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22-26)


(기도, 응답, 그리고 믿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빌립보 교회는 AD51년 경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 세워졌고, 자주옷감 장사 루디아와 그 가족, 점치는 귀신에게서 놓여난 여종, 그리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이 교인이었고, 목사는 의원 누가였습니다. 8년 후 사도 바울이 가이샤라 감옥(가택연금)에 있을 때 선교물품을 보내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감사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그들도 여러 걱정 근심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는 감사의 태도를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걱정 근심을 초월하는 마음의 평화가 응답으로 오니 염려말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심을 믿어야 합니다(히11:6). 그때 우리 마음은 평화를 누리고 걱정 근심에서 놓여나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훈현 9단과 창하호 9단이 둔 6회 삼성화재배 결승 제3국으로 기억됩니다(2001년). 창9단이 조9단의 대마를 포위하여 사는 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사들이 걱정할 때, 조9단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 한 집을 더 만들고 승리하였습니다. 조9단은 그 한 집을 이미 70 수 전에 보아두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70수 동안 조9단이 계산한 그 길을 한 수도 틀리지 않고 진행한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뢰가 그렇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겨내지 못할 상황은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사랑(관용)을 베풀 힘의 근거를 갖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시46: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8:12절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잠언28:12-28절은 “‘부’의 지배와 획득 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단락이며 12절과 28절은같은 내용으로, 본 단락의 서론과 결론입니다. 본문은 13-18절(주님과 통치자), 19-24절(수고하는자, 약삭빠른 자와 재물), 25-27절(주님을 신뢰하는 관대한 자, 인색한 자와 재물)의 3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1:8). 지혜자는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여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준행하고,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그것을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한편,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인 율법의 준행 여부입니다. 그렇다면, ‘의로움’과 ‘악함’은 각각 지혜와 미련함의 윤리적 측면을 드러냅니다. 전단에서, ‘의인이 득의(得意)한다’는 것은, 의인이 바라는 통치가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자로서, 이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 국가는 번영하고 백성들은 행복을 누리며, 열방 가운데서도 영광을 얻게 됩니다. 열왕기와 역대 기자는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히스기야 시대의 통치를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후단은,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돌려 듣지 않는’ 어리석은 악인이 권력을 잡아 학정을 하는 시대를 말하며, 므낫세의 55년 통치가 그 예입니다. 우상숭배는 물론, 선지자 이사야를 포함하여 무죄한 자를 또한 많이 죽였습니다. 공동체의 번영 없이 개인의 번영은 없습니다. 이번 22대 국회의원 선거(4/10)에서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분들이 뽑히도록 기도하면서 투표해야 할 것입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11:10)

잠언28: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에서 ‘죄를 자복한다’는 표현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12절은, 하나님의 자비와 참된 회개를 요청합니다. ‘악한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 일터, 그리고 일상의 삶을 망가트리는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만약 악함이 공공연히 드러날 경우는 물론, 은밀히 행해지더라도 결국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런 운명을 역전시키려면, 자신의 악을 고백하고 악한 행동을 버렸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공동체의 자비와 동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웃의 허물은 덮어줄 수 있지만, 자신의 죄를 덮지는 못하고 다만 숨길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 같이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깨닫고 고백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시편19:12). 숨은 허물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타인의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 비판을 듣고 잘못을 인정한 뒤, 행동을 고칠 수 있다면 그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다윗과 삭개오가 그렇습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와의 간음을 은폐하려고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일년이나 숨겼으나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자 인정하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으나, 주님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비난을 받자, 즉시 회개하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토색한 것들은 4배로 갚겠다고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였습니다. 교부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에 따르면, 훗날 그는 전 재산을 나누어주었고, 가이샤라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잠언28:14절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경외’로 번역된 원문은 두려움과 공포로 떤다는 의미를 갖는데, 전단을 직역하면, ‘늘 두려워 떠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순어법이죠! 우리는 언제나 스트레스 없는 삶을 열망하는데, 어떻게 ‘늘 두려워 떠는 자가 복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항상 깨어 대비토록 하여, 화를 미연에 방지 하거나, 또는 화가 닥쳐도 그 피해를  최소한에 그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그 반대입니다. ‘완악하게 한다’는 원어는 ‘마크쉐’로서,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할 때 보여주는 가혹한 태도를 지칭합니다, 소가 목에 힘을 주고 일하지 않으려고 버팅기는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굳어 있으면 새로운 방법이나, 개선책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비록 개선책이 나와도 반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재앙을 당하고야 정신차리게 됩니다. 좋은 예가 모세를 통해 시현되는 하나님의 재앙들을 친히 겪어 보고도 마음이 굳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보내려고 하지 않는 바로의 모습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아들을 포함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잠언의 취지는 주님을 두려워(경외)하여 악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죄를 멀리하고 따라서 벌도 없기 때문에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실로 경건한 두려움과 참된 행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대조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굳어 있는 자는 재앙을 늘 두려워 하여 자기를 지킬 우상을 만드나 소용 없습니다. 늦어도 마지막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28:1).

