자가 뉴기니의 여자들에게 남편의 이름을 묻자, 비명횡사한 남편들을 읋었습니다: “첫 남편은 엘로피족 침략자들에게 죽었고, 두 번째 남편은 나를 탐내던 남자에게 죽었고, 그 남자가 세 번째 남편이 되었는데, 두 번째 남편의 동생이 죽여서 복수하였어요.” 아담 이후 노아의 대홍수까지 인간의 역사도 그러했습니다. 그 때는 엄청난 혼란과 폭력의 시대였습니다. 그 원인의 하나로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을 마음대로 아내 삼은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천사의 영역과 인간 영역이 결합되었고, 네피림 즉,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이었으나, 동시에 타락한 자들로서 자신의 욕망충족을 위해 살아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부패와 폭력이 가득찬 세상에 대홍수를 보내사 심판하심으로 멸망시켰습니다. 바벨탑 사건도 같습니다. 홍수 후 노아의 자손들이 번성하자, 모여서 높은 탑을 쌓아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사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곳이지, 하나님은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모여 만든 도시와 국가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인간 사회에는 권력투쟁만이 존재하고, 살아남은 권력은 항상 부패하였음을 역사는 증언합니다. 이에 반하여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길을 가르칩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걸어간 그 길입니다. 한편, 창세기는 이스마엘이나 에서와 같이 세상에 동화된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이야기도 적고 있음을 유념하여 바른 믿음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2:1).

세상의 길과 믿음의 길(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창12:2, 새번역)

아브라함 등 족장들의 삶은 보이지 않는 분을 경외하는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이들은 에덴 동산이 아니라, 혼탁하고 위험하며 이기적인 세상에서, 그러나 세상과는 다르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그분의 계명을 간직하여 그 계명의 길로 갔습니다. 세상이 보면 경건하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자들이요,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분들을 먼저 만나야만 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실로, 하나님 나라의 2인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약속과 함께 고향을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약속에는 땅으로 상징되는 물질의 축복, 이름으로 대표되는 명예의 축복, 민족이란 말로 표현된 자손의 축복, ‘복의 근원’으로 언급된 생명나무의 축복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도 몰랐지만 묻지도 않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물론, 지금 가고 있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그런 사실은 아브라함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땅에서 자신과 후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였습니다. 많은 조사를 한 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은 가나안이라고 해석한 것뿐입니다. 오랜 여행 끝에 도착한 그 곳에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확증하였습니다(창12:7). 그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 아브라함의 방식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우리도 그러해야만 합니다.“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잠언28:21절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빵 한 조각 때문에 그런 죄를 지을 수도 있다.”(새번역)

21절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합니다. 전반부는 공정한 결정과 판결을 촉구하고, 후반부는 재판 과정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뇌물을 콕집어 경계합니다. ‘빵 한 조각’이란 작은 이익을 말하며, 한 끼의 식사대접으로도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깨우칩니다. 많은 사람이 뇌물에 약합니다.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이 늙자 그 아들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였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몰락하고, 사울의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형법은 뇌물죄란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때”(129조)라고 규정하여, 뇌물죄의 성립은 ‘공무원 또는 중재인’, ‘직무와 관련성 그리고 ‘대가 관계’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규정의 구체적 적용은 해석에 달려 있어, 재판관의 양심과 독립성은 보장이 중요합니다. 한국은 헌법에 이를 보장하는 규정(103조)을 두었으나, 실제의 재판과정에 존재하는 압력과 유혹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힘은 법관 자신의 신념에서 나옵니다. 만약, 그 법관이 주님을 경외한다면 그 이상의 자격조건은 없을 것입니다. 요사이 연일 보도 되었던 영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의 경우 형법상 뇌물죄와는 관련성이 없으나, 대통령과 국민을 위해 냉정하게 거절해야만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들로서, 우리를 들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려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정직하게 맡겨진 직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계1:6). 마지막 심판은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 “감추어진 일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일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눅12:2, 현대인의성경)

잠언28:22절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선한 눈을 가진 자(22:9)에 비추어, ‘악한 눈이 있는 자’란 인색과 탐욕으로 재물 쌓기에 급급한 자입니다. 통상 재물을 쌓으면 부자가 되지만, 후반절은 ‘빈궁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염두에 둔 교훈입니다. 잠언은 “재물은 사라지는 법, 독수리처럼 날개가 돋쳐 날아가 버린다”(23:5, 현대인의성경)는 사실을 익히 알고, “부자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라”(23:4)고 합니다. 더 나아가, 전도서는 죄인들에게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에게 넘겨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냅니다(전2:26). 신약에서의 진정한 재산은 하나님 나라를, ‘빈궁’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함을 뜻합니다. 여기 두 종류의 쌓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해 지상에 재산을 쌓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는 문제가 되는데, 탐욕 때문에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할 우려가 심히 큽니다(눅12:13-21).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선행을 뜻하며, 재물은 손해를 보지만, 현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내세에서 영생을 상속받는 자들입니다(막10:28,29). 주님을 영접한 세리장 삭개오가 대표적이나, 이런 은총은 부자일수록 받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근심하며 떠난 부자 청년처럼(막10:17), 모든 소유를 팔아 필요한 자들에게 주고 홀가분하게 당신을 쫓으라는 권유를 들으면, 심히 근심하면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렵다.”(눅18:24,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4/2/5-8)

고린도후서11:3절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사탄은 에덴동산의 관리자 하와를 유혹합니다. “왜 선악과를 따서 먹지 않냐? 그것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다. 네가 만약 선악과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하와는 속아넘어 갔습니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동산 관리인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삶에 만족하는지를 시험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2인자였고, 가정을 이루어 즐겁게 살아갔으나, 사탄과 대화 후 불만족 하게 되었습니다. 풍부한 과일과 좋은 기후가 보장되었기에 먹고 사는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만, 아담과 하와는 마귀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 마귀의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마귀의 목적은 만유의 주님과 그분의 복음을 떠나게 함으로 인간으로 죄사함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지는 자는 이기는 자의 종입니다. 가인은 질투에 져서 살인죄의 종이 되었고, 가룟 유다는 탐욕에 져서 배신자가 되었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져서 주님을 버렸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여도, 고백과는 다르게 세상을 따라간다면 역시 치명적인 패배입니다.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시119:11). 주일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결심하십시오. 이것이 경건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

잠언28:18절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이 잠언은 의인(의로운 통치자)과 악인(악한 통치자)의 특징적 삶을 대조합니다. ‘성실하게’로 번역된 히브리어 ‘타밈’은 ‘완전한, 온전한’을 뜻하며, ‘주님을 모신 신실한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후단의 ‘굽은 길’은 ‘비틀어진 길들’이란 의미로,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태도를 총칭합니다. 세상이란 하나님의 길이 자신의 이익과 맞으면 걸어가고 틀리면 여지 없이 불순종의 길을 택하기에 구불구불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계명의 한계를 넘어 이웃을 해치지 않도록 일관성 있게 걸어가기에, 그 길은 곧고 바릅니다. 따라서 의인의 길과 세상의 길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문제는, 자기 부정이라는 좁은 길을 택하는 사람은 그 수가 적어, 불순종하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박해를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누가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본 잠언은 구원자가 하나님이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세율법에 따르면, 불의를 당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을 듣는 사람은 반드시 도움을 줄 의무를 규정합니다(신22:27). 오늘날 말하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요! 하물며, 자비롭고 정의로우신 주님께서 압제 당하는 의인의 외침을 듣는다면, 어떻게 그리고 신속히 도와 구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는 이런 원리를 쉽게 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 악인은 넘어져 패망하기 마련인데, 굽은 길로 가다보면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이나 함정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18:10).

잠언28:19절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28장의 3번 째 단락(28:19-24)은 교훈의 방향을 수직축(주님과 통치자)에서 수평축으로 이동하여, 부를 성급하게 이루려는자와 열심히 일하는 자 사이를 비교합니다. 18절의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19절에서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자로,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방탕을 따르는 자’로 구체화되어집니다. 본 절에서 솔로몬은 고대 농업 사회를 전제하여 개미와 같은 근면과 지성을 갖고 삶의 근본되는 토지를 경작하라고 충고합니다. ‘토지’란 자신의 경제적 기초가 되는 기름진 땅을 말하고,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얻는 수단을 뜻합니다(창3:17-19). 이 반면 ‘방탕을 따르는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가치없는 것들을(fantasies) 추구하는 자’를 말하고, 이는 성급하게 재물을 벌려는 태도나 도박처럼 정당한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모습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삶에 필요한 식량을 얻지 못하여 찌들게 가난하게 될 것인데,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생활양상에 대한 통계도 이 교훈을 뒷받침합니다. 본 잠언과 거의 유사한 12:11절은 ‘궁핍함이 많다’ 대신 ‘지혜가 없다’로 기술하여, 이들은 분별력이 결여된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타락 이후에는 물론, 에덴 동산에서조차 주님은 정직한 노동을 요구하는 창조 질서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뜻을 알기에 뜻밖의 횡재를 얻어 큰 부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산업이 뿌리를 내리고 맺어지는 열매로 부요한 삶을 이루려고 합니다. 분별력 있고 지혜로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만, 헛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지각이 없다.”(잠언12:11, 새번역).