시편23편, 관계의 축복(1) – 목자되신 주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시편23편은 다윗의 시로서, 하나님과 시인과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에 비유되어 있고, 출애굽사건과 광야의 경험, 그리고 영원의 삶까지 노래합니다. 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 (가) 양과 목자(1-3절)-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 (나)여행자와 동반자(4절)- 인생의 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 손님과 연회의 주인(5,6절) –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골리앗과의 전투, 사울의 집요한 추적, 피를 보지 않고 통일하고자 7년의 인내, 주변 국가들과 끊임 없는 전쟁, 압살롬의 반란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다윗은 본 시를 통해 감사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고난 속의 노래, 밤의 노래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여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입니다. 인생의 밤이 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일생만 놓고 보면 이 시와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부하를 죽이고 그 부인을 빼앗았으며, 가정을 파탄에 몰고 간 사람이며 결국 사망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편 6절은 ‘살리로다’라고 통상 번역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그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는 의미입니다. 즉 땅의 ‘길’, ‘골짜기’, ‘위협’이 끝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진정 귀환할 것입니다. 모두 죽었는데 어떻게 영원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을 암시한다 하겠습니다. 다윗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갖는 축복입니다.”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매일묵상(2024/1/15-19)


시편105:18,19- 요셉과 하나님의 섭리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감옥에 갇혔으나, 계속 신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신실함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19절이 답을 줍니다.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사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산을 가졌습니다. 특히, 요셉은 하나님께서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그들을 섬길 것이나….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는 말씀을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유산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갖고 요셉은 늘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습니다.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의 태도는 이것입니다. 재미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어떤 여대생이 어머니와 함께 용하다는 점쟁이로부터 영부인이 될 관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후로 그 여대생은 미팅조차 삼갈 정도로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렇게 인내하는 동안 성품은 온전하게 되고, 겸손이 몸에 밸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은사를 주시므로, 내게 도착된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죄수생활 동안 ‘꿈 해몽능력’을 받아 죄수에서 총리로 수직상승할 수 있었으나, 파라오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린 모습은 좋은 예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잠언28:9절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율법’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됩니다. ‘율법’의 원어는 ‘토라’이며, 모세율법이나 이를 토대로 한 현자와 부모의 가르침이 포함되며, 잠언의 교훈 역시 들어 있습니다(28:4, 7). ‘율법을 듣지 않는다’는 말은 불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는 자’가 고난을 당해 부르짖는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본절에서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그의 종교적 선행(기도, 금식, 헌금 등)조차 하나님께 역겹다는 점과,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지 않은 기도는 정욕을 위해 잘못 구하는 것이므로 응답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약4:3). 그러나, 불순종하던 자라도 회개하고 그분의 율법에 귀를 돌려 순종한다면, 그의 기도는 들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회개를 강조하는데,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그 백미입니다(눅15장). 탕자는 아버지 재물을 분배 받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거지가 되자,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요청하나, 아버지는 오히려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가인과 틀립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나 결코 뉘우치지 않았고 다만 처벌만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벌을 면하자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 놋 땅으로 갔습니다, 가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가인은 율법에서 귀를 돌렸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주님은 역겨운 일을 하는 사람은 미워하시고, 바른길을 걷는 사람과는 늘 사귐을 가지신다.”(잠3:32,새번역)

잠언28:10절
“정직한 사람을 나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은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지지만, 흠 없이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새번역)

악한 자가 된다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지만, 정직한 자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것은 배나 더 나쁩니다(마23:15). 악인에게는 심판이 예정되어 있지만(마23:33),  ‘흠 없이 사는 사람’ 즉, 온전하고 슬기롭게 행동하는 자들은 오히려 악인이 원하는 좋은 것들(=복), 예를 들면 재물, 명예, 건강, 화목한 가정, 영생, 하나님과 바른 관계 등을 유산으로 받습니다. 그러면, 악인과 선인의 구별기준은 무엇이겠습까? 하나님의 말씀(계명)입니다. 선악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 논할 수 없으며,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 여기에 온 율법과 선지자가 매달려 있습니다(마22:40). 한편, 정직한 자도 유혹 받지만, 만약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시119:11). 마귀의 시험을 받자 주님은 간직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터잡아 이기신 것은 그 본보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계명)은 신자의 가장 큰 재산이며, 그 재산을 우리 소유로 만들려면 밤이 필요하고, 그 밤에 주님을 생각하여 그분의 법도를 지키면 우리는 큰 영적 재산을 얻게 됩니다(시편119:55-57) 또,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눅17:1)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선악분별이 힘든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이기는 또 하나의 길은 아예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시편119:98)

잠언28:11절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본절은 “‘부’의 지배와 획득 시 ‘율법(=토라)’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단락(28:1-11)의 결론입니다. 잠언은 부를 긍정하며 가난보다 좋은 것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어느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18:11)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잠언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어리석은 자보다 더 소망 없는 자로 정의합니다(26:12). 따라서, 그 부자는 지혜(가르침)를 통해 고침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적습니다. 재물이 자부심과 결합될 때 재물의 긍정적인 가치가 사라지는 이상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 반면, 세상의 재물은 부족하여도 하늘의 지혜에 부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본절은 그를 ‘가난해도 명철한 자’로 정의합니다. 그의 목적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 삶’(약3:18)이며, 그의 방법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교훈대로 행하는 것입니다(요8:31-32).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교만한 부자를 만나면, 하나님의 계시에 토대를 둔 도덕적 분별력으로 그를 살핍니다. 그때 그 부자의 이기적 동기와 이중 인격의 냄새가 나면,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스스로를 지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님의 말씀은 즐거움이요, 천천금은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119:72,11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와 교제를 나누어 지혜, 지식, 희락을 주시며, 부자가 모아 쌓은 재물을 넘겨주사 관리하게 하시고(전2:26), 영생을 그의 보상으로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믿음과 섭리)
하만에 의한 유대인 학살 음모가 시작되자 모르드개는 황후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행동을 촉구하였습니다. 에스더는 결단을 내려 금식 기도한 후,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 구원을 위해 나섰으며 주님은 에스더를 통해 유대인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역사적 구원의 경험이 부림절의 기원입니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하도록 애굽의 총리로 임명 되자, 비로서 만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300킬로 밖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버지 야곱을 찾지 않고 오직 총리 직에 몰두합니다. 8년 후, 흉년을 당한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내려와 자신 앞에 절할 때 20년 전 꾼 꿈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섭리의 종착점을 깨닫습니다(창42:6-9). 이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의 시작이었습니다(창15:13-16).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섭리, 즉 ‘자신, 가족, 그리고 이웃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을 깨닫기까지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캘빈의 말입니다: “철학자들도 바울의 말(행17:28)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살아간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바울이 찬송하는 그분의 은혜에 대한 진지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맛보아야만 그분의 아버지다운 사랑을 깨닫는데, 그 돌보심을 전혀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상권 239-40). 운명이나 우연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선을 행하시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안식을 누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4/1/8-12)