잠언28:20절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20절은 경제 생활과 관련한 지혜를 계속 제시합니다. ‘충성된’에 해당하는 원어 ‘에무노트’는 ‘견고함, 확실함’을 뜻하는 ‘에무나’에서 파생되었으며, 주님 앞에서 성실 근면하게 사업 혹은 일에 임하는 자세를, ‘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뻬라코트’는 ‘행복’ 또는 ‘번영’을 뜻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정직한 자의 삶은 고지식하여 성공과 거리가 멀 것 같지만, 솔로몬은 ‘복’ 즉 번영을 겸한 행복으로 충만한 삶으로 선언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축복 때문입니다. 후단의 ‘속히 부(富)하고자 하는’이란 ‘부(富)하기를 서두른다’는 말입니다. 잠언은 ‘부’나 ‘재물’을 주님의 축복으로 보아 긍정하지만,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은 뒤, 정당한 과정을 무시하고 탐욕에 사로잡혀 추구하는 행위는 잘못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추구하면 자연히 법률을 어기게 마련입니다. 범죄자가 얻는 수익에 대하여 모든 국가는 벌금이나 몰수형을 가지고 있어 이득을 가졌다 하더라도 원하는 바를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후단은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좋은 예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 전투에서 페르시아산 외투와 금덩어리 하나를 숨긴 아간입니다. 아간과 그 가족은 탄로가 나자 모두 돌로 처형당하였습니다. 잠언의 다른 구절도 그렇지만, 여기에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암시도 담겨 있습니다. 모든 부요의 원천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제자들에게는 노력한 만큼 얻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매일묵상(2024/1/29-2/2)

시편23편, 관계의 축복(2) – 목자되신 주님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로서, 복음서의 이해를 위하여 중요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는주님의 말씀은, 단지, 그 당시 청중들에게 친숙하기에 사용하신 은유가 아닙니다. 시편 23편과 다른 시편들에서 왕 다윗과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로 은유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목자의 은유를 통해 자신이 왕 다윗과 이스라엘의 목자되심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살지 못하고, 쫓겨나야만 하는 죄의 종이었습니다(간음과 살인죄). 구속의 복음에 비추어 시편 23편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벧전 2:25 및 5:4). 시편에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한 출애굽 사건이 여기저기 메아리칩니다. 그러나, 그 메아리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다윗의 목자가 쟁취한 구속의 메아리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집니다(요10:11). 암으로 죽어가는 어린 소년의 어머니는 그에게 시편 23편을 가르쳐 주면서 엄지손가락부터 시작하여 손가락으로 다섯 단어를 세면서 “The Lord is my shepherd”를 반복하게 했습니다. 그의 약지는 “my”라는 단어였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이 그와 맺은 관계를 상징하는 손가락을 주먹에 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소년은 약지를 잡은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목자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나의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와야 합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잠언28:15절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악한 통치자의 등장으로 우리 민족도 많은 수탈을 당하였으며, 우리가 겪은 그들의 학정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과 같이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13:1;출22:28)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매, 통치 권력 역시 선한 것이나(딤전4:4; 롬13:1), 악한 통치자는 그 ’선한 제도’를 타락시켜 사익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따라서, 모두 힘을 합쳐 이 짐승들을 몰아내듯이, ‘악한 통치자(관원)’를 쫓아내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프랑스 대혁명; 저항권). 한편, 국가와 교회(성도)의 관계에 관해 4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1)국가가 교회를 통제한다는 ‘국가 만능론’, (2)교회가 국가를 통제한다는 ‘신정’, (3)국가가 교회에 호의를 베풀고 교회는 그 호의를 계속 받기 위해 국가의 편의를 도모하는 타협안인 ‘콘스탄틴주의’, (4)교회와 국가가 건설적 협력 정신으로 하나님 주신 각자의 독특한 책임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반자 관계'(타당, 존 스토트). 로마서 13장은 로마나 유대 당국은 대체로 교회에 비호의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순종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고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는 날 선말로 비판하였으나, 4천억 비자금을 가진 노태우 전직 대통령에게는 ‘어떤 돌이라도 맞겠다’고 하였으니 품어 주자 한 말은 참고가 됩니다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들이 선출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투표해야 합니다. “이전 총독들은…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느5:15).