(고난과 섭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기도 하기에 눈앞의 결과에 흔들리지 말라는 교훈이자만, 만유를 통치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갖습니다. 17살의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 갔을 때, 요셉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물론 절망과 원한 등으로 심히 괴로워 하였을 것이나,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기 전에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될 것이다’(창15:13,14)는 말씀 역시 간직하였습니다(시편105:17-19). 그는 애굽에서 93년을 살면서 그 말씀의 일부가 성취되었음을 확인하였고, 이스라엘 후손들이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나가라고 단단히 맹세시켰습니다(창50:24-26). 비록 요셉의 고난은 자신의 교만, 야곱의 편애라는 허물이 한 축을 이루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불신자들보다 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란 질문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재수 없다라든지, 전생의 업보 등으로 합리화 하겠으나,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의문이 차 오르며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이때, ‘자신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굳게 서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주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롬8:28)는 말씀과 함께, 요셉처럼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시험을 이길 지혜를 구하여 받을 수 있는 기도의 특권, 교회의 중보기도 및 위로가 있기에 든든합니다(약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잠언28:6절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성실히 행하다’는 말은 ‘흠 없고 완전하다-blameless and whole)라는 의미이며, ‘굽게 행하다’의 원어는 ‘굽은 길을 가다’이지만, ‘두 마음을 품다 or 두 길을 가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본절은 ‘성실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와 ‘굽게 행하는 부자’를 대비시켜, 불의로 가득 찬 이 땅에서는 두 마음을 품고 굽은 길을 가는 자도 부자가 될 수 있는 반면, 성실하게 일하며 흠 없이 완전한 길을 가지만 가난하게 살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잠언은 ‘부자’ 혹은 ‘재물’을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10:15;14:20;19:7). 다만, 이 ‘재물’이 불의나, 교만과 관련되었다면 질타를 받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도덕과 재물이 서로 배타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무엇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잠언은 아무리 ‘부’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더라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에는 비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올바른 삶’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가난’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에, 본절은 ‘나으니라-better’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르고 성실하게 사는 부자’는 ‘올바르고 성실하지만 가난한 자’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시영 선생은 수 조원이 되는 토지를 팔아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한 뒤 일생을 가난하게 산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난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 길을 보고 선택한 사람은 비상한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잠언28:7절
“슬기로운 아들은 율법을 지키지만, 먹기를 탐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욕을 돌린다”(새번역)

자녀가 슬기로운지 여부는 그들의 행동의 효과, 특히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아야 합니다. ‘율법’의 원어는 ‘토라’이며, 모세율법이나 그것을 토대로 한 현자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본절은 4절의 교훈과 함께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에 따르면, 율법에 대한 태도가 사람들을 평가하고 친구를 선택 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아들은 나쁜 친구를 선택하며, 부모를 욕되게 하고 가족의 결속을 깨뜨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7), 하나님은 그의 기도조차 역겨워 하실정도로 관계가 틀어집니다(9) . 이와 같이 율법은 친구 선택, 가족과 하나님과의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도자이므로,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후단의 ‘먹기를 탐하는 사람들’이란, ‘완악하고 패역하여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는 신명기21:18-21절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모세율법은 그런 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규정하므로, 본절은 더나아가 ‘먹기를 탐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만 해도 정죄받는다’란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어느 저명 인사의 가정은 모두 교회를 다녔지만,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가정은 파탄났고 그 자녀는 마음 둘 곳이 없어 금지된 약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정치생명이 끝난 것은 작은 일입니다. 아직도 그는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

잠언28:8절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잠언에서 재물은 좋은 것이며, 종종 지혜와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생각되지만(3:9-10;10:15,22),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는 몇몇 사람들은 불법적으로 재물을 축적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불법적인 방법 중 하나가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고 중한 이자- 30%에 달함-를 받는 것입니다. 모세율법은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부과할 수 있지만,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이자 자체를 금지하였습니다(출22:25;신23:20). 그러나 이 규정에 위반하여 가난한 동족에게 중한 이자를 부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느5:7,8). 모세율법은 법을 집행하는 구체적인 기관이 없이 다만, ‘하지 말라’는 규정만 두지만, 집행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이거나 하나님입니다. 본 잠언은 이자 금지 규정을 위반한 자는 재물을 빼앗겨서 가난한 자를 친절히 대한 누군가에게 주어짐을 교훈하는데. 그 배후는 하나님이고, 그분의 방법은 섭리이며, 섭리의 매개자는 하나님이 부를 위탁하실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본절은 가난한 자에게 관대함을 강조하는 잠언의 여타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11:24;28:27). 그러나, 만약 사업을 위해 이자를 지급하기로 약정하고 자본을 빌리는 경우는 허용되었을까요? 당연히 허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리를 취하지 말라는 전제는 가난한 자들의 궁핍한 상황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랍비 힐렐은 사업을 위한 경우 모세율법에서 정한 규정의 예외라고 해석하여 이자를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언13:22).

(요셉과 하나님의 섭리)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편105:16,17)

하나님은 기근이 발생하기 20년 전에, 4가지 목적을 위해 요셉을 종의 신분으로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첫째, 닥칠 기근에서 아버지 집안을 구원하기 위해. 둘째, 그 당시 전 세계를 상징하는 근동지역의 모든 백성들의 삶을 보존시키기 위해. 셋째, 구속사적 측면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넷째, 영원의 차원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 사건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체로 오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실로 요셉의 일생은 그 모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을 밝히 드러내는 신구약 성경을 가진 우리와 달리, 정작 당사자 요셉은 불행의 이유나, 섭리 등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기약 없는 종살이였지만, 하나님은 범사에 형통케 하시고, 요셉은 보디발을 성실히 섬겨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자들도 요셉과 같이 타인의 인정을 받는데, 이는 그들이 주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 살며, 부활의 소망과, 주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책임감 있게 노예생활을 하자,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주인 보디발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음을 성경은 거듭 언급합니다. 고난을 통과할 때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난이 끝나는 때는 모르지만, 흰개미가 결국 4미터의 집을 지어내듯이, 주님께서 이 모든 조각을 모아 원하시는 집을 지어가시는 도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안식하십시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매일묵상(2024/1/2-5)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1509-1564)의 신학은 사도 바울의 “섭리와 은총”에 기반합니다. 칼빈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오로지 부친의 뜻을 따라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그가 배운 신학과 법학은 언어와 변론 능력을 향상시켰고, 법철학은 판단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부친이 죽자(1531)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습득 및 많은 고전을 섭렵하면서 고전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섭리적 준비를 거친 칼빈은 탁월한 라틴어 문장가요, 엄격한 성서주의자인 동시에 뛰어난 인문학자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는 30년 뒤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자신의 일생이 부친이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 것처럼 보이나,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칼빈은 자신이 종교개혁에 뛰어든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칼빈은 성격이 수줍고 소심하였기에, 은거하여 늘 혼자 연구하려고 하였으나, 격동하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상황 속에서 파렐이나 마르틴 부처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은 그의 은사– 『기독교 강요』, 교부들에 대한 탁월한 학문적 능력 등- 를 보고 대중 앞으로 불러내었고, 그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제네바에서 개혁교회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많은 고난이 예상되었음에도, 칼빈은 그런 부르심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 개혁신학과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칼빈의 삶이 말하듯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인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으로 이끄신다’는 섭리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지혜입니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4:27)