잠언28:16절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16절은 15절의 악한 통치자의 출현의 이유와 공의로운 통치자가 되는 비결을 진술합니다. 전단은 악한 통치자의 학정의 이유는 ‘무지함’ 때문이며, 후단은 장수하는 공의로운 통치자의 비결이 ‘탐욕을 미워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무지한’의 원어는 ‘하싸르 테부노트’이며, ‘이해력이 없는’ ‘지식이 부족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공동 번역은 ‘어리석은’, 새번역은 ‘슬기가 모자라는’으로 번역하였으나, 단순히 통치 기술이나 능력의 부족으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근원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통치자의 도덕성 문제입니다. 그 통치자는 참된 통치의 길인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기에, ‘잘못된 행위’로 요약되는 탐욕, 착취, 수탈 등의 ‘포학’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포학을 크게 많게 행한다’고 묘사되어,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15)의 모습을 또 한 번 생각나게 합니다. 1989. 12. 25에 총살 당한 독재자 차우체스코 루마니아 대통령 부부가 떠오릅니다. 루마니아 국민들이 차우체스코의 학정에 분노하여 들고 일어나자, 이들은 헬기를 타고 도망가다 잡혔습니다(12/23 체포). 그리고 전격적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결정되었고, 2시간 만에 집행되었습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이를 알고 매우 두려워 하였습니다. 후단의 ‘탐욕을 미워하는’이란 ‘폭력에 의한 취득’ 혹은 ‘불의한 이득’을 뜻하며, 전단의 포학의 목적을 알려줍니다. 공의로운 통치자는 당연히 이런 불의한 짓을 거부하고 바르게 백성들을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장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22:4).

잠언28:17절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에게 번성의 축복과 생명 존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6:6). 17절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인간 생명의 고귀성을 또 한 번 확인합니다. ‘사람의’에 해당하는 원어는 ‘나페쉬’이며, 이는 ‘숨쉬는 존재’를 지칭하나, 여기서는 살아 숨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창9:4), ‘흘리다’의 원어는 ‘아슈크’로서 ‘학대 받는 자’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전단은 ‘사람의 피를 흘린 것 때문에 몹씨 괴로워 하는 자’를 의미하여, 살인자가 받는 무서운 죄책감을 극명하게 표현합니다.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다’는 ‘죽을 때까지 도망 다녀야 한다’ 혹은 ‘무덤(구덩이)으로 달려갈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함정’을 말하는 원어 ‘뽀르’가 ‘숨는 장소’나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정개역은 ‘함정’으로 번역하여 심판과 멸망의 뉘앙스를 줍니다. 한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정죄를 당하자, 자신이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을 알고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후단은, 살인의 죄책을 진 후, 도망다니는 자(가인)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자(가룟유다)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다만, 다윗과 같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경우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시편51장). 15,16절과 연관하여 보면 회개하지 않는 악한 통치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인하는 메시지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5:17)

시편23편, 인도의 축복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본 시편 1-3절에서 다윗은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로 부족함이 없었으며, 4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안전하게 인도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그 인도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계명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영웅이요, 왕 사울의 사위와 군대장관이었지만, 사울의 질투를 받아 광야로 도주하여 숨어지냈습니다. 그 와중에 사울이 군대와 함께 다윗을 잡으러 엔게디로 왔다가 용변을 보러 들어간 동굴에 다윗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미 원수를 넘겨준다는 주님의 신탁과 부하들의 압력에도 다윗은 몰래 옷자락만 자르고 살려보냈습니다. 또 다윗을 쫓던 사울의 전 군대가 하길라 산에서 진을 치고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함께 내려 간 아비새의 요청을 거절하고 오직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왕이 되려는 야망, 부하들과 가족이 받는 고생, 주님의 신탁 등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세우신 왕을 치면 안된다는 계명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0년 간의 광야와 망명을 통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도 없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그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십시요! 삶이 어두울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기도로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요. 조용히 주님 손에 맡기고 삶을 계획하십시요(딤후2:7). 어려움에 닥치면 기도하십시오! 주님 피할 길을 만들어내시고(고전10:13) 반드시 지혜를 주십니다(약1:5). 고생은 되지만 후에 되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