잠언28: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본 잠언은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을 두 영적 범주로 분류합니다: ‘율법을 버린 자’와 ‘율법을 지키는 자.’ 그들의 각각의 특징은 악인을 ‘칭찬는 자’와 ‘대적하는 자’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구분짓는 선(線)은 인종, 정치적 성향, 종교적 믿음도 아니고 오직 영적 특성이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성품으로부터 악인들 대적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악인을 칭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은 ‘토라’의 번역으로 모세율법을 지칭하나, 통상 확대되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말씀, 교훈 등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의 정신에 충실한 부모나 현자의 교훈은 모두 본절의 ‘율법’에 포함됩니다. ‘악인을 칭찬하다’는 말은, 국가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악인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혹은 그들의 행동에 동참함을, 혹은 악을 사랑하는 태도를 의미하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영적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단의 ‘악인을 대적한다’는 표현은 악인의 악을 분별하여 미워할 뿐 아니라, 그 악을 제거하여 주님의 공의를 세우려는 한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8장은 사람을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로 구분하여, 전자는 오로지 육신에 속한 것(육신=자기 중심의 사람을 의미)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인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롬8:5-8).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영생을 가진 자는 누구나 주님의 계명에 삶의 주소를 두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잠언28:5절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여호와’란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창조주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떠나서는 정치를 논하지 못하는 것처럼, 만유의 통치자인 주님을 고려에 넣지 않는다면 심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더구나, 주님께 반역하는 악인의 경우 무엇이 정의(미스파트)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정의’는 ‘미스파트’의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미스파트’는 ‘정의’ ‘판결’ 혹은 ‘소중한 것’을 의미하고, 삶의 옳고 그름과 가치관의 선악을 판단할 기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배제된다면 정의나 가치관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 임을 가르치며, 이 가르침을 따라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찾는다면 선악의 문제를 분명히 깨닫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후단의  ‘모든 것’에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자를 구제해주고, 압제자를 벌주는 등 공동체를 회복시킬 적절한 시기와 방법이 포함됩니다. ‘여호와(주님)를 찾는 자’는 그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며, 주님께 보상을 받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1600km 떨어진 수산성에서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백성들은 고난 받는다는 소식을 듣자, 하나님께 자신을 총독으로 보내달라고 간곡히 기도드렸고, 그 응답으로 적법절차를 밟아 유대총독으로 부임하여 즉시 성을 중건하고, 모세율법에 따른 바른 예배를 확립하였습니다. 12년 이상 총독의 녹도 받지 않은 느헤미야에게 주님은 마지막날 생명의 부활로 보상하실 것입니다.“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섭리, 성경, 그리고 믿음
“아프리카 초원의 버섯흰개미들은 4미터 이상의 높이에 복잡한 내부 구조를 가진 탑 모양 둥지를 만들어 거기서 수백만 마리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습도를 조절하는 환기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새끼들을 기르는 육아실과 소화를 돕는 균류(흰개미버섯)를 재배하는 넓은 방들도 따로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이 개미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단지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에 기초한 10개 내외의 빈약한 소통 수단만으로 이토록 놀라운 일들을 해낸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즉 흰개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4미터 넘는 거대한 탑 모양의 둥지를 건설할 목적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다만, 본능적 욕망이 만든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을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여서 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흰개미의 산출물인 4미터의 탑은 우연이나, 지성의 측면에서 보면 필연입니다”(김용규, 신, 482). 한 쪽은 우연, 다른 쪽은 필연이란 말은 관점의 차이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섭리도 같습니다. 섭리신앙이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삶의 결과를 맡기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여러 고난이 존재하고, 이러저러한 두려움과 미래의 불안은 사람으로 고뇌하며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역사의 주님으로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지혜, 섭리, 선하신 목적 등을 증언하는데, 그 어떤 책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통치를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3,000년 전 다윗 시의 일부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편37:5,6